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사 뒤꼍에서
신갈나무 그늘 아래서 생강나무와 단풍나무 사이로
멀리서 오는 작은 강물과
작은 강물이 만나 흘러가는 큰 강물을 바라보았어요
서로 알 수 없는 곳에서 와서
몸을 합쳐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강물에
지나온 삶을 풀어놓다가
그만 똑! 똑! 나뭇잎에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지요
눈물에 반짝이며 가슴을 적시는 나뭇잎
눈물을 사랑해야지 눈물을 사랑해야지 다짐하며
수종사 뒤꼍을 내려오는데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서 뒤돌아보니
나무 밑동에 단정히 기대고 있는 시든 꽃다발
우리는 수목장한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던 거였지요
먼 훗날 우리도 이곳으로 와서 나무가 되어요
나무그늘 아래서 누구라도 강물을 바라보게 해요
매일매일 강에 내리는 노을을 바라보고
해마다 푸른 잎에서 붉은 잎으로 지는 그늘이 되어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삶을 바라보게 해요 (P.11 )
염소 브라자
북쪽에서는 염소가
브라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웃으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먹어야 하니까
젖을 염소 새끼가 모두 먹을까봐
헝겊으로 싸맨다는 것이다
나는 한참이나 심각해졌다가
그만 서글퍼졌다
내가 남긴 밥과 반찬이 부끄러웠다 (P.22 )
속빈 것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
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P.63 )
-공광규 詩集, <담장을 허물다>-에서
![](http://image.aladin.co.kr/img/shop/2012/bd_t18.gif)
경계와 구분을 지우는 무소유의 충만함
1986년 등단 이후 줄기차게 자본주의 현실의 모순을 강렬한 언어로 비판해온 공광규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담장을 허물다]가 출간되었다. 전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를 통해 치열한 현실 비판의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양생(養生)의 시학'을 모색한 시인은 5년 만에 새롭게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불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순정하고 투명한 서정"(유성호, 해설)이 깃든 웅숭깊은 내면적 성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통찰과 예지로, 진부한 일상에서 깨달음을 구"하며 "광학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자연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이재무, 추천사)가 어우러진 견결하고 단아한 시편들이 삶의 그늘 속에 희망의 언어를 지피며 따뜻한 감동과 깊은 공감을 선사한다. '2013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이자 표제작 [담장을 허물다]를 비롯하여 진솔한 삶의 체험 속에서 일구어낸 45편의 시를 수록했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다 문득 생각했다.
이번 가을엔 아주..조용히...천천히 살아야겠다고.
우리집 민달이처럼, 그렇게 예쁘고 즐거운 산책을 해야겠다고.
그리고 나도 좋아하는 프란치스코 회관에 가면, 정동 길거리에서
맑은 소리 나는 오카리나 두 개 사서, 그대와 나 둘이 오카리나 불며
정답고 환하게 웃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