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무슨 일은 아니고요. 저번에 횡계 슈퍼에 갔는데 지갑을 두고 와서 돈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그 조카분이 지나가시다가 대신 계산해 주셨어요.


서윤은 미리 준비해 온 말을 차분히 꺼내놓았다.


-액수가 꽤 되는 모양이요,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걸 보면.

-삼만 원쯤이요.

-에이, 그 정도면 그냥 넘어가도 되지. 이웃끼리야 뭐, 도울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빌린 건 갚아야죠.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몰라서요.

-준이? 준이는 지금 서울에 없는데. 얼마 전엔 또 외국 나간다고 하더니…

-외국이요?

-어디라 했더라, 가물가물하네.

-언,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그걸 어찌 아나. 원체 떠도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

-혹시 조카분 전화번호는 모르시나요? 휴대폰이 있는 것 같던데요.

-휴대폰? 나야 모르지. 몇 해 연락 없다가도, 서울 오면 꼭 인사하러 들르긴 한다오. 다음에 만나면, 윗집 최 여사 손녀가 다녀갔다고 꼭 전해주리다.


잠시 숨을 고른 할아버지가 천천히 질문을 덧붙였다.


-근데 아가씨 성함이…?

-나서윤입니다.

-나서윤… 그 이름, 참 곱소. 최순내 여사가 살아 계셨더라면, 아가씨를 참 귀여워하셨을 텐데.

-고맙습니다.

-내 고향도 충청도 전의요. 최순내 여사와 나는 같은 마을 사람이었지.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오. 그분 손녀이니, 내 이리 반갑지 않겠소.


그 말에 그녀의 눈빛이 잔 파문을 그리며 일렁였다. 뜻밖에 거론된 외딴 지명 하나가, 아득한 풍경처럼 마음속에 번져왔다.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이 어떻게 이 산골까지 흘러와 긴 세월 이웃으로 지냈는지,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 인연이 어쩌다 횡계까지 이어졌는지를 묻자, 그는 한참 말없이 있다가, ‘전쟁통에 별일 다 있었지.’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최 여사 손녀를 여기서 보다니… 내가 손 좀 잡아 봐도 되겠소? 너무 좋아서 그냥…


김 씨 할아버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서윤은 그 손을 조용히 감쌌다. 그의 손은 종잇장처럼 가늘고 부드러웠으며,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면서도 축축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도준과의 인연이 김 씨 할아버지와 큰할머니, 그 오래전 두 사람까지 거슬러 닿아 있다고 생각하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을 지긋이 누르는 것 같았다.


-내 저세상 가면, 최 여사께 꼭 전하리다. 당신 손녀가… 다녀갔다고.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작게 흔들었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이별이 찾아오는 법. 그녀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작별을 마음에 새긴 채 느린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누군가의 모습처럼, 무언가를 두고 온 듯한 허전함이 발끝에 걸렸다.


이 세상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도준을 떠올렸다. 우리는 정말 다시 만날 수 없는 걸까. 횡계 숲길에서 마지막으로 엇갈린 채 멀어져간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미 지나온 막다른 골목. 잊히지 않는 추억의 뒤안길에는 공허한 상실감이 어른거렸다. 기억의 어두운 심연 속에서 나뭇잎 한 장이 바람결에 또르르 굴러갔다. 이제 그에 대한 아쉬움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할 시간일지도 몰랐다.

 

병실 문을 막 나서던 서윤은 바로 앞 복도에서 중년 여인과 마주쳤다. 보호자로 보이는 그녀는 매점에서 막 돌아온 듯, 간병 용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버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아, 네. 횡계에서 할아버지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아, 횡계 분이시군요.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빨리 회복되셨으면 좋겠어요.


서윤은 예의 바르게 응대하며,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여인은 따뜻한 눈길을 건넸다.


-그냥 가시면 섭섭하죠. 제가 왔으니, 잠깐 음료수라도 드시고 가세요. 전 이 집 큰며느리예요.


혹시 이분이라면 도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약이 있어서요… 안녕히 계세요.


쓸쓸한 감정의 잔향을 뒤로한 채 천천히 병원 층계를 내려오는 동안, 우울한 표정으로 공항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까지 출발을 망설이며 내 전화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전화번호를 쓰레기통에 버렸던 그날의 실책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용기를 냈더라면. 그 어리석고 가혹했던 처사가 가슴 한복판을 저미듯 아프게 다가왔다.

 

병원 1층 현관문 앞,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삶이라는 미로 안에서 누구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각자의 길을 따라 빙빙 맴도는 움직임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링거 거치대에 의지해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환자들, 급한 걸음으로 분주하게 드나드는 방문객들, 능숙한 손끝으로 의료 장비를 다루며 이동하는 병원 직원들, 휠체어를 밀고 조심스레 지나가는 간병인들, 그리고 보조대를 짚고 작은 발걸음을 떼는 노인들.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 그 사이 어딘가에 기적처럼 맺었던 인연조차 이토록 쉽게 엇갈려 버릴 수 있다는 걸까. 그렇다면 도준도, 한때 스쳐 간 허무한 그림자처럼, 영영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사라진 걸까. 오직 함께였기에 가슴 깊이 스며들었던 행복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꿈이 되어 이제 멀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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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강남성심병원 입구에는 주차 대기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병원 건물들 사이로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과 방문객들, 바삐 움직이는 주차 요원들이 뒤섞여 혼잡을 더했다.


서윤은 오전 근무만 마친 뒤 반차를 내고 이곳을 찾았다. 김 씨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마음 한편이 설렜지만, 금기의 선을 넘고 있다는 자각에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며 주변의 시선까지 의식되었다. 여기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현실적인 어려움과 스스로 쌓아 올린 심리적 장벽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했다. 김 씨 할아버지를 통해 도준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어딘가 너무 순진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도준의 고모부라면 조카의 연락처쯤은 당연히 알고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에게 도준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부탁할 만한 뚜렷한 명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큰할머니 사후에 일부러 자청해서 별장 관리를 맡은 분이긴 했지만, 그것과 도준의 개인 정보는 별개의 사안이었다. 괜한 일로 불쑥 전화를 건다는 건 무모해 보였고, 자칫 불필요한 오해와 의심을 살 가능성도 컸다.


그럼에도, 김 씨 할아버지를 거치지 않고는 도준과 닿을 길이 없었다. 며칠을 망설이다 횡계 주민센터를 통해 관리인 아들의 번호를 어렵사리 얻어냈다. 도준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함이, 끝내 이성적 판단을 눌러버린 것이다. 몇 차례 전화를 걸고 기다린 끝에, 마침내 김 씨 할아버지 큰아들 김계주와 연결됐다. 다행히 그는 십여 년 전까지 윗집에 혼자 살던 큰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하신 겁니까?


아들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서윤은 침착한 어조로, 이미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던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횡계에 갔다가, 할아버지께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건강은 좀 어떠신지 궁금해서요. 저희 부모님께서 안부 전화를 드리라고 하셔서요. 그동안 저희 빈집 관리로 신세를 많이 졌거든요.

-아아, 그렇군요. 이렇게 염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들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서윤은 김 씨 할아버지와 직접 통화하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내비쳤다. 아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얼마 전 낙상 사고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서윤은 병원과 입원실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오늘 작은 화분 하나를 손에 들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이제 김 씨 할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도준 이야기를 꺼낼지가 남은 숙제였다.


그녀는 곧장 병원 정문과 가장 가까운 본관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3층 입원실에는 네 병상 가운데 두 곳에만 환자가 누워 있었다. 그곳은 무심한 기계의 숨결과 인간의 연약함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냉랭한 기운 속에 병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맴돌고,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이 벽에 길고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윤은 두 침대의 이름표를 살핀 뒤, 창가 쪽 노인에게 다가갔다.


‘김재구, 77세.’


김 씨 할아버지는 그녀가 기억하던 예전 모습과 너무 달랐다. 뙤약볕 아래 거칠어진 촌부의 얼굴에는 세월의 깊은 골이 새겨져 있었고, 왼손등에는 가늘고 투명한 링거 튜브가 생명줄처럼 매달려 있었다. 고된 농사일도 단번에 척척 해치우던 손은 이제 앙상하니 쪼글쪼글해졌고, 푸르스름하게 멍든 바늘자국만 가득했다. 주변 어디에도 간병인이나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서윤은 화분을 든 채,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침대 발치에 어정쩡히 서 있었다.


그때 고요하던 실내 공기를 휘저으며 간호사가 의료용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큰 목소리로 김 씨 할아버지 이름을 부르더니, 혈압과 혈당을 재겠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할아버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달싹거렸다.


간호사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태도로 생년월일을 불러주며, 정보가 정확한지 재차 확인했다. 할아버지는 낮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맞아요.’ 하고 대답했다. 간호사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렇지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링거 챔버를 톡톡 쳐 약물 흐름을 확인한 뒤, 혈압과 혈당 수치를 재고 병원 차트에 기록했다. 서윤을 가족으로 생각했는지, 간호사는 현재 환자 상태를 자세히 설명했다.


-혈압은 괜찮지만 오늘 아침부터 당수치가 좀 높으세요. 담당 선생님께 제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저녁부터는 식단도 약간 조정될 수 있을지 몰라요.

-고맙습니다.


예기치 않게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된 서윤은 보조 테이블에 화분을 내려놓고, 고개까지 숙여 간호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 모든 절차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간호사가 가고 나자, 할아버지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근데… 누구신지?


서윤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그녀가 윗집 큰할머니의 손녀라는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진짜요? 정말 김순내 여사의 손녀라구요?

-네, 맞아요. 어려서 할머니 댁에 여러 번 놀러 갔었어요. 그때 할아버지를 뵌 적도 있고, 감도 따 주셨고요.

-맞아, 기억이 나는구먼. 어이쿠, 이렇게 훌쩍 컸구려.

-뭘요. 어느새 늙어 가는걸요.

-무슨 소리. 아직도 살아갈 날이 구만리 같은 아가씨가. 허허.


웃음 속에 스며든 미묘한 떨림, 신기하다는 듯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엔 애틋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김순내 여사 손녀라서 그런지 어째 그쪽이 내겐 남 같지 않아요. 접때 우리 집에 비타민 선물도 가져왔다면서요? 내 조카가 들고 와서, 잘 받았소.

-별거 아닌걸요. 저희 부모님께서 할아버지 빨리 쾌차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어요.

-고맙다고 전해주시오.

-그런데 그 조카분 말인데요.

-준이요? 도준이가 왜?


할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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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내가 왜 이런 말을 한 거야.’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차라리 울어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해질까. 하지만 눈물 대신 가슴 속 허무만이 더욱 깊어졌다. 아버지는 그제야 별 뜻 없이 맞장구친 말이 서윤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깨닫고, 이번에는 큰 목소리로 오빠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야, 이놈아. 사업한다고 그렇게 설치더니 내 퇴직금까지 절반이나 말아먹고, 이제 와서 어디에 또 숟가락을 얹겠다는 거냐? 정신 나간 놈 같으니라고!

-아, 좀… 그래서 서로 돕고 살자는 얘기잖아요!


오빠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자, 안방 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아니, 이 밤중에 왜들 이래? 그리고 철재, 넌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나타나서 또 집안을 시끄럽게 만드는 거야? 응?


엄마는 눈을 부라리며 오빠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쳤다.

 

-아, 죄송해요! 근데 엄마 손은 왜 이렇게 매운 거야?


오빠는 과장스레 아픈 시늉을 하다가, 흠, 흠, 짧게 헛기침을 하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참, 아버지는 내년에 정년 퇴임하면 정말로 횡계에 가서 사실 생각이세요?


2층 층계로 향하던 서윤은 ‘횡계’라는 말에 더는 발을 떼지 못했다. 공중전화 숫자판을 하나씩 눌러가던 자신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차마 꺼내지도 못했고, 끝내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던 말들. 그 순간의 침묵이 되살아나듯, 목이 뜨겁게 메었다.


-나한테 횡계는 고향 같은 곳이야.

-그렇죠. 고향이나 진배없죠. 큰할머니 산소도 거기 있잖아요.


오빠가 공손히 두 손으로 아버지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문제는 네 엄마야. 엄마는 서울 생활이 좋단다.


아버지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슬쩍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서윤은 한 손으로 벽을 더듬듯 짚으며, 등을 대고 천천히 앉았다. 제이 앞에서조차 입에 올리지 못했던 그 이름을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떨궜다.


-당신이 가면, 나는 뭐 별 수 있나… 근데, 나이 들어서 횡계에 가서 뭘 하려고요? 여긴 병원도 가깝고, 교통도 편리하고, 교회 친구들도 다 여기 있는데…


엄마는 겉으로는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는 듯 말했지만, 불편한 시골 생활을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참에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가 횡계로 가더라도 자신은 서울에 남을 수 있다는 뜻을 에둘러 밝혀두려는 눈치였다.


그때 올케가 서윤에게 따뜻한 인삼차 한 잔을 가져다주고는 옆에 앉았다.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지요. 별장도 계속 비워두면 안 좋아요. 그냥 방치하느니, 이참에 아예 팔아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김 씨 할아버지도 안 계시는데, 지난번처럼 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해요?

-그동안 김 씨 할아버지께 신세를 너무 많이 진 것 같아요. 거의 공짜로 관리 다 해주셨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김 씨 할아버지, 건강은 어떠시니? 연락은 해 봤어?


아버지가 잔을 내려놓으며 서윤을 바라보았다.


-수술 받으시고 지금은 서울 큰아들 댁에 계신다는데, 제가 연락처를 알 방도가 있어야죠.


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집 큰아들 전화번호를 어디 적어뒀을 텐데… 생각이 나질 않네.


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동네에 비상 연락망 같은 게 있다고 들었어요. 이장님께 전화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올케의 말에 서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건 마을의 독거노인들을 위한 비상 연락망이었지만, 서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김 씨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알게 된다면, 어쩌면 그걸 통해 도준과 다시 연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하지만 간절한 희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꾸물거렸다.


‘그에게 전화를 걸자.’


실제로 전화를 걸기까지 몇 번이나 망설이며 스스로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와 통화가 되는 순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빠는 여전히 태일과의 결혼 날짜를 잡으라며 재촉했지만, 서윤의 머릿속은 온통 도준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로 들끓었다.


‘다시 연락하면, 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생각만으로도 열에 들뜬 듯 가슴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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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지하철역에서 집까지는 10분 거리였다. 하루의 끝자락에, 인적 드문 어두운 길을 지나 초등학교 앞 차도를 건넌 뒤, 옥수탕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연립주택과 단독 주택이 늘어선 골목에 희미한 가로등 불빛 하나가 조는 듯 서 있었다. 어느 집 담장 아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뒤적이다가 그녀의 발소리에 놀라 급히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열쇠로 대문을 열고 집 마당에 들어서자, 거실의 흐린 유리창 너머로 올케가 분주히 오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평소 같으면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인데, 오늘따라 집 안에는 어수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윤이 거실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이미 술에 얼큰히 취해 있었고, 오빠는 벌겋게 달아오른 낯빛으로 무언가 열변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오빠가 부모님 집에 다시 나타난 건 거의 두 달 만이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사라진 뒤,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새 얼굴은 꺼칠하니 겉늙은 듯 보였고, 광대뼈가 도드라질 만큼 두 볼은 홀쭉했다.


-아가씨, 이제 오세요? 저녁은요?


올케가 두툼하게 부친 녹두전 한 접시를 밥상에 올려놓으며 짧게 눈길을 던졌다. 평온한 말투와 달리, 축 처진 어깨에는 온종일 가사 일에 시달린 피로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벌써 먹었겠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오빠는 손바닥으로 술잔을 굴리며, 서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경계하듯 탐색하는 태도에서 특유의 허세가 느껴졌다. 실내에는 기름내와 꽁치구이 냄새가 가득했지만, 그런 온기만으로는 가족 사이의 냉랭함을 덜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머니는 안방에 계세요. 오늘도 하루 종일 선호랑 씨름하시느라 많이 고단하신가 봐요.


올케가 담담하게 말했다. 선호는 두 살배기, 오빠의 아들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내일 출근할 사람이 이렇게 늦게 다니면 어떻게 해. 데이트하다가 온 거야?


오빠는 무심한 척했으나, 속내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의 힐끔거리는 눈빛에는 신우건설에 대한 기대와 미련이 담겨 있었다. 혼맥이라는 가느다란 연줄에 매달려 그 집안에서 흘러나올 작은 콩고물이라도 바라는 절박한 심정. 그렇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내 핏줄 앞에서 차마 불편한 내색을 보일 수는 없었다. 부모님에게 하나뿐인 아들이자, 그녀에게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친오빠가 아닌가.


-아니. 오늘은 대학 동창들 좀 만났어. 오빠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서윤은 애써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나야 바쁘게 잘 지냈지. 지방에서 사업하는 친구 일도 좀 도와주고.


오빠의 얼굴에는 어색한 웃음이 번졌고, 올케는 그런 오빠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신 없는 동안 아가씨가 대신 횡계 다녀왔어요. 그런 일은 남자들이 나서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쳇! 집안일에 남자 여자 일이 따로 있나?


오빠는 더는 말대꾸를 이어가지 않은 채 술잔을 기울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굳어진 입매에는 언짢은 기색이 스쳤다.


‘횡계’


그 지명이 다시금 서윤의 머릿속에서 둥근 파문을 일으키더니, 곧이어 몇 개의 장면이 작은 스틸사진처럼 연달아 떠올랐다. 랜드로버가 멈춰 선 숲길. 김 씨 할아버지네 집 마당. 펑크 난 자전거 타이어. 별장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초록색 스프링 노트와 코끼리 머그잔. 그 모든 순간의 끝에서 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착제가 잘 굳었나 보네요. 당분간 자전거 타는 데 문제없겠어요.


서윤은 가늘게 숨을 삼킨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실 한쪽에 켜진 TV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볼륨이 낮춰져 있고, 재방송 중인 축구 경기가 무심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관중의 함성도 해설자의 목소리도 사라진 화면은 거실의 침묵과 섞여 한층 쓸쓸하게 느껴졌다. 텔레비전 속 무음의 스포츠 중계는 마치 수많은 사람이 무대 위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제자리만 맴도는 무언극을 떠올리게 했다. 서윤은 문득 그 장면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목격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강태일 실장이랑은 요즘 어때? 잘 지내는 거지?


그녀는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다 오빠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뭐, 그냥…

-그냥은 아니지. 너희 약혼한 지도 꽤 됐잖아.

-왜 그래 또?

-결혼식 날짜는 언제쯤 잡을 건데? 사람 마음은 갈대 같은 거야. 특히 남자는 더 그래. 태일이한테 눈독 들이는 여자들도 꽤 많을걸.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여기저기서 쿡쿡 찔러댈 거야. 그러니 너 조심해.


서윤은 오빠를 흘겨보았다. 만날 때마다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속셈이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었다.


오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층 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막말로, 빨리 시집가서 부잣집 사모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리면 좋잖아. 나도 잘사는 동생 덕 좀 보고 살아야지.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뭐… 서로 돕고 사는 게 좋긴 하지.


아버지까지 거들고 나서자, 서윤은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북받쳐 오르는 걸 느꼈다.


-식구들 도와주려 나더러 빨리 결혼하라는 거야? 내가 무슨 심청이야?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서윤도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귓가에 울린 그 낯선 어조는 단순한 반박이 아니라, 오래 눌러 왔던 원망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처럼 들렸다. 실내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는 듯했다. 서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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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전철역에서 나오자, 편의점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한 남자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대방과의 대화가 즐거운 듯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마법의 환영처럼 공중전화 부스 속 남자의 모습 위로 도준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


–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간 더 고모부 집에서 지낼 건데, 그 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고모부를 대신해 제가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도준이 초록색 노트 위에 적어 준 10자리 숫자는 결국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날의 대화와 그 목소리는 여전히 서윤의 마음 깊이 남아 있었다.


-우리 아직 통성명도 못 했군요. 제 이름은 도준입니다.


다시 횡계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몇 번이나 당장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과 싸워왔는지 모른다. 거리 위를 지나는 시외버스만 보아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을 붙들어 둔 건 현실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이었다. 


자신에게 이미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처신할 수 없다는 자각.


인간 사회는 관계와 책무로 서로를 얽매어 왔다. 서로를 구속하는 일이 구원이라 믿도록 만들고, 감정의 충동보다 일상의 성실함이 우선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미 잘 디자인된 미래의 청사진을 감히 구겨버릴 만큼 어리석거나 용감하지 않았다. 염치를 모르거나, 배은망덕한 여자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배운 대로 늘 성심성의껏 살아왔다.


그녀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그를 만나게 된다면, 무언가 중대한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선택 또한 예정된 궤도 안에 갇힌 건 아닐까.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을 집어 들든, 어떤 운명을 받아들이든, 정해진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 앞에서 그녀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언젠가 다다를 미로의 끝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과는 같을지도 모른다는 체념이 스쳐갔다. 여기 이대로 멈춰 서는 것, 그것만이 상처를 남기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가슴에 단단한 빗장을 질렀다. 그러나 때론 감정의 사슬이 살짝 느슨해지는 것만 같았다. 편의점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남자를 본 순간, 가슴속에 눌러 두었던 것들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외면해 왔던 그리움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맹세가 한순간 연기처럼 허무하게 흩어졌다.


정수리를 뜨겁게 내리쬐는 유혹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횡계로 가자! 그와 낚시도 하고, 쾌락의 꿀을 빠는 벌처럼 달콤한 추억들을 맘껏 쌓아 올리자. 인생은 결국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일회성의 무심한 꿈과 같고, 지나간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찬란했으나 허망한 순간들에 불과하다. 미래의 내 삶을 함부로 깨뜨려버릴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이고, 내 선택을 납작하게 짓눌러버릴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뿐이 아닌가.


젊은 남자는 전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불이 꺼진 텅 빈 전화부스는 어두운 거리에 홀로 떠 있는 난파선처럼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주머니 속 동전 두 개를 꺼내 조심스럽게 투입구에 넣었다.


신호음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전화기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메신저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어 있었다. 횡계 별장에서 도준이 적어 준 열 자리 번호는 이미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지워졌지만, 그날의 다정했던 온기를 되살리듯 0부터 9까지 숫자판을 하나씩 눌러갔다.


첫 번째 벨이 울리고, 곧 차갑고 무심한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신호음이 반복될수록, 그녀는 얼어붙은 겨울 새벽의 그림자처럼 고립된 자신을 느꼈다. 부스 안을 맴돌던 소리는 이내 사라졌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그녀는 고요한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바로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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