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손 크루소 같은 행색으로 들어오셨다. 삼복엔 타잔, 태풍엔 로빈손 크루소...니까 한겨울엔 고산자 김정호 같은 패션을 휘날리실 것인가. 아무튼 예의 그 로시난테 닮은 자전거에 기대어 비척비척 들어오셔서는 본당마루에 앉아 망연한 눈길로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다. 영락없는 로빈손 크루소였다. 도무지 여기가 어디쯤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 오랜만에 들어오셨네요. 어디 멀리 다녀오셨어요?

아저씨      아침은 자셨슈?

            네? 아, 네......아직요.

아저씨      그나마 다행이유. 난 유씨가 뜨건 밥 자시구 식은 소리 하나 싶어 걱정했슈.

            (또 시작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

아저씨      유 씨야말로 그새 어디 먼 데 다녀 오셨나 봐유. 태풍 왔다 간 것도 몰르구.

            걸 모를리가 있나요. 저도 며칠 전전긍긍했는데요.

아저씨      그런 냥반이 그런 소릴 해유? 태풍이 오는데 농사꾼이 가긴 어딜 가겠슈.

               갈 데가 어디 있겠냔 말유, 시방.

            아, 그럼 그동안.... .

아저씨      뽕밭에 가서 울었슈. 뽕밭에서 울었단 말유.

            (급 당황) 울어요? 뽕밭에서요?

아저씨      유 씨는 뽕밭의 세계를 몰러유. 진짜 몰러유.

            그, 그야 뭐 제가 뽕밭의 세계를 잘 알진 못하지만......아무튼 그 비바람이 몰아치

               는데 며칠 동안 집에도 안 오시고......정말 뽕밭에서..... .

아저씨      나야 한 이틀 못 들어와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지만, 뽕나무 잎사구들은 한 번 떨

               어지면 그걸로 끝장 아녀유. 그냥 생사가 갈리는 거 아녀유. 어디 잎사귀뿐이겠슈

                ? 뿌리까지 뽑혀져 나갈 판인데, 울어야지유. 껴안고 울어서 그 힘으로 뽕나무들

               이 살게 해야지유. 주인의 울음소리 듣구서 뽕나무들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

               남게 해야지유.

            (왠지 조낸 심오한 얘기 같은데 뭐라 할 말이 없다)

아저씨      그래서 나는 울었네유. 뽕밭에서 울었네유.

 

 

 

 

동화를 쓴다더니 숫제 트로트 가사를 쓰자는 거? 내가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 시인이란 걸 눈치채셨나. 아무튼 아저씨도 나도, 아저씨 울음소리 듣고 살아남은 뽕나무들도, 비바람에 쓸려가지 않은 로시난테 자전거도, 부추밭도, 지붕도, 채송화도, 우체국도, 철길도, 길고양이들도, 조낸 반갑다. 살아남았으니 되었다. 살아남았으니 그것으로 다 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오늘은 나도 죽도록 안 넘어오는 그녀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어나 볼까. 뽕나무 같은 그녀 손목을 붙잡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울어나 볼까. 아아, 내게 뽕나무 같은, 푸르른 뽕잎 같은 여자여.  (P.182~184 )

 

 

 

 

                                 -류근 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에서

 

 

 

 

 

 

 

 

 

 

 

   날씨는 겁나 더운데 할 일은 많은데, 그러면서도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

   음을'의 노랫말을 쓴... 류근 시인이 황막한 세상에 던지는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를

   며칠을 짬짬히 붙들고 읽었다.  

   염천의 개,처럼...여학교때 가사 시간에 올올이 수놓은 십자수처럼, 나팔꽃처럼 피어나는,

   숙취에 절어 술냄새가 책 밖으로까지 새어 나오는 습하고 뜨거운 시인의 산문을 읽는데

   왜 나는 또, 자꾸만 북풍한설 처럼 마음이 시리고 시린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의 아름다운 詩들이..새삼스레 아득하다,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볔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P.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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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8-14 11:56   좋아요 0 | URL
여름하늘도 높고 파랗습니다. 곧 구월이 오며 가을빛 감돌 테지요.

appletreeje 2013-08-14 19:11   좋아요 0 | URL
예~~함께살기님께서 보여 주시는
여름하늘은 정말, 높고 파랗습니다~
예, 곧 구월이 오고 아름다운 가을빛도 만나겠지요~?^^

비로그인 2013-08-15 09:43   좋아요 0 | URL
내키는대로(꼴리는대로) 어디서 막 굴러먹다 온 것처럼 굴다가 그러면서도 낯가람을 꽤나 할 것 같은 사람,은 도처에 많겠지만 류근도 어쩌면 그런 시인 중에 하나일 것 같네요.^^

appletreeje 2013-08-16 00:07   좋아요 0 | URL
예~잘은 모르겠지만 컨디션님의 예리한 시각이 포착하신 것처럼 저도
류근 시인은 아마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ㅎㅎ

컨디션님!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