나는 사십 세에 처음으로 문단이란 데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 나이에 등단을 한다는 게 희귀한 예에 속했던 것 같다. 어떻게 그 나이에 소설을 쓸 엄두를 냈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어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심심해서 글을 썼노라고 대답했다. 그게 그냥 기사화되자 뜻하지 않은 야단을 맞게 되었다. 문학이라는,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엄숙한 작업을 어떻게 심심풀이로 할 수 있느냐는 준엄한 전화 설교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아직 신인인 나는 말 한마디의 잘못으로 세상에 밉보이는 게 두려워 덮어놓고 사과부터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잘못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전쟁 중에 결혼해서 두 살 터울로 아이를 다섯씩이나 난 여편네가 언제 심심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족을 위해 24시간 봉사해야 하는 생활로부터 어느 정도 놓여나 비로소 자기만족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생긴 걸 그렇게 말한 거였다. 그때까지 나는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갈망했던가. 심심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때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유년의 시간이 칠십 평생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건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의 넉넉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심심해서 베개를 업고 자장가를 불렀고, 게딱지로 솥을 걸고, 모래로 밥을 짓고, 솔잎으로 국수를 말았다. 할아버지가 송도 나들이를 가신 날의 해질 무렵처럼 심심한 시간이 또 있을까. 그때 나는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재촉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사랑 툇마루 가운데 기둥을 한 팔로 감고 동구 밖 산모롱이에 할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밤이면 승냥이가 떼를 지어 나온다는 긴등고개를 넘을 때면 무서움과 할아버지의 무사를 비는 마음으로 가슴이 오그라져 붙는 것 같다. 할아버지를 따라 동구 밖까지 다 왔는데도 산모롱이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소리개

 

고개 쯤으로 할아버지를 후퇴시킨다. 이렇듯 내 어린 날의 심심한 시간은 내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초중고등학교 때도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은 넘치게 많았다. 심심한 시간이 넉넉해서 소설이나 시집을 읽을 수가 있었다. 읽을거리까지 넉넉한 건 아니어서 정 심심할 때는 읽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요즘 애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더러 들리는데, 심심할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학교 성적과 무관한 책을 읽을 수가 있겠는가. 그건 괜히 한번 해보는 걱정일 뿐 어른의 진심도 아니다. 아이들은 심심할 시간은 커녕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돌아가는 팽이와 다름없다. 자의로 도는 팽이는 없다. 자식이 행여 한눈이라도 팔세라 온종일 미친 듯이 채찍질 해대면서 책 안 읽는다고 걱정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P.214~217 )

 

 

 

                                                                   -박완서, <노란집>-에서

 

 

 

 

 

 

 

 

    어느새 아침 저녁으로 찬 바람이 솔솔 부는 이 가을, '엄마의 휘모리장단'이라  제목을

    붙인 따님 호원숙님의 서문처럼, 박완서 선생님께서 2000년대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집에서

    쓰신 글들을 모은 책, <노란집>을 읽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나친 미사어구도, 유난한 기교도 없지만 그럼으로써 더욱 박완서 선생님

    다운 "내가 겪고 깊이 느낀 것 밖에는 잘 쓰지 못한다. 내가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신 말씀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 책을 읽으며 참으로 즐거웠다.

    박완서 선생님의 육신은 비록 이곳을 떠나셨지만, 그분의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는 지금도

    여전히...우리가 어떻게 잘 살아야 할 것 인가,를 마치 곁에 앉아 조근조근 말씀해주시는 듯

    하다. 그리고 더불어 이철원 화백의, 글과 꼭 어울리는 아름다운 삽화도 참 좋다.

    유난히 지독한  여름을 견디고 지낸...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추석선물로 주고 싶은

    차분하게 마음을 놓게 하는 그런 책이다. 초가을의 어느 좋은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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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9-07 14:25   좋아요 0 | URL
느긋하게 지낼 적에는 짜지도 달지도 맵지도 않은
보드라운 맛을 즐겨요.
곧, '심심한' 맛이 되겠지요.

일본영화 <녹차의 맛>처럼 '심심하'면서
차분히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바란
박완서 님 늘그막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appletreeje 2013-09-08 06:45   좋아요 1 | URL
예~그러셨으리라 생각되요.
<녹차의 맛> 참 좋은 영화지요. ^^

비로그인 2013-09-07 15:50   좋아요 0 | URL
<노란집>에서 박완서 님은 '심심함'에 대한 말씀을 하셨고..
트리제님은 노란 종잇장(옐로우 페이퍼?ㅋㅋ)에 그 말씀을 아주 삼삼하게 적어놓으셨고...

심심하면 좋겠습니다,정말로요. 어디 무인도에서 굶어죽게 되더라도..
아니 아니 다시 말 바꿀게요. 그런 데 혼자 떨궈놓으면 무서워서 단 1초도 심심하지 않겠단 생각이..ㅎㅎ

appletreeje 2013-09-08 06:51   좋아요 1 | URL
옐로우 페이퍼...ㅋㅋ
정말 요즘 세상은 좀처럼 '심심하기'가 어려운 듯 해요.
심심할 수 있다는 것은 느긋할 수 있다는 의미일텐데...
저도 무인도에 혼자 가는 것은 무서워요~~ㅎㅎ

안녕미미앤 2013-09-07 22:51   좋아요 0 | URL
에이요! ^^ 잘 있었어요? 헤헤~~ 박완서님의 이 이야기는 다 아는 글이었는데 또 읽으니 또 좋네요 헤헤 나 약속했던 거 얼마나 기다렸어요? 많이 기다려줬음 좋겠다 생각도 했었는데 나 넘 이기적이라고 싫어할거에요? 실은 기다려줬음해서 늦은 건 아니구(나 그렇게까진 안 나빠요^^;) 좀 바빴어요 아프기도 했고.. 그런데 그날 날씨가 뭐 날릴만한 날씨가 아니었던것 알아요? 헤헤 그냥 패키지만 했어요^^ 그래도 뿌듯했답니다^^ 어느 탈북하신 분 간증도 듣고.. 완전 기적적이더라구요, 정말.. 놀라움^^ 음음~~ 다음에 또 소식 전할께요^^ 뿅~^^*

appletreeje 2013-09-08 06:57   좋아요 0 | URL
왕~~안녕미미앤님! 잘 지내셨지요~?^^
그럼요, 8월 24일 거사. 많이 기다렸지요~날씨도 그랬던 것도 알구요.^^
패키지만 하셨어도 참 잘 하셨어요!! 어떤 마음인지 다 잘 아니까요.
이궁..아프셨구나...바쁜 건 좋은 일이지만, 아프지는 마시길 바래요...
언제나 착하고 예쁜 안녕미미앤님!
늘 즐겁고 행복한 날들 되시길 바라며, 빨리 또 만나요~*^^*

안녕미미앤 2013-09-12 00:32   좋아요 0 | URL
왕~~ 감사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