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없지만 가야 할 길 - 최준식 교수, 구루이기를 거부한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를 설하다
최준식 지음 / 하늬바람에영글다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저자는 인도의 성자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과 생애를 쓴 깨달음은 없다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연구자들의 필터를 거친 연구서가 없는 안타까운 한국의 현실을 비판하며 직접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이므로 그의 사상과 더불어 유지에 대해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소개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 학자로서 필터를 거쳐 유지에 대해 소개하겠다는 의도와는 다르게 저자는 스스로의 한계에 갇혀 깨달음은 없다에 나오는 내용을 거의 인용하는 것에 그치며 그것조차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생각의 잣대와 틀에 갇혀 있다. 유지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된다.

 

   “......이게 바로 유지가 말하는 자연 상태이다. 인도 전통에서는 이런 상태에 도달해야 인간의 진정한 능력 혹은 본능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계에 이르러야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구현하게 된다고 하니 우리의 현재 상태는 참담하게만 보인다......(199)

 

    드디어 저자의 생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데 유지는 깨달음의 상태가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했지만 그것이 인간의 능력을 구현한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깨달음의 상태는 진화의 끝이고,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유지를 소개한다고 하지만 유지에 대한 왜곡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이런 표현이 나온다.

“...... 유지는 계속해서 이 체험(깨달음)이 육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쿤달리니 에너지가 어떻게 해서 육적인 것이냐는 것이다. 에너지는 물질이 아니니 육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유지처럼 자꾸 육적인 것이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물질적인 것이라면 그 내분비선 폭발 사건이 눈으로 보여야 한다. 피가 나든지 물이 나오던지......” (199-200)

  여기서 저자의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더 이상 저자에게서 유지에 대한 이해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유지의 체험을 보고 그동안 영적 스승이라 칭해졌던 사람들의 깨달음의 수준을 가늠할 기준이 마련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선사들이 깨달음을 경험할 때 과연 그들도 차크라가 열리는 체험을 했는지 궁금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선사들도 유지처럼 몸에 에너지가 결집되면서 피부에 주름같은 돌출부가 생겨나서 움직이고......”(204)

 

   참 어이없다. 어이없음은 계속 이어진다.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쿤달리니 에너지가 폭발해야 하고 차크라가 열려야 하는데 왜 다른 종교 전통에서는 이 힘에 대한 언급이 없는가? 정말 이 방법 밖에 없단 말인가? 등등의 의문을 제기하는데 저자는 왜 이 책을 쓴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유지의 가르침은 초절정 수준에 있기 때문에 초보자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러 차레 언급하는데 이는 실로 유지에 대한 왜곡의 절정이라 여겨진다. 유지가 그토록 힘주어 강조한 것이 생각과 지식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영적 스승들이란 사람들이 말해온) 그런 깨달음이란 없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칭하는 깨달음이란 어떤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심지어 사기꾼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은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 비판서도 아니고, 유지를 최고의 영적 스승이라 지칭하며 유지의 가르침을 왜곡시키고 있다. 저자는 왜 책을 썼을까? 저자의 좀 더 깊이 있고 철저한 연구와 책임있는 집필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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