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무슨 일은 아니고요. 저번에 횡계 슈퍼에 갔는데 지갑을 두고 와서 돈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그 조카분이 지나가시다가 대신 계산해 주셨어요.


서윤은 미리 준비해 온 말을 차분히 꺼내놓았다.


-액수가 꽤 되는 모양이요,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걸 보면.

-삼만 원쯤이요.

-에이, 그 정도면 그냥 넘어가도 되지. 이웃끼리야 뭐, 도울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빌린 건 갚아야죠.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몰라서요.

-준이? 준이는 지금 서울에 없는데. 얼마 전엔 또 외국 나간다고 하더니

-외국이요?

-어디라 했더라, 가물가물하네.

-,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그걸 어찌 아나. 원체 떠도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

-혹시 조카분 전화번호는 모르시나요? 휴대폰이 있는 것 같던데요.

-휴대폰? 나야 모르지. 몇 해 연락 없다가도, 서울 오면 꼭 인사하러 들르긴 한다오. 다음에 만나면, 윗집 김 여사 손녀가 다녀갔다고 꼭 전해주리다.


잠시 숨을 고른 할아버지가 천천히 질문을 덧붙였다.


-근데 아가씨 성함이?

-나서윤입니다.

-나서윤그 이름, 참 곱소. 김순내 여사가 살아 계셨더라면, 아가씨를 참 귀여워하셨을 텐데.

-고맙습니다.

-내 고향도 충청도 전의요. 김순내 여사와 나는 같은 마을 사람이었지.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오. 그분 손녀이니, 내 이리 반갑지 않겠소.


그 말에 그녀의 눈빛이 잔 파문을 그리며 일렁였다. 뜻밖에 거론된 외딴 지명 하나가, 아득한 풍경처럼 마음속에 번져왔다.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이 어떻게 이 산골까지 흘러와 긴 세월 이웃으로 지냈는지,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 인연이 어쩌다 횡계까지 이어졌는지를 묻자, 그는 한참 말없이 있다가, ‘전쟁통에 별일 다 있었지.’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김 여사 손녀를 여기서 보다니내가 손 좀 잡아 봐도 되겠소? 너무 좋아서 그냥


김 씨 할아버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서윤은 그 손을 조용히 감쌌다. 그의 손은 종잇장처럼 가늘고 부드러웠으며,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면서도 축축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도준과의 인연이 김 씨 할아버지와 큰할머니, 그 오래전 두 사람까지 거슬러 닿아 있다고 생각하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을 지긋이 누르는 것 같았다.


-내 저세상 가면, 김 여사께 꼭 전하리다. 당신 손녀가다녀갔다고.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작게 흔들었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이별이 찾아오는 법. 그녀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작별을 마음에 새긴 채 느린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누군가의 모습처럼, 무언가를 두고 온 듯한 허전함이 발끝에 걸렸다.


이 세상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도준을 떠올렸다. 우리는 정말 다시 만날 수 없는 걸까. 횡계 숲길에서 마지막으로 엇갈린 채 멀어져간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미 지나온 막다른 골목. 잊히지 않는 추억의 뒤안길에는 공허한 상실감이 어른거렸다. 기억의 어두운 심연 속에서 나뭇잎 한 장이 바람결에 또르르 굴러갔다. 이제 그에 대한 아쉬움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할 시간일지도 몰랐다.

 

병실 문을 막 나서던 서윤은 바로 앞 복도에서 중년 여인과 마주쳤다. 보호자로 보이는 그녀는 매점에서 막 돌아온 듯, 간병 용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버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 . 횡계에서 할아버지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 횡계 분이시군요.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빨리 회복되셨으면 좋겠어요.


서윤은 예의 바르게 응대하며,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여인은 따뜻한 눈길을 건넸다.


-그냥 가시면 섭섭하죠. 제가 왔으니, 잠깐 음료수라도 드시고 가세요. 전 이 집 큰며느리예요.


혹시 이분이라면 도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약이 있어서요안녕히 계세요.


쓸쓸한 감정의 잔향을 뒤로한 채 천천히 병원 층계를 내려오는 동안, 우울한 표정으로 공항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까지 출발을 망설이며 내 전화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전화번호를 쓰레기통에 버렸던 그날의 실책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용기를 냈더라면. 그 어리석고 가혹했던 처사가 가슴 한복판을 저미듯 아프게 다가왔다.

 

병원 1층 현관문 앞,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삶이라는 미로 안에서 누구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각자의 흐름에 따라 빙빙 맴도는 듯한 움직임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링거 거치대에 의지해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환자들, 급한 걸음으로 분주하게 드나드는 방문객들, 능숙한 손끝으로 의료 장비를 다루며 이동하는 병원 직원들, 휠체어를 밀고 조심스레 지나가는 간병인들, 그리고 보조대를 짚고 작은 발걸음을 떼는 노인들.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 그 사이 어딘가에 기적처럼 맺었던 인연조차 이토록 쉽게 엇갈려 버릴 수 있다는 걸까. 그렇다면 도준도, 한때 스쳐 간 허무한 그림자처럼, 영영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사라진 걸까. 오직 함께였기에 가슴 깊이 스며들었던 행복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꿈이 되어 이제 멀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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