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과학은 당연히 어렵다(?). 일반 사람들에게 과학은 다가갈 수 없는 장벽으로 여겨진다. 일상 생활이 곧 과학이지만 사람들은 과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생각한다. 과학은 일반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괴물일까?  사실 일반 사람들은 그런 문제제기 조차 할 수 없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감히 객관적이라는 과학적 지식 앞에, 이해하기 어려운 수식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과학자가 그것도 노벨상까지 받은 과학자는 문제제기를 한다. 과학에 왜 인간이 빠져있을까? 과학에서 객관적 지식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정신의 여러 현상들은 과연 착각일까? 과학은 그것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생명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권의 책이 하나로 엮여있는 책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무척 유명한 반면 '정신과 물질'은 비교적 덜 알려진 책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생명을 양자 물리학과 연결시켜 소개하는 책으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몇몇 오류와 보편화되어버린 이론들이라고 한다. 물론 일반 독자로서는 이 책도 이해하는게 만만한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다.

  유명세를 떠나,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더 큰 울림과 의미가 있는 책은 '정신과 물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신과 물질'

 

1장 의식의 물리적 기초

  무엇인가 익혀서 능숙하고 신뢰할 수 있게 훈련되었다는 이야기는 의식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말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의식을 거치는 것이다. 뇌뿐 아니라 몸 전체의 발생은 '잘 기억된' 반복이다. 신경계는 우리 종의 생장점이며 의식은 살아있는 물질의 학습과 관련된다. 한 사람이 영위하는 삶의 하루하루는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 중인 우리 종의 진화의 작은 부분이다. 의식은 진화와 함께 있는 현상이며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의 유전은 부정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지만)개체들의 행동이 종의 진화 방향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주장한다.

 

2장 지식의 미래

  다윈 이론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들은 유기체가 진화 과정에서 수동적임을 강조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울 하고 비관적인 전망을 갖도록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돌연변이는 게놈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개체는 자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물질이나 자손에게 물려주는 유전물질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돌연변이들에 '자연의 적자 선택'이 작용한다. 다윈주의의 우울함에 비해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생각은 아름답고 용기를 주며 고무적이고 활기를 준다. 그러나 획득형질은 유전이 안되므로 지지할 수 없다.

  획득된 행동이나 그 행동으로 인한 신체적 변화가 자손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행동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모의 신체 변화가(직접적으로, 또는 자연선택에 의해) 부모의 행동 변화를 일으키고, 그 행동 변화가 모범을 보이거나 교육을 통해서 혹은 더 원초적인 방식으로, 게놈에 담긴 신체적 변화와 함께 자손에 전달된다. 행동이 진화를 일으키는 강력한 요인일 수 있다. 만일 유기체가 새로운 기관을 사용하여 자연선택을 돕지 않는다면, 자연선택은 새로운 기관을 '산출' 할 수 없을 것이다. 행동은 천성적인 능력과 환경에 순응하고 이들의 변화에 적응함으로써 그 자체로는 유전되지 않지만 진화 과정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3장 객관화 원리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연의 영역에서 인식의 주체를 배제한다. 우리 자신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 구경꾼의 입장으로 물러나고, 이 물러남에 의해 세계는 객관적인 세계가 된다.

나는 타인들의 의식이 객관적이며 내 주위의 실재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내 주위에 있는 실재 세계의 일부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계에서 배제하여 세계와 무관한 관찰자 역할로 물러나게 하는 비싼 대가를 치름으로써만 적당히 만족스러운 세계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하는 두가지 이율배반에 이르른다. 첫째는 우리의 세계상이 '무채색이며, 차갑고, 말이 없다.'는 발견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물질이 정신에, 혹은 반대로 정신이 물질에 작용하는 지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이율배반은 이 이율배반에 매몰되어 있는 현재 과학 수준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내게 단 한 번 주어진다. 존재하는 세계가 주어지고, 또 지각되는 세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관과 객관은 단지 하나다.

 

4장 산술적인 역설  :정신의 단일성

  감각하고 지각하고 생각하는 자아를 과학적 세계상 속의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이유는 자아 그 자체가 세계상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전체와 동일하고 따라서 전체 속에 한 부분으로 들어 있을 수 없다. 정신의 다수성은 다만 현상일 뿐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 정신뿐이다. 정신은 본성적으로 '단수'이다. 항상 현재에 있기 때문에 파괴될 수 없다. 정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과학적 연구들이 전체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철저히 침묵한다는 사실이다.

 

5장 과학과 종교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난감한 질문들을 정복하는데 과학이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바는 시간의 점진적인 관념화라고 생각한다. 플라톤 칸트에 이어 아인슈타인은 공간-시간의 새로운 개념을 알게 해주었다. '잠재적 동시성'의 개념이 등장했고 '먼저와 나중'의 규칙으로부터 해방되었다.

 

6장 감각의 신비

  주변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은 모두 직접적인 지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도, 다른 한편으로 그 지식은 감각지각과 외부세계 사이의 관계를 밝혀내지 못한다. 과학적 발견들의 도움을 받아 구성한 외부세계의 상, 혹은 모형 속에는 감각이 전혀 부재한다. 빛 파동에 대한 물리학자의 객관적 이론은 색 감각을 설명할 수 없다. 과학 논문이나 교과서의 저자들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사실을 이론화 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론화 과정은 실제 관찰과 그로부터 나온 이론 사이의 구분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관찰은 감각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이론이 감각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론은 감각을 설명하지 않는다.

 

  현재, 과학은 모든 것을 물질로 설명한다. 심지어 정신 작용까지도. 또한 그에 대한 반론은 한치도 허용하지 않는다. 늘 이런 과학 이론들에 답답한 갈증을 느끼지만  내 지식의 짧음으로 치부하고 느껴지는 문제점을 애써 외면하곤 하였다.

   과학의 객관화라는 미명하에 인간이 소외되는 현재의 과학을  비판하는 이 책은 시원한 물과도 같았다.  더구나  저자가 에르빈 슈뢰딩거라는 사실에 행복하기 까지 했다. 그렇지만 몇 십년 전에 씌어진 책인데 이 과학자의 주장이 현실 과학계에선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논의 조차 변변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조금은 우울 해졌다.

   어쩌면 '정신과 물질'이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많이 읽혀지는 날,  인간을 위한 과학이 새롭게 창조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의 중심이 사람은 아니겠지만  과학을 하는 주체인 인간의 정신과 감각이 배제된 과학은 객관적이라는 말로도 온전하다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과학은 한단계 올라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십년전 슈뢰딩거는 이미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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