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내가 왜 이런 말을 한 거야.’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차라리 울어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해질까. 하지만 눈물 대신 가슴 속 허무만이 더욱 깊어졌다. 아버지는 그제야 별 뜻 없이 맞장구친 말이 서윤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깨닫고, 이번에는 큰 목소리로 오빠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 이놈아. 사업한다고 그렇게 설치더니 내 퇴직금까지 절반이나 말아먹고, 이제 와서 어디에 또 숟가락을 얹겠다는 거냐? 정신 나간 놈 같으니라고!

-, 그래서 서로 돕고 살자는 얘기잖아요!


오빠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자, 안방 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아니, 이 밤중에 왜들 이래? 그리고 철재, 넌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나타나서 또 집안을 시끄럽게 만드는 거야? ?


엄마는 눈을 부라리며 오빠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쳤다.

 

-, 죄송해요! 근데 엄마 손은 왜 이렇게 매운 거야?


오빠는 과장스레 아픈 시늉을 하다가, , , 짧게 헛기침을 하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 아버지는 내년에 정년 퇴임하면 정말로 횡계에 가서 사실 생각이세요?


2층 층계로 향하던 서윤은 횡계라는 말에 더는 발을 떼지 못했다. 공중전화 숫자판을 하나씩 눌러가던 자신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차마 꺼내지도 못했고, 끝내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던 말들. 그 순간의 침묵이 되살아나듯, 목이 뜨겁게 메었다.


-나한테 횡계는 고향 같은 곳이야.

-그렇죠. 고향이나 진배없죠. 큰할머니 산소도 거기 있잖아요.


오빠가 공손히 두 손으로 아버지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문제는 네 엄마야. 엄마는 서울 생활이 좋단다.


아버지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슬쩍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서윤은 한 손으로 벽을 더듬듯 짚으며, 등을 대고 천천히 앉았다. 제이 앞에서조차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그 이름을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떨궜다.


-당신이 가면, 나는 뭐 별 수 있나근데, 나이 들어서 횡계에 가서 뭘 하려고요? 여긴 병원도 가깝고, 교통도 편리하고, 교회 친구들도 다 여기 있는데


엄마는 겉으로는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는 듯 말했지만, 불편한 시골 생활을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참에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가 횡계로 가더라도 자신은 서울에 남을 수 있다는 뜻을 에둘러 밝혀두려는 눈치였다.


그때 올케가 서윤에게 따뜻한 인삼차 한 잔을 가져다주고는 옆에 앉았다.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지요. 별장도 계속 비워두면 안 좋아요. 그냥 방치하느니, 이참에 아예 팔아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김 씨 할아버지도 안 계시는데, 지난번처럼 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해요?

-그동안 김 씨 할아버지께 신세를 너무 많이 진 것 같아요. 거의 공짜로 관리 다 해주셨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김 씨 할아버지, 건강은 어떠시니? 연락은 해 봤어?


아버지가 잔을 내려놓으며 서윤을 바라보았다.


-수술 받으시고 지금은 서울 큰아들 댁에 계신다는데, 제가 연락처를 알 방도가 있어야죠.


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집 큰아들 전화번호를 어디 적어뒀을 텐데생각이 나질 않네.


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동네에 비상 연락망 같은 게 있다고 들었어요. 이장님께 전화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올케의 말에 서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건 마을의 독거노인들을 위한 비상 연락망이었지만, 서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김 씨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알게 된다면, 어쩌면 그걸 통해 도준과 다시 연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하지만 간절한 희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꾸물거렸다.


그에게 전화를 걸자.’


실제로 전화를 걸기까지 몇 번이나 망설이며 스스로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와 통화가 되는 순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빠는 여전히 태일과의 결혼 날짜를 잡으라며 재촉했지만, 서윤의 머릿속은 온통 도준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로 들끓었다.


다시 연락하면, 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생각만으로도 열에 들뜬 듯 가슴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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