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강연을 갔을 때였다. 강연을 들으러 온 여자분이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 책 사서 오늘 사인 받을 생각이었는데요, 헌책방에 갔다가 횡재를 했지 뭐예요. 글쎄 선생님이 직접 서명한 책을 찾았어요!"

 그녀는 나에게 책을 펼쳐 보였다.

 "아. 이 책을 누가 팔았는지는 비밀로 해야 하나?" 하면서 뒤늦게 손가락을 들어 누구누구에게, 라는 글자를 가렸지만 나는 이미 보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다소 당황스러워서 그냥 웃고 말았다. 한 번도 중고서점에 가 본적이 없던 때였다. 짧게 말하자면 그날, 몹시 서운했다.

 

 

 나는 요즘 일주일에 두 번씩은 강남역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간다. 오늘 새로 들어온 책 이천 몇 백 권,이라는 숫자판이 걸려 있고 빽빽하게 선 책들 사이로 사람들이 많다. 새 책이 아니다 보니 펼쳐볼 때도 그다지 마음에 부담감이 없어서 테이블에 열 몇 권씩 쌓아놓고 읽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신간과 구간을 구분하지 않고 그저 이름대로 쭉 꽂힌 책들이다. 반값 정도에 파는데 이거 고르는 재미가 무척 쏠쏠하다.

 내 책도 가끔 보인다. 서운하지 않다. 꽂혀 있는 내 책을 뽑아 들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어느 장에서는 졸았을 테고 어느 장에서는 지루하다 못해 짜증이 났을 테고 또 어느 장에서는 웃었겠지. 그런 마음에 나는 순해지고 다정해진다. 동료 작가들의 책도 종종 본다. 내 책을 볼 때처럼 애틋하다.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은 새 책보다 이제 헌 책이 더 위로가 된다. 그래서 나는 어떤 책을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다시 사는 일이 잦다.

 김종광의 오래된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도 다시 샀고, 고은규의 [트렁커]도 다시 샀다. [경찰서여 안녕]은 선배에게 선물했고 [트렁커]는 누구에게 줄까 아직 생각 중이다. 하성란 선배의 소설도 눈에 보이는 족족 다 집었고, 노희준의 [오렌지 리퍼블릭]과 [킬러리스트]도 샀다.

 

 

 이건 노희준 선배에게 선물할 생각이다. 헌책방에서 집어온 자기 소설을 선물 받는 느낌도 괜찮을 것 같아서다. 일반 서점에서는 잘 고르지 않았던 에세이집들도 갈때마다 사들고 온다. 다섯 권이나 샀는데 이만 원이면 충분할 때가 있다. 책 냄새가 좋다고들 하지만 역시 손 냄새가 섞여야 더 낫다.

 며칠 전 중고서점에서 갔다가 이혜경 선생님의 [꽃그늘 아래]를 찾아냈다. 이혜경 선생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다.

 나는 [꽃그늘 아래]를 호주에 살 때 읽었다. 해외배송비를 물면서 주문했던 거였는데 돌아올 때는 챙길 수 없었다. 오버 차지를 물 형편이었던 거다. 예전 몰타 섬에 갔다가 현기영 선생님의 소설을 호텔에 두고 올 때도 그만큼 마음이 안 좋았다. 한국말도 모르는 호텔 직원들은 그 책을 버렸겠지. 아아, 지중해에 두고 온 한국소설이라니.

 어쨌거나 그렇게 두고 왔던 [꽃그늘 아래]를 발견하는 순간 바로 집었다. 그리고 책날개를 펼쳤는데, 낯익은 평론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이혜경 선생님의 서명.

 나는 문학 강연 때 만난 그 여자분처럼 막 기뻤다. 가슴이 콩닥콩닥. 이제 이혜경 선생님은 책이 나오면 내게 꼬박꼬박 보내 주시는 분이다. 책뿐 아니라 낯선 여행지에 도착하면 인형이나 오르골 등을 굳이 부쳐주실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 그분의 서명이 담긴 책이 아쉬워 헌책방에서 기뻐했던 건 아니다.

 

 

 나는 선생님의 추억 한 조각을 몰래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설렜던 거다. 사랑에 빠지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어느 시절을 막연히 질투하곤 하는데, 내가 궁금했던 그 시절을 훔쳐본 듯한 느낌.

 헌책방에 들락거리는 일은 아마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무척 마음에 든다.  (P.256~259 ) /  #3  저녁

 

 

 

                                            -김서령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에서

 

 

 

 

 

 

 

 

 

 

    산문집을 읽는 일은 내게, 어떤 태도를 취하더라도 몸과 마음이 불편할 때 마음이나마 조금

    말랑말랑 유연해져야 할 때 읽는다. 언젠가 한수철님 서재에서 이 책을 보고 냉큼 지른

    책을 어제 읽었다. 어제 일요일이 내게 바로 그런 날이었기 때문이다. 김서령 작가의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고 그후에 다른 작품들도 읽었는

    데 괜찮았던 신뢰감이 남았던지라 이 책도 산 듯하다.

    작가의 말처럼 다정하게, 뒤에서 등 한번 살짝 두들기고 안녕, 나야,하고 말을 걸었던 책.

    지나치게 달달하지도 감상적이지도 않은, 몰타섬과 거문도의 바다색같은, 함께 사는 흰 개

    '봉수'같이 쾌활한,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마련한 원룸을 관리하며 하도 이상한 세입자들이

    들끓어...제 날짜에 월세를 내며 오래 살아주는 세입자들이 고마워 명절이면 과일박스를 들여

    주는 마음 약한 엄마같은, 마음에 바람이 불어 오면 언제든지 공항으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예쁜 슈트케이스 같은, 해삼내장도 쪽쪽 잘 빨아 먹고 전복내장도 오물오물 잘 씹고 짠내가

    폴폴나는 생미더덕도 잘 삼키는 싱싱한 바닷비린내같은, 짙은 나무색 탁자와 붉은 조명등에

    눈이 알알하지만 오뎅탕과 염통구이로 소주 두 병 먹을 수 있는 '투다리'같은, 일 년 내내 해가

    부신, 겨울이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추울 일이 없어 후드 티셔츠 하나에 조리만 신고 네 녀석

    들을 먹이고 재워도 행복한 호주 브리즈번같은, 울고 있는 여자를 달래는 남자의 더없이 따뜻

    한 눈빛같은, 그리고 때로는 러시아의 바이칼 호수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속의 이야기

    같은...,<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 같다.

    풍랑주의보가 내렸어도 여전히 아름답기만 한 여수 밤바다,와 잘 말려 쪄낸 오독오독한 가오리

    의 맛처럼.

    그리고 여섯 컷,씩 책 중간중간에 네 쪽에 걸쳐 작가가 직접 펜화로 그린 각나라의 술병그림도

    공항 그림도, 사진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모저모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혜화동에 일이 종종 있어, 갈때마다 알라딘중고서점 대학로점에 들려 나도 이 책 저 책들을

    펼쳐보고 고르기도 하는데 책장을 펼쳐 누군가의 꼭꼭 눌러 쓴 단정한 서명이 적힌 책들을

    만날때면..왠지 쿵,하며 마치 내 책을 보는듯한 서운함이 자주 들곤 했는데 이 작가의 헌책방,에

    대한 글을 읽다보니 아 그렇구나 그렇기도 하겠다,하는 안심도 되고 정말 책 냄새도 좋지만

    손 냄새가 섞여 있는 책이 더 낫다,는 말에 따스한 공감도 만난다. 꼭 소장할 책들이 아니라면

    내가 즐겁게 읽고 나서 또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읽는 일도 무척 즐거운 일이리라.

    이 책도 즐겁게 잘 읽었으니, 며칠후 혜화동에 나가면 또 헌책방에 내 놓을 생각이다. ^^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3-08-26 14:35   좋아요 0 | URL
책은
받은 사람이 즐거운 대로 움직여요.
그러니 그 책이 헌책방으로 들어와
새로운 이야기 남기며
새로운 책손한테 찾아가지요~

appletreeje 2013-08-26 18:25   좋아요 0 | URL
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
그래서 저도 또 이 책이 어느 책손에게 가
즐거운 이야기 남겨 줄까...기대하지요~

2013-08-26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6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3-08-26 22:27   좋아요 0 | URL
처음에 저도 책에 책도장을 찍었는데, 도서관에 기증하고나니 쑥쓰러운거예요. 그후 책도장 치웠어요. ㅎㅎ 지금 그 도장 어디있는지 모르겠어요.

평소 올려주신 시와 글들 좋았는데, 오늘 글에는 알라딘 중고서점 이야기가 나오니 더 친근하고 좋아요. 새책이든 중고책이든 도서관 책이든 많이 많이 책을 읽어주면 좋겠어요.^^

2013-08-27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3-08-28 17:37   좋아요 0 | URL
원래 이용하던 도서관은 다른곳이었는데, 이사하면서 도서관이 개관되어 반가웠답니다. 그때 책기증을 받길래 기증했는데 ^^ 어린이 도서층에는 기증패도 있어요. ㅋㅋ

appletreeje 2013-08-28 18:12   좋아요 0 | URL
앙~~어린이 도서층에도 다음엔 가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