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신발
1
날이면 날마다
거리로 들로 강아지처럼 뛰쳐나가
드럽게 흙을 묻히고
재수 없게 똥도 밟아보고
비 오는 날엔 물웅덩이에도 풍덩 빠져보고
빙판에선 꽈당 미끄러져도 보고 싶은
오래된 신발 한 켤레.
24년째
흙 한톨 묻혀보지 못한 채
색깔은 바랬어도 길이 잘들고
거죽과 밑창이 말짱한 갈색 편상화를 신고
오늘도 휠체어를 타고 길을 나선다
발에 신겨 있다고 다 신발인가
제 발로 길을 걸어가야
제대로 된 신발 노릇 하는 게지
죽기전에 한번쯤은
뒤축으로 땅바닥을 질질 끌거나 못도 쾅쾅 박으며
지치도록 걷고 싶은 나의 신발,
마비된 사지(四脂)를 싣고
흰 구름처럼 둥둥
땅 위를 떠다니는 꿈이여!
2
오래전에 죽은
할아버지는 짚신을 버렸고
어머니는 흰 고무신을 버렸고
지난겨울
막내 동생도 현관에 구두 한 켤레 벗어놓고 영영 떠나버
렸다
나도 언젠가 너를 버려야 하리
대문 밖
허공 속으로 길게 난 발자국들이
저렇게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P.18 )
봄비
꽃이 피면 핀다고
좋아라, 깔깔거리며
꽃이 지면 진다고
슬프다, 눈물 지으며
피면 피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울고 웃는 사람 하나 있어
나는 그냥 좋더라
그런 사랑 하나 내 가슴에 살고 있어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더라 (P.26 )
불편한 이웃
배롱나무 속에서 쓰르라미가 운다
배롱나무 꽃은 매일 밤낮을 피고 지는데
자신의 박복한 운명을 탄식하는 듯
목을 놓아 쓰르라미가 운다
겨우 보름 남짓을 살면서
씹 한 번 하고 죽겠다고
피를 토하며 쓰르라미가 운다
그래야 자신이 인내한 시간이 의미가 있고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그 길이 곧 황홀한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쉼 없이 절규하는 쓰르라미
어쩌면
생(生)은 울다 가는 것이라고 넋두리하며
씨-입 씨-입 씨-입......
하루종일 각혈하는 쓰르라미 때문에
더욱더 얼굴 붉히며 피어나는
민망한 배롱나무 꽃,
배롱나무 꽃들 (P.100 )
-황원교 詩集, <오래된 신발>에서-
시인 황원교는 1959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했다. 강원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ROTC 21기 포병장교로로 임관, 전역을 했다.
1989년 3월, 모 생보사 인사부 대리로 근무하던 중 결혼 1주일을 앞두고 당한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영구장애를 입었다. 그 뒤 온갖 후유장애와 합병증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던 차에 1995년 5월, 7년간을 곁에서 수발해주시던 모친의 급작스러운 별세로 또 한 번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극심한 공황 상태를 극복하고자 입에다 마우스 스틱을 물고 컴퓨터 자판을 한 자 한 자씩 쳐가며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 199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과 2000년 계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1년 첫 시집 <빈집 지키기>와 2006년 두 번째 시집 <혼자있는 시간>을 출간했으며 현재는 충북 청주에 거주하며 '우리시 '동인으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