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읽으면
시간을 읽으면
심장에 좋다고 생각한다
어두운 하늘에 없는 별들이 행간에 보인다
별들의 밝기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빛나
수평선을 넘는 데 필요한 나침반이 된다
시간을 읽으면
내가 도착할 역이 떠오른다
주위에는 향긋한 풀들이 침대처럼 펼쳐져 있고
흘러가는 강물이 보인다
팔락거리는 숲의 바람을 흠뻑 들이마셔
심장을 악화시키는 기운을 씻어내고
열차 바퀴를 힘차게 돌린다
첫사랑을 고백하듯이 시간을 돌리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들 듯
나의 심장은 밝아진다 (P.26 )
카키색에 대한 편견
한 백일장 심사에서 최종 두 편을 읽다가
나는 카키색 앞에서 멈추었다
한 편은 놀라운 표현력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 편은 밀도가 좀 떨어졌지만
카키색 작업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배가 들어올 때마다 짐 내리는 일을 차지하기 위해
개떼처럼 몰려드는 카키색 작업복들
카키색 바닷물이 일렁였고
카키색 오후가 흘렀고
카키색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나에게 카키색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순응이 아니라 체력으로
체면이 아니라 그을린 얼굴로 들어왔다
나는 카키색 잠바를 입기로 했다 (P.40 )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책(冊)이란 한자를 찾다 보니
부수로 경(冂)이 쓰이는 것을 알았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을 읍(邑)이라 했고
읍의 바깥 지역을 교(郊)라 했고
교의 바깥 지역을 야(野)라 했고
야의 바깥 지역을 림(林)이라 했고
림의 바깥 지역을 경(冂)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책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은
내 시야가 닿기 어려운 거리이다
나는 책을 읽어서는 세상을 볼 수 없다고 믿어왔는데
책의 경계선 안에
산도 강도 들도 짐승도
사람도 시장도 지천인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칸트는 평생 동안 백 리 밖을 나가지 않고
서재에서 보냈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서재와 같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벌써 백 리 밖을 벗어났고
들쑥날쑥 살아가고 있으므로
나는 책을 읽었다고 말하면 안 되겠다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책이 넚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보이는 데까지만 걸어가야겠다 (P.12 )
잘생겼지요?
돛이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마음이 툭 던지는 것이었다
그제야 눈썹이 보였다
먼 길을 항해하는구나
꿈을 달고 가는구나 (P.11 )
-맹문재 詩集, <사과를 내밀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