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를 찾아서 - 인간의 기억에 대한 모든 것
윌바 외스트뷔.힐데 외스트뷔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그동안 미국, 일본, 서유럽 위주의 책들을 주로 읽었었는데 노르웨이 작가의 책을 대하고 보니 좀 더 다양한 세계와 소통하며 생각의 폭을 넓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름이나 인용하는 지명 글의 내용 등이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1장 바다의 괴물 - 해마의 발견
2장 해마를 찾아 2월에 잠수하기 - 기억은 뇌 어디에 있을까?
3장 스카이다이버가 마지막에 하는 생각 -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트라우마에 대하여
4장 박새를 밀친 뻐꾸기 새끼 - 허위 기억은 어떻게 우리 머릿속에 들어오는가?
5장  대규모 택시 실험과 아주 특별한 체스 게임 - 기억은 얼마만큼 좋아질 수 있을까?
6장 코끼리 무덤 - 망각에 대한 진실
7장 스발바르 제도의 씨앗들 - 기억의 일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

  
   신경과학자이며 기억 연구 전문가인 윌바 외스트뷔와 노르웨이 개념사 연구가이자 작가인 힐데 외스트뷔, 두 명의 저자가 함께 쓴 책인데 각자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독특한 전개를 하고 있다. 책을 읽기 시작해서 3장까지는 몰입이 잘되지 않았다. 너무 다양한 예를 끌어들이고 빙빙 돌며 서술하는 방식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지루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4장부터는 군더더기 없는 글과 다양한 사례들도 함께 나와 있어 단숨에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해마가 기억에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최근(1950년 대 이후)에 알려진 사실이라고 한다. 뇌전증을 앓던 헨리 몰레이슨의 담당 의사는 치료의 일환으로 양쪽의 해마를 떼어내는 수술을 실행했다. 그 후 헨리는 수술 3년 전의 일부터 기억을 못 하게 되었고 수술 후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뇌 연구 분야에서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요즘과는 달리 많은 과목과 내용을 배우고 주입식 암기 교육이 공공연하게 시행되었던 중 고등학교 시절, 나는  암기를 잘 못해서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 중에는 다양한 기억법으로 첫 글자를 딴다던가 이야기를 만든다던가 하는 비법? 을 쓰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것 자체가 더 어렵게 느껴졌었다. 차라리 그냥 외우고 말지 하는 생각으로 기억하고 잊어버리기를 반복했었던 것 같다. 

    영국의 복잡한 길의 지도를 암기해야만 하는 영국의 택시 기사들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크지만 택시 기사가 되기 위해 도로를 익히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해마의 모양이 미세하지만 변형이 일어난다고 한다. 아마 내가 학생이었던 시절 암기로 밤을 지새우던 학생들의 해마를 관찰했다면 분명 변형이 일어나 있었을 거다.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기억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부정적 감정들이 해마의 기억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PTSD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의 트라우마 기억은 일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르며, 트라우마의 기억이 기억 공간을 다 차지하기 때문에 일상생활도 하기 힘든 거라고 한다. 두려운 기억을 회피하고자 할수록 학습이 일어나 회피하고자 하는 기억은 점점 더 강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광주 학살, 삼풍 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세월호 사건, 그리고 얼마 전 헝가리 유람선의 전복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PTSD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노르웨이에서도 2011년 우퇴위아에서의 학살로 많은 청년들이 죽음을 당해 생존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외적인 세부 내용을 더 많이 기억하고 내적인 생각이나 해석은 더 적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계속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기억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후에 트라우마 기억에 덜 시달리지만 주위의 세부에 온통 마음을 쓰는 사람들은 후에 트라우마 기억에 더 많이 시달린다고 한다. 세월호에서 잠수사들이 PTSD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요즘 우리나라는 일반인의 상식적 정서와 동떨어진 판사의 형량 판결에 가슴을 치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증인들의 증언을 근거로 판결을 내리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도 강요된 자백으로 판결을 내렸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DNA 조사 결과(무죄 프로젝트가 있었다고 함.)로 다시 풀려나게 되었는데 사건의 4분의 3에서는 증인이 틀린 사람을 지목하여 그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었다고 한다. 

   악의적인 증인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기억력은 원래 생물적이고 유기적이며 이미지를 살아나게 하도록 작동한다고 한다. 새로운 요소들이 들어오면 원래의 기억과 하나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엮어 들어가게 되는데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억은 구성적이며 기억 안에는 언제나 오류와 결함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억 중 많은 부분은 재구성된 허위 기억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던 판사들이 최근에는 피해자의 중언만을 가지고 판결을 한다고 다시 비난을 받고 있다. 피해자의 증언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이 책에 의하면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경우 상당수는 실제로는 당하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어릴 때 당한 폭행을 성인이 되어서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상상에 의한 재구성된 기억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판사들은 판결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성인기 내내 대뇌 피질은 해마다 아주 조금씩 줄어들지만, 노년기가 되면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흰색 물질도 점점 사라지고, 이와 함께 뇌 안의 빈 공간은 더 커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이 전부다. 학습이 좀 느려지고 이름이 생각 안 나는 등의 흔한 형태의 망각은 우리를 점점 더 자주 괴롭힌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져도 그때까지 평생 모은 지혜는 앗아가지 못한다. 모든 지식과 인생 경험들은, 비록 이들이 자리 잡는 데 점차로 시간이 더 많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커다란 지식 저장고가 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몰락이 아니라 변화다. 
  
  할머니는 늘 당신의 어릴 적 같은 이야기만 하셨다. 엄마도 나이가 들면서 할머니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나도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당신들과 같은 모습을 향해 가고 있다. 나이가 들면 해마가 가장 먼저 손상되고 새로운 기억으로 저장이 힘들어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자세히 하지만 지난주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의 기억 중 어느 것이 사실이고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망각은 우리가 함께 끼고 살아가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실재이며, 기억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잊게 되지만 가장 기억하고 싶은 중요한 일들을 우리 기억 속에 남도록 조각하는 것 또한 망각의 일이다. 

  기억을 이야기하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특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미래에 대한 생각이 기억 체계에 포함된 이유는 진화적 이점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미래를 보기 시작하면서 기억이 생겨났고 과거는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 

    스발바르의 씨앗 저장고는 막연한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상상을 이제는 기억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고 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꿈을 꾸는 존재이고 꿈의 뿌리는 기억이며 기억은 환상의 재료라고 한다. 상상하던 것이 현실로 되고 있음을 목격하는 만큼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깨끗한 지구 환경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아름다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미래를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억은 대뇌 피질 여러 곳에 저장되어 있지만 서로 다른 경험들을 저장하고 온전한 기억으로 종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우리 자신을 한 인간으로 만드는 모든 경험과 장소와 감정을 연결하는 곳은 바로 해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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