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허공에 매화가 왔다
그리고 산수유가 왔다
목련이 왔다
그것들은 어떤 표정도 없이
가만히 떠서
아래를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쭈욱 빼고 내려다보았다
그저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하다가
매화가 먼저 가고
목련이 가고
산수유가 갔다 (P.31 )
통증
중국에는 편지를 천천히 전해주는
느림보 우체국이 있다지요
보내는 사람이 편지 도착 날짜를 정할 수 있다지요
한달 혹은 일년 아니면
몇십년 뒤일 수도 있다지요
당신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냅니다
도착 날짜는 그저 먼 훗날
당신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길 원합니다
오랫동안 지켜보길 원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수십번 수백번의 후회가 나에게 왔다 가고
어느날 당신은
내가 쓴 편지 한 통을 받겠지요
겉봉을 뜯고 접은 편지지를 꺼내 펼쳐 읽겠지요
그때 나는 지워진 어깨 너머
당신 뒤에 노을처럼 서서 함께
편지를 읽겠습니다
편지가 걸어간 그 느린 걸음으로
내내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한 홉 한 홉
차올랐던 숨을 몰아 내쉬며 손을 내려놓을 즈음
편지 대신 그 앞에
내가 서 있겠습니다. (P.80 )
-고영민 詩集, <사슴공원에서>-
고영민의 詩를 처음 읽었던 것은 2005년의 첫 시집, '악어'의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가 인상적이었다. 첫 詩集의 시인의 한마디中, 운조루의 '타인능해(他人能解)'가 마음
에 들어왔는데 이제 세번째 詩集, '사슴공원에서'를 읽는다.
-구례 운조루에 들렀다. 구름 속, 새처럼 숨어 사는 집. 구경 삼아 곳간채에 들르니
통나무 속을 파내 만든 낡은 뒤주가 보인다. 아래쪽 구멍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
라는 글귀가 있어 뜻을 구한다. "다른 사람도 이 마개를 풀 수 있다."
연기가 오르지 않게 굴뚝을 낮췄다는 이 집의 속 깊은 옛 주인을 생각한다. 배고픈
백성들이 아무 때나 와서 쌀을 퍼가고 가을에 추수를 하면 다시 되돌려놓았던 마음
의 뒤주. 주인은 이 녘까지 쌀을 나누고 어느 농부의 갓 말린 볍씨를 소복이 품에
채우고 있다.
내내 나만 풀 수 있었던 뒤주, 밑바닥을 들킬까 봐 나 혼자 풀려고 했던 뒤주통을
천천히 끌고 오는 길, 내 몸 가만히 '他人能解'를 새긴다. 용기를 내어 낡은 뒤주같은
첫 시집을 냈다. 무섭고, 떨린다.-
일을 하는 중에 머리를 식히려 읽은 이 시집의 시들 덕분에, 기쁜 연휴를 보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