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가면 그녀는 다른 과일에 대해서는 까다롭지 않는데 복숭아는 무척 까다롭게 고집한다. 참외나 수박이나 자두는 과일가게 주인이 골라주는 대로 받아오는데 복숭아는 황도, 백도, 천도, 수밀도를 종류별로 이렇게 비교해보고 저렇게 비교해본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복숭아를 까다롭게 고른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그녀는 몰라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남편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20년 전 그녀의 집에 처음 인사 갔을 때 마당가에 커다란 복숭아 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나무에 주먹만 한 복숭아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보통 가정에서는 복숭아나무를 울 안에 잘 심지 않는데(복숭아나무가 귀신을 쫓아 조상의 혼령까지 집에 못 들어오게 해서), 그런 걸 가리지 않는 그녀의 아버지가 여름 과일 중 유독 복숭아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아예 마당가에 심은 나무라고 했다.

 그 복숭아는 그녀의 부모님이 살아계시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마다 여남은 개씩 아주 특별한 포장과 특별한 이동경로를 거쳐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남편의 입엔 다른 복숭아와 별 차이가 없는데 아내는 시장에 가면 그 복숭아와 빛깔도 맛도 비슷한 것을 찾아 이 복숭아 저 복숭아를 만진다.

 원래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과일은 어린 날 자기 집 마당가에서 내 손으로 따 먹던 과일이다. 그것은 어린 날의 꿈과 사랑과 추억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나무에 남다른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남보다 아름다운 시절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   (P.206~207 )

 

 

 

 

 

에필로그

나의 별친구에게

 

 

 

 예하님.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시나요? 햇수로 벌써 17년이나 지났습니다. 우리는 예하 님이 서른 무렵, 그리고 제가 서른아홉살 때, 아직 이 땅에 인터넷이 시작되기 전 PC통신에서 만났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하 님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대략 미루어 짐작하는 나이와 그것이 본명이 아닌게 분명한 예하라는 닉네임뿐입니다.

 돌아보면 그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별로 '하쿠타케'라는 이름의 혜성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혜성 소식을 듣던 날 저는 어떤 책의 서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북쪽 끝 스비스조드에 높이와 너비가 각각 1마일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인간의 시간으로 1,000년에 한 번씩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날카롭게 다듬고 가는데, 그렇게 해서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 영원의 하루가 지나간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사람은 참 작지요. 그렇지만 저는 우리 인간의 인연과 사랑도 저런 불멸의 시간과도 같은 우주의 한 질서로 파악하고 그런 운명과 인연과 사랑의 연속성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의욕만 그럴 뿐 그러나 저는 천문학이나 혜성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커녕 그것을 소설에 활용할 일반적 지식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예하 당신을 알았습니다. 제가 먼저 다가갔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 그때 이미 잊었습니다. 그 시절 PC통신이야말로 우주의 바다 같았습니다. 당신은 우주의 먼 별에 있는 친구와 교신하듯 몇 달 밤을 새워가며 PC통신으로 우주와 별과 천문에 관한 지식과 일화를 얘기해주었습니다. 제 소설 [은비령]에 쓰여 있는 별과 우주와 천문에 관한 짧은 지식들이 모두 그때 예하님께 듣고 배운 것입니다.

 그 작품으로 어떤 문학상을 받게 되었을 때 수상 소감에 예하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후에도 몇 번 더 그런 기회가 있었지만 당신은 비껴지나가는 혜성처럼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7년이 흘렀습니다.

 며칠 전 파란닷컴에 접속했다가 파란닷컴 서비스가 2012년 7월 31일 24시에 종료한다는 안내장을 보았습니다. 파란닷컴이 바로 우리가 만났던 PC통신 HITEL을 이어받은 것인데, 제가 예하 님을 만나 [은비령]에 도움을 받았던 것도 이제 PC통신 추억 저편으로 사라지는구나 싶은 묘한 기분 속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당신을 참 오래 생각했습니다.

 예하 님.

 강원도 인제군에 가면 이제는 소설 속의 지명이 아니라 실제 '은비령'이라는 마을도 있고 고갯길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가 예하 님의 도움을 받아서 쓴 소설 [은비령]이 나온 다음 소설 속의 고개 이름과 마을 이름이 그곳을 찾는 독자들과 마을 주민들에 의해 실제 지명으로 바뀐 것입니다.

 나는 이땅에서 내게 주어진 삶을 다하면 그곳 은비령으로 갑니다.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이미 말해두었습니다. 가서 묻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흰 뼛가루로 뿌려져 그곳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하루타케 혜성처럼 한번 떠난 다음 영원히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별을 기다릴 것 입니다.

 그리고 예하 님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게 언제일지 모르지만 내가 은비령으로 아주 떠난 다음 혹 설악을 찾거나 한계령을 찾는 길에 은비령을 지날 일 있으면 예전 PC통신 시절 우리가 별과 우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던 방제 그대로 '어느 별에서의 들꽃 통신'처럼 제 이름 한 번 불러주고 그 고개 은비령을 지나가길 바랍니다.

 예하 님이 부르면 제가 그곳의 나무로 바람으로 꽃으로 잎으로 손을 흔들어 나 여기 있다고, 여기서 당신을 기다렸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별이 쏟아지는 밤에 그 길을 지나며 제 이름을 부른다면 그때는 하늘에 흐르는 꼬리별처럼, 혹은 당신이 설명해주었던 살별처럼 소리 없는 빛으로 당신 가슴에 제가 있는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 예하 님, 당신은 늘 건강하셔요.   (P.272~275 )

 

 

 

 

                                            -이순원 한모금 소설, <소년이 별을 주울 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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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10 11:32   좋아요 0 | URL
모든 아이들이 태어날 때에
부모가 아이한테 나무 한 그루씩 심어서
오래오래 돌보며 아끼도록 해 주면
모든 아이들이
시인 되고 소설가 되며
삶 일구는 살림꾼 되겠지요

appletreeje 2013-06-10 18:31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게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나무 한 그루씩 심어 준다면..참 아름다운 삶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

2013-06-10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0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3-06-10 20:19   좋아요 0 | URL
나무늘보님께서 색을 입히신 ' 나무에 남다른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남보다 아름다운 시절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 ' 말에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이제 나무만 보면 나무늘보님 생각나요.^^

appletreeje 2013-06-10 20:59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나무에 매달려 사는, 나무늘보. ㅋ,

2013-06-10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0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1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1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