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부실하지만 그런 데로 헤아려주세요. 나는 부모님과 함께 영혼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이런 행사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건 지난 사십여 년 내 몸을 자주 찔러대던 기억, 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시지요? 이제 저도 천천히 마음이 편해지리라 믿습니다. 돌아가시고 난 후, 뼈와 뼈의 만남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무리 함께 있다 해도 뼛가루의 말과 오래 참아온 눈물이, 사무친 그리움이 어떻게 서로에게 전해질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굽어보시는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을 종신토록 사랑한다는 내 떨리는 목소리만은 꼭 한번 귀기울여 들어주세요.  (P.34 )  / - 어떤 날의 이사-,

 

 

 

 

 

 

하느님

나를 이유 없이 울게 하소서.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게 하시고

눈물 속에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죽어서는

그들의 눈물로 지내게 하소서.

 

 

-마종기, <기도>-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억울한 사고로 하루아침에 죽었다. 청천벽력이었다. 동생이 불쌍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 나는 많이 울었다.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동생의 장례식을 치르고, 산소를 만들었고, 다시 십 년이라는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그의 산소에 찾아가 죽은 자와 산 자의 기막힌 만남을 가졌다. 때로는 산소 주위에 피어난 꽃을 동생으로 착각하고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어느 때는 하늘 위의 뭉게구름, 저쪽 나무에 앉아 나를 보며 울어대는 새, 가끔은 내 주위를 자꾸 맴도는 잠자리와도 간절한 만남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십여 년 전 나는 오랜 타국의 의사생활에서 그가 묻혀 있는 도시에서 멀리 떠났다. 그래서 이제는 산소에 자주 가보지 못하고 꿈속에서만 가끔 만나고 있다. 어느 때는 책방에서 만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공항 로비에서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꿈속에서의 만남은 잠이 깨고 나면 너무 허무하다. 너무 허전해서 가슴이 아프기까지 하다. 그래서 요즘에는 새삼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을 읽으며 마음을 달랜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는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 나는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 같이 웃고 즐길 날이 올 것이라는 철석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만남은 헤어짐을 필연으로 할 수밖에 없듯이, 헤어짐은 만남을 전제하리라고 믿는다. 동생을 다시 만나게 되는 날, 그에게 무슨 말을 처음으로 꺼내야 좋을 지 가끔 생각해본다. 그런 생각을 할때는 나는 기쁘고 신이 나서 아무데서고 혼자 피식피식 웃기도 한다.  (P. 28~29 )/ -만남과 헤어짐의 사이에서-.

 

 

 

 

                                                                 -마종기 산문집, <우리 얼마나 함께>에서-

 

 

 

 

 

 

                                                과수원에서

 

 

 

                                  시끄럽고 뜨거운 한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 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맑게 씻어 주겠지.

                                    열매는 즐거움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은 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주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 되는구나.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나기를.  (P.64 )

 

 

 

                                                             - 마종기 詩集, <이슬의 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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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5-28 19:12   좋아요 0 | URL
아무리 멀리 떨어진 데에 있어도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듯,
하늘에 있고 땅에 있어도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겠지요.

appletreeje 2013-05-28 22:43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정말 그렇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의 부모님과 먼저 하늘로 이사를 간 사랑하는 사람들과도요.
오늘 장지에서 돌아오셨을 후애님과 아름다운 나라로 가신 아버님께서도
하늘에 있고 땅에 있어도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여전히 사랑 나누시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2013-05-28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종종 2013-05-28 21:4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종종 지나다 들러 좋은 시 읽고 갑니다.
좋은 시,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appletreeje 2013-05-28 22:47   좋아요 0 | URL
종종님, 종종...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좋은 시 읽고 가신다는 말씀에
제가 더 감사합니다.
종종님! 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요. *^^*

2013-05-28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9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림모노로그 2013-05-29 12:09   좋아요 0 | URL
가슴을 울리는 시들을 주로 쓰시는 군요 .
마종기님의 시집도 담아놓아야 겠습니다 ㅎㅎㅎ
요즘 좀처럼 들리지 못했는데 ㅎㅎ 여전히 좋은 시 한 가득입니다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는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 집에 불이 나 돌아가셨다는 사건이 보도되더군요.
바로 저희 동네 였답니다..
새삼스럽게 인생무상을 느끼네요 ...
마종기 님의 기도에 위로받고 갑니다 ^^
나무늘보님 좋은 하루 !!! ^^


appletreeje 2013-05-29 14:28   좋아요 0 | URL
예~드림님! 마종기님의 시들을 저도 참 좋아합니다.
1939년생이시니 연륜도 깊으시고 삶의 순간 순간들을
아름답고 사유 깊은 시들로, 잔잔하고 맑은 감동을 주시는 것 같아요.
아이구, 바로 드림님 동네의 할머님이 그렇게 돌아가셨다니
이래저래 드림님 마음이 더 안좋으셨겠어요...
기도,의 눈물은 슬픔도 내포되지만 기쁨이나 감동, 감사의 의미도 있지요.
드림님과 함께 눈물속에서 사람을 만나고 싶은 그런 날,
드림님! 평안하고 좋은 날 되세요.~!!! *^^*

후애(厚愛) 2013-06-02 11:32   좋아요 0 | URL
읽고싶은 책들이 더 불어났습니다.^^
모두 담아두고 나중에 기회가 오면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