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하나
함께하는 것 이길 놈 없다네
그리움으로도
살구꽃 지는 날
숨 막히는 그리움으로도 (P.200 )
화엄
서로 비추노니
서로서로 비추노니
눈 시리어라
온 세상 어둠 끝 간 데 몰라 (P.185 )
친구
어이!
하고 부르니
여기는 구룡포
바다 건너 울릉도 도동
왜 그러나?
잠깐 건너오소
그러지 건너가겠네
파도 소리 큰 밤
구룡포 술집 하나 불빛이 밝다 (P.117 )
말 한마디
늦었다
내가 말하기 전
내 말을
이미 세상이 들었다
지렁이가 들었다
지렁이 울음소리 찌르르 (P.110 )
괜히
저 혼자 가는 길을
누가 가라 해서 간다고 하네
괜히 산골짜기 물 흐르는 것
누가 흘러라 해서
흐른다 하네
이 세상의 지혜 불쌍하여라 (P.88 )
먼 불빛
밤길 먼 불빛이 내 힘이었다
그것으로
그것으로
어제와 오늘 내일이여 (P.74 )
삼거리 주막
깨치다니
깨치면 기쁨
어디에 슬픔 있겠나
삼거리 주막
술 석 잔 먹고 내다보니
비오는 길 가로되 (P.53 )
-고은 선禪시집,< 뭐냐>-에서
고은 시인의 선시집. 이십여 년 전 빛을 봤던 시집이지만 이후 시인이 여기저기 발표하고 써두었던 선시들까지 두루 넣었으니 거의 새 시집과 진배없다. 알렌 긴즈버그는 "사고를 정지시키는 공안(公案)과도 같은 정신의 폭죽들" "깨뜨리기에는 단단한 견과, 하지만 동시에 비어 있는 듯하다"라고 고은의 선시를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