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미사를 다녀와서 식구들과 오랫만에 돈까스를 해서 맛있게 먹고

이제 혼자, 서재방으로 와서 조용히 앉아 키스 자렛의 음반을 듣고 있다.

 어제는 해장으로 들었는데, 맑은 정신으로 다시 들어도 여전히 좋다.

 모든 것이 때가 있나 보다.

 전에 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슈투트가르트 쳄버 오케스트라의 음반으로

어릴때 처음 듣고선 그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움으로 전율하고, 그후에는 글렌 굴드의

굴드식,의 고요한 실내에 앉아 자신과의 수화(手話)를 나누는 듯한 그 지극히 개인적인

건반과 파격적인 바흐에 오랫동안 경도되었고, 그리고 빌헬름 캠프의 온화함에 또 다시

안도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파블로 카잘스의 '무반주 첼로조곡'을 여전히 중점으로 들었는데, 오늘은 다시 키스 자렛의 음반으로 격정없이도 충분한

위안과 평온을 만나는 밤이다.

 오늘 저녁미사는 가평에서 은수자로 사시는 신부님이 오셨는데, 낯설고 어눌한 어조에 처음엔 갑갑했지만 강론을 들으니, 수사없이 속뜻을 전하는 말의, 담백한 감동에 어느덧 빠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담담한 본질에 다가선 그런 느낌이다. 이 얼마나 오랜만의 낯선 재회,인가.

 그간 내가 얼마나 재바르고 현란한, 세상의 말과 말들의 유희속에 정신없이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번쩍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오늘의 주제는, 성소(聖召).  성소란 , 기독교적인 의미의 성소도 있지만 누구나의 삶에서도

'내가 이 세상에 온 뜻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깊고도 천천히 생각해 볼 그런 시간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뜻은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해보는 일요일의 늦은 밤,

 여전히 바흐의 음반은 아름답기 그지 없는.

 

 

 

 

 

 

                사마천司馬遷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앓았을 것이다

             천형天刑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 P.22 )

 

 

 

              정릉의 벚나무

 

 

 

              정릉 숲 속에

              벚나무가 있었다

 

              아이들이 나무를

              장대로 두들기고 있었다

 

              손주를 업고

              메뚜기처럼 뛰어갔다

 

              버찌 하나 주워

              보석같이 샘물에 씻었다

              새까맣게 익은 버찌

              등 뒤 손주에게 주었다

 

              맛있니? 원보야

              응

              그때

              하늘은 어찌 그리 넓었던지  (P.102 )

 

 

 

              지샌 밤

 

 

 

              토인비의 역사연구를 읽다가

              재봉틀 앞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묵은 유행가책 꺼내어

              노래를 불러 본다

 

              무한한 것은 저만큼 서 있었고

              생활은 내 곁에 어질러져 있었고

              장난기도 좀 부려보았는데

              갑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에

              웃었다

 

              창백한 형광등

              커피는 식어 있고

              원고지는 난무하고

              시각마다 시체가 되는 사물

              지겹게 울어대던 개구리

              밤새 울음도 멎고

              까치 소리에

              창문 밖 내다보았더니

              옥색 아침이 열려 있었다  (P.130 )

 

 

 

                                   -박경리 詩集, <우리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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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4-22 01:16   좋아요 0 | URL
오늘 문득 메뚜기를 보았어요.
메뚜기처럼 뛰어가시다니
참 놀라운 말빛이네요.

appletreeje 2013-04-22 02:14   좋아요 0 | URL
저는 아까 낮에 저 '정릉의 벚나무'를 읽다가
왠지 그냥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2013-04-22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2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13-04-22 10:11   좋아요 0 | URL
시도 지으신줄 오늘 처음 알았어요.
도서관에 있나 가봐야겠어요.

appletreeje 2013-04-22 11:08   좋아요 0 | URL
유고시집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도 좋아요.
박경리 선생님의 시를 읽고 있으면 그냥, 그 분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 해요.
진실되고 치열하게 사셨던 한 분의 모습 덕분에, 저같이 미소한 사람에게도 위안을 주시지요.

후애(厚愛) 2013-04-22 12:38   좋아요 0 | URL
저도 돈까스 좋아해요.>_<
시간나면 해 먹어야겠어요.ㅎㅎ
즐거운 한주 되시고 늘 행복하세요~*^^*

appletreeje 2013-04-22 19:28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해 먹었더니 맛났어요~^^
후애님께서도 돈까스 해서 드세요.~~
편안하고 좋은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