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강연호
냉장고에는 방이 많다
냉동실과 냉장실 사이
위칸과 아래 칸 사이
김치특선실과 신선야채실과 과일참맛실 사이
각얼음실과 해동실과 멀티수납실 사이
어디쯤의 층간 소음으로 막연하게
서로 눈 흘기는 아파트 같다
방이 많은 집은 춥다
밥 먹을 때만 각자 문을 열고 나와
수저는 입으로
눈은 TV로
묵묵 식사가 끝나면 다시 각자 방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문은 언제나 쾅 닫히는데
다들 냉골에 떤다
냉장고는 방이 많아도 가난하다
가난이란 마음만 아궁이 앞이라는 말이다
냉장고는 잠도 없다
온종일 끙끙 앓거나 웅웅 수런거린다
송곳니를 세운 얼음조각들이 달그락거린다
냉장고는 아무나 열지 못한다
코끼리가 가끔 드나들었다는 전설이
공룡 발자국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아주 늙은 냉장고만 들판에 큰대자로 드러누워
비로소 활짝 문을 열어젖히고
방이란 방은 죄다 트고
세상 모르고 잔다. (P.15 )
(창작과 비평, 겨울호)
)
봄은 물에서 먼저 온다
강희근
봄은 물에서 먼저 온다
겨우내 웅크리고 고체 덩어리로 얼어붙던 몸
얼다가 엎드리다가 쩡쩡 추위의 노예로
붙들려 살 던 몸
누가 와서 광복으로 풀어 주었나?
진주 근교,
작은 강이나 저수지 지나가면
물이 제 가진 본능의 진저리를 치며 푸른
암내를 내고 있다
꽃눈이나 나무들 움이 트기 전에
긴 둑 죽은 풀들 사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쑥풀처럼
물은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기지개보다 먼저
순빛깔 기지개 켜고 온다
노예는 노예였던 시절 말하지 않고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에
열중한다
지배와 핍박의 계절은 길고도 거칠었으나
노예는 백성처럼
작은 강, 작은 물길 이름으로
참빗 빗어내리며 출타를 준비한다
근교의 물은 거울처럼 조용하다
그러나, 신춘의 모꼬지보다 먼저 스물거리고
소소한 달력의 육필 메모보다 자그럽다. (P.18 )
(시와 시. 여름호)
민물
고영민
민물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약간 미지근한
물살이 세지 않은
입이 둥근 물고기가 모여 사는
어탕집 평상 위에
할머니 넷이 나앉아 소리나게 웃는다
어디에서 오는 걸까, 저 민물의 웃음은
꼬박 육칠십 년,
합치면 이백 년을 족히 넘게
이 강여울에 살았을 법한
강 건너 호두나무 숲이 바람에 일렁인다
긴 지느러미의
물풀처럼
어탕이 끓는 동안
깜박 잠이 든 세 살 딸애가
자면서 웃는다
오후의 볕이 기우는 사이,
어디를 갔다 오느냐
이제 막 민물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아가미의 아이야 (P.20 )
(시인동네, 겨울호)
바닷가 마을
곽재구
바닷가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
낮달이 도라지 꽃밭을 바라보고 있네
몸빼바지 입고 경운기 모는 젊은 아낙의 고향은 베트남 어디
머릿수건 풀어 이마의 땀 훔치며 아따 꽃 참 이쁘오!라고 남녘말로
말하네
고향에도 이 꽃 피오?물으니 붉은 얼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네
하늘엔 하얀 달
땅엔 보라 꽃
보라색과 하얀색의 원고지 사이로 난 작은 길을
키 작은 안남 여자가 경운기를 몰고 가네 (P.28 )
(시인세계, 여름호)
몸살
이명수
강정마을 근처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뒤집히는 바다를 본다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와 곁에 앉는다
할머니, 어디가 편찮으세요
전국적으로 다 아파
누구에게나 몸이 지구다
지구가 아프면 몸이 아프다
에디오피아가 아프다
탈북 난민이 아프다
후쿠시마가 아프다
강정마을, 구럼비가 아프다
전국에 강풍특보가 내려진다
으슬으슬 봄바람 먹은 내가 아프다
때를 아는 꽃몸살이다
그래, 아프지 않게 오는 봄날이 있더냐 (P.170 )
(시와 시, 가을호)
-< 2013 오늘의 좋은 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