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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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핑거는 21년간 심리학을 연구했고 언어심리학과 인지심리학의 권위자라 칭해진다고 한다. 대중을 위해 펴낸 책들이 모두 베스트셀러라고 하는데,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겁 없이 9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다.

 

  자기주장들이 강한 두 아이를 키우면서 좌절감을 많이 느꼈었다. 여러 육아책의 도움을 받으며 키웠는데, 책에 나오는 이러저러한 교육 방법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적용시킬 수 없었고 책 속에 나와 있는 아이들처럼 행동하지도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비현실적인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육아 및 교육서였으니 당연하다.)

 

  현실적인 부모라면 오히려 시름을 덜 수 있다. 아이를 자극하고 사회화하고 아이의 성격을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대신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줄 때도 그것이 뉴런에 유익한 영향을 주기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에 마음이 넉넉해질 것이다.(696)

 

  내가 한창 아이들을 기르던 시절 육아 및 교육서에는 백지로 태어난 아이에게 환경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나와 있었고, 또 그런 내용들의 변형판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내가 가진 정보력, 경제력, 부지런함 등 마치 내 능력을 테스트 당한다 것같아 참 힘들었다. 더욱이 내가 더욱 좌절되었던 것은 아무리 노력하고 공들여도 아이들은 절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오지 않았고 자신들의 색깔을 표현하였다. 결국 나는 두손두발 들며 포기를 선언했고 아이들은 인간이지 로봇이 아니라고 합리화 했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계급사회의 신분의 세습에 이어 인종주의 및 비인간적인 차별을 거쳐 온 역사에서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는 것은 금기였다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을 인정해야 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것이 도덕적 정치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세세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두 기본 바탕은 빈 서판이었으며 이 책이 나온 1990년대도 환경론자들의 영향으로 여러 분야의 정책들이 왜곡되어 있었음을 반영하는 하는듯하다. 물론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을 인정한다고 하지만 일상에 적용하는 면에서는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의 기질과 성격은 생애 초기에 출연해서 일생동안 상당히 일관되게 유지된다. 그리고 성격과 지능 모두 어린이의 가정 환경으로부터 거의 또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한 가정에서 양육된 아이들이 비슷한 것은 대개 그들의 공통된 유전자 때문이다. 신경학에서는 뇌의 기본구조가 유전적 통제하에서 발달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학습과 가소성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뇌의 체계들은 선천적으로 분화한다는 증거뿐 아니라 임의적으로 서로의 기능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증거까지 보여준다. (188~189)

  전통적인 교육은 빈 서판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필요한 지식과 가치를 주입한다. 진보적인 교육은 대부분 고상한 야만인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환경을 제공해주기만 하면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무엇이든 배워 나갈 것이라 생각하지만 대부분 현실에서는 실패를 한다.

 

  아이들은 결코 빈 수용체나 보편적 학습자가 아니라 특정한 사고와 학습의 도구 상자를 갖추고 태어난 존재이며 설계 능력에서 벗어난 문제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도구들을 보강해야 한다. ... 교육의 내용은 대개 인지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정복하는 과정은 어렵고 따분하다. ... 공부라는 힘든 과업을 끈기있게 해 나가기 위해서는 학업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가족, 또래 집단, 또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393~394)

  내 개인적 관심이 영혼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특히 쏠렸는데 과학을 근거로 논리를 펼쳐나가는 저자답게 영혼이란 뇌의 정보처리 활동이고 뇌는 생물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신체 기관이라고 말한다.

 

  비물질적인 영혼이라는 도덕적으로 유용한 직관적 개념은 뇌 활동이 개체 발생에서든 개통 발생에서든 점진적으로 출현한다는 과학적 개념과 화해되지 않는다. (396)

 

  복제 인간은 다른 시대에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일뿐이며 동물의 권리를 반대하는 사람은 인종차별주의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영혼, 복제인간, 동물의 권리 등에 대해 겪는 딜레마는 영혼이나 개인에 대한 모 아니면 도식의 우리의 직관 심리와 인간의 뇌는 서서히 진화했고 서서히 발달하며 서서히 죽는다는 생물학적 사실 사이의 간극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개념을 정확히 설정해 놓아야 한다고 한다.

 

  기아에 몰린 사람들에게 유전적으로 조작된 옥수수와 콩이 든 음식을 주는 것과 개발도상국의 어린이들을 시각 장애에서 구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된 쌀을 공급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인지 묻는다. 이에 대해 유전자 조작 식품은 자연식품보다 위험하지 않으며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두려움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여러 민감한 사안들에대해 어떤 눈으로 바라보며 어떤 가치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마음에 관한 직관들도 인지 신경학의 첨단 분야와의 타협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있다. 의식과 의사 결정이 뇌 신경 네트워크의 전기 화학적 활동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어떻게 분자의 운동이 주관적 감정을 만들어 내고 어떻게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이끌어 내는가는 우리의 구식 정신에 심오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421)

 

  예술과 인문학에서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빈 서판에 기초하여 전개되었기에 몰락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인간이 본성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빈 서판?, 고상한 야만인? 혹은 기계 속의 유령? 이제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 환경의 영향이 더해진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인간에 대한 생각을 적용시켜 나가는 면에서의 혼란들을 제자리 잡아 나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를 둘러싼 정치 경제 정책들을 비롯하여 교육, 문화. 예술, 일상생활에서의 왜곡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과학적 근거에 따른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확한 개념을 정립해나가는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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