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옥
갈고 갈아서 갸름한 곡선
맑고 맑아서 어리는 속살
금관은 아니지만
금관의 한 일부
저마다의 별들은
밤하늘 아니지만
밤하늘에 별들 있어
반짝이듯이
찬란함은 아니지만
찬란함의 한 일부
찬란함에 깃든
별들의 적요
영락에 스미는 무언의 환유
존재와 부재의 그 외로움
네 가슴에 어려오는
고요한 슬픔 (P.9 )
나무들의 양식
나무가 먹고 있는 밥을 보았다
몹시 조악한 악식(惡食)이었다
스산한 늦은 저녁이었다
메마른 바람이 불고 있었다
길 잃은 철새가
성긴 가지에 앉아 있었다
나무의 밥과 인간의 밥은
본래 하나
나무와 인간은
같은 밥을 먹지만
내 밥은 그에 비해 푸짐했었다
나무의 밥상에는 나무들뿐이었고
인간의 밥상에는 인간들뿐이었다 (P.11 )
눈 오는 밤
"별아!"
우제류의 밤이었다
어미 소가 말했다
낳은 지 열흘 된
새끼 송아지
젖 빠는 제 새끼
송아지에게 말했다
"별아, 네 이름은 별이란다
네가 태어나던 열흘 전 밤하늘
혹한의 밤하늘에 별이 어렸다
내 눈에도 별빛이 어려 있었다
쇠털 같은 세월이 흘러갔다
우리는 내일이면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돌아간단다
땅속 깊이 묻힌단다."
별은 땅속에 깊이 묻혔다
제 어미와 더불어 깊이 묻혔다
묻힌 자리에 이슬 내리고
묻힌 자리에 꽃이 피었다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거렸다
별과 꽃 들은 혈육이었다
영원한 영원한 혈육이었다 (P.102 )
-김명수 詩集, <곡옥>-에서
저마다의 찬란함을 간직한 ‘일부’들의 세계
조용히 응시하며, 호명받지 못한 존재들과 교감
미물에서 시작되는 경이로운 발견과 적요한 목격
보잘것없는 대상들과 손잡고 절제된 언어로 삶의 이면을 그려내는 시인 김명수(69)의 아홉번째 시집 『곡옥』(문학과지성 시인선 432)이 출간됐다. 시인은 보이는 번듯함에 가려 그늘진 곳에서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물들의 이름을 불러낸다. 표제작의 ‘곡옥’은 옥을 반달 모양으로 다듬어 끈에 꿴, 금관 등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장식물로, 금관 전체의 휘황찬란함에 비하면 하찮은 물건이다. 그러나 시인은 “금관의 한 일부” “찬란함의 한 일부”라며 곡옥이 본디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직관한다. 그리고 이 경이로운 발견 속에서 “별들의 적요”처럼 숭고한 묵언을 듣는다. 이는 시인이 전에 없던 세계와 조우하는 순간이며 존재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무한의 시공간을 열어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툭 떨어져버리는 과실에서 “가지와 바닥 사이”에 “머무는 평정”(「낙과」)을 읽고, “돌멩이 하나에”서 “향기”(「불행」)를 맡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