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그녀는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우고 갤러리 로비로 나갔다. 식수대를 향해 무심결에 걸음을 옮기려는데 도준의 발걸음이 한 박자 늦게 뒤따랐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묵직한 발소리가 강한 전류처럼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전해졌다.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도록 흥분되면서도, 한편으론 흡사 검은 갓을 쓴 저승사자와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몹시 두려웠다.


-오지 마세요. 다가오지 마요.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짧고도 강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러나 도준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곧장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러운 동작처럼 그녀의 어깨를 스치며 오른팔을 뻗더니, 종이컵을 하나 꺼내 정수기에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 잠깐 이야기해요.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했다.


-얘기요? 무슨 얘기요?

-5분이면 돼요.

-안 돼요. 여긴 위험해요.


그때, 뒤쪽에서 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윤 씨, 거기서 뭐 해? 잠깐 나 좀 봐봐.


깜짝 놀란 그녀는 무심결에 도준을 등지고 반쯤 옆으로 돌아섰다. 종이컵에 물을 따르던 도준의 손끝도 잠시 멈칫했다. 그 순간, 세 사람은 보이지 않는 욕망의 삼각 구도에 묶인 듯 서로를 의식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누구도 중심이 아니었고, 누구도 그 경계선 밖에 있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도형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수경은 왜 여기까지 쫓아 나온 걸까. 무슨 이상한 낌새라도 챘다는 건가. 한꺼번에 두 개의 파도가 몰아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늘에서는 천둥이 치고, 발밑에서는 해일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혼절하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어졌다.

 

먼 배경처럼, 낙타 한 마리가 뜨거운 사막 위를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현실은 잠시 정지된 듯했고, 그녀의 감각은 그 멈춤의 틈새로 미끄러졌다. 모든 장면이 정적에 잠긴 사이, 아직 단어가 되지 못한 단어들이 소음처럼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그렇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의미의 파편들이 어느 순간, 예정된 퍼즐처럼 한곳에 맞춰졌다. 그제야 서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태일은 자기 누이를 의도적으로 이곳에 보냈고,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도준이 눈앞에 나타났으며, 이제 태일까지 곧 도착할 참이었다. 운명이라는 잔인한 실험이 그녀를 또 한 번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과거의 끈에 발목을 잡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늙은 부모의 얼굴, 해맑게 웃던 어린 조카, 그리고 그달 치 월세를 들고 사라진 오빠의 뒷모습이었다. 불만과 욕설이 뒤섞인 올케의 눈물도,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되살아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는 어떤 감정도, 어떤 미련도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내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나는 약혼자가 있어. 그 이름은 강태일이야. 너는 도준이라는 이름을 버려야만 해.’


우리는 모두 인생을 건 도박사들이다. 끝내 손에 쥔 패 한 장을 버리고, 숙명처럼 또 다른 패를 집어 들어야만 하는 존재.


극도로 냉담한 그녀의 반응에 도준은 깊이 상처받은 듯했다.


-그렇군요. 이번에도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는 종이컵의 물을 단숨에 마신 뒤, 그것을 구겨 휴지통에 던지고 급히 몸을 돌려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도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군요.’ 그의 말이 징 소리처럼 머릿속을 두드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윤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그가 사라진 계단 아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귓가에 맴도는 그 한마디가 얼음송곳처럼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번에도…오지 말아야 할 곳.’


오면 안 되는 장소와, 오지 말았어야 했던 순간들. 그것이 무상한 현실이 감내해야 할 잘못된 만남에 대한 자책인지, 아니면 상처받은 영혼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수경이 다가왔다.


-뭐야, 서윤 씨? 아까 그 사람, 아는 사람이야?

-…누, 누구요?

-여기서 물 마시던 키 큰 남자. 둘이 무슨 얘기 하는 것 같던데?

-아니, 그냥 여기 온 관람객이에요. 언제 문 닫느냐고요.


서윤은 무의식적으로 코끝을 만졌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는, 그런 순간에 어떤 기분이었을까. 설령 코가 길어진다 해도, 세상에는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피노키오는 알았을까. 진실을 숨기는 사람들의 고통은 대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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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전혀 다른 시간의 문이 열리고는 한다. 그녀에게는 지난 3개월의 공백이 그저 허무한 세월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짧았던 만남과 아쉬운 이별, 그리고 세상의 가장자리 어딘가로 사라졌던 그가 잠시 멈춰 있던 시간의 틈새를 헤집고, 다시금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횡계에서 태일의 차를 타고 떠나가던 그날, 묵묵히 정면만 응시하던 눈빛 그대로, 그가 시선을 마주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뒤, 살며시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 손짓과 미소 사이, 숨이 멎을 듯한 전율이 온몸에 퍼졌다.


사방에서 지켜보는 눈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가능한 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버텼다. 그때 그녀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휴대용 스피커에서 잔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의 시선과 관람객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쏠렸다. 진열장 앞에서 여러 국가에서 출간된 피노키오 서적을 살펴보던 관장과 수경도 고개를 들어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의 불필요한 시선도, 한 마디의 추측도 용납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어떤 추문이나 오해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가 들려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 말을 이어가려고 애썼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소음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세상의 언어가 잠시 숨을 멈춘 듯, 오직 내면의 기억과 감각만이 선명했다.


3월의 횡계 숲길, 자전거 위에서 느끼던 바람과 햇살, 그의 웃음과 따스한 눈빛, 그리고 목요일 오후, 달콤하게 스며들던 입맞춤까지. 그날의 여운과 닿지 못한 사연들이 만화경처럼 눈앞에 맴돌다 잘게 부서진 파편이 되어 하나씩 가슴속으로 쏟아졌다. 서윤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노영미 연구원이 평소와 다른 서윤의 기색을 감지한 듯 재빨리 다가왔다.


-선배,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 보이세요. 괜찮으세요?

-아냐.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났을 뿐이야.


서윤은 도준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우리 잠깐 쉴까요? 어때요?


최 관장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며 제안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노영미가 맞장구쳤고, 최 관장이 재판관처럼 큰 목소리로 휴식을 선언했다.


-15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관람객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교사들의 인솔에 따라 두 그룹으로 나뉘어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


-피노키오 전시관에서 가장 값비싼 작품이 뭔지 보여드릴게요. 이쪽이에요.


관장은 환심을 사려는 듯, 전시장 가장 안쪽에 있는 진열장으로 수경을 안내했다. 전시장 안은 사람들의 발길과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도준은 뿌리 깊은 고목처럼 거기 우뚝 선 채, 오직 서윤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봄, 마지막 이별의 순간. 그날도 그는 랜드로버 안에서 태일의 차를 타고 멀어지던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무엇을 택하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시간 속 한가운데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기다리는 자’였다.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도 미동조차 하지 않을 듯했다.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귀에 걸고 있던 마이크를 벗어놓고, 옆구리에 찬 휴대용 스피커도 내려놓았다. 아무런 계획도, 명분도 없었다. 그런데도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움직였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둣발 사이로 주변의 시선들이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등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지도 모를 수경의 눈길이 의식되자 내딛는 걸음마다 미묘하게 균형을 잃은 듯한 어색함이 스며들었다. 우두커니 장승처럼 서 있는 도준 앞에 거의 다다른 순간 서윤의 구두코가 우측으로 살짝 방향을 틀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스치듯 지나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고 싶었소. 아주 많이.


도준의 목소리에는 작지만 단단한 울림이 배어 있었다. 서윤의 표정이 무심한 듯 싸늘하게 굳었다. 마음속에서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휘몰아쳤지만, 장차 시누이가 될 여자의 시선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어떤 감정도, 어떤 표현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다. 거짓의 얼굴은 진실을 가장 정교하게 감춘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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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피노키오 전시관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자, 수경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이들이 많이 기다리는 것 같네요. 서윤 씨는 어서 가서 계속 진행해 주세요.


관장은 평소와 달리 존대어까지 쓰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서윤은 짧게 목례하고 서둘러 아이들 쪽으로 향했다. 장난치는 아이들을 일단 진정시킨 뒤, 고래 뱃속을 형상화한 설치물 앞으로 데려갔다. 바다에 빠진 피노키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고래 뱃속에서 피노키오가 살 수 있나요?

-그럼요. 바닷물이 못 들어오게, 의자로 막아 둔 거예요. 여기서 잠도 자고, 책도 읽을 수 있어요.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의 해설은 동화 속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슬픔에 잠긴 피노키오와 파랑새가 한데 어우러진 상상의 모험이 아이들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작은 키에 두꺼운 안경을 쓴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화장실… 저, 진짜 급해요.


그 한마디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오고 몇몇 아이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노키오 이야기를 더 이어갈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어수선해졌다.


-좋아요. 잠깐 쉬었다 가죠. 얼른 다녀오세요.


서윤은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화장실이 있는 로비 쪽으로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노영미 연구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바구니에는 청포도 사탕과 미술관 마크가 찍힌 종이 카드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그것들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이건 ‘모험 카드’예요. 고래 뱃속에서 빠져나온 피노키오처럼, 어린이 여러분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씩씩하게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뜻이에요. 알았죠?

-네!


아이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윤은 문득, 벼랑 끝에서 아이들의 손을 붙잡은 채 버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멀리서 수경과 관장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쪽으로는 끝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모험 카드는 나부터 한 장 필요한 게 아닐까?’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독였다. 아이들은 청포도 사탕을 입에 물고, 카드를 주고받으며 조잘조잘 웃음꽃을 피웠다. 서윤은 그 풍경 속에서 이 순간이 자신에게 얼마나 귀중한 위안인지 새삼 깨달았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하루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도 이런 평온이 뜻밖의 선물처럼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


아이들의 정제되지 않은 웃음과 반짝이는 눈빛이, 그 순간 무형의 언어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런 따스한 온기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모래알처럼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들 뒤로 둘러선 관람객들 사이에서 문득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는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척이 알 수 없는 긴장을 불러왔다. 처음엔 그저 기분 탓이라 여겼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시선 하나가 정확히 그녀의 몸을 스치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깃털처럼 은밀하고도 뜨거운 감각이었다.


서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관람객들 사이에 얼핏 떠오른 낯익은 얼굴. 횡계의 기억이 소용돌이치듯 밀려왔다.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 예상치도 못했던 단 한 사람.


도준.


심장은 순식간에 리듬을 잃고 요동쳤다. 주변 소음은 먼 바람 속으로 흩날리듯 사라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뜻밖에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두 손끝이 떨렸다.


‘그럴 리 없어. 이건 꿈이야.’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그 자리, 그 눈빛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도, 움직임도 사라진 듯했다. 남은 것은 오직 그와 자신, 그리고 정지된 세계 속에 남은 숨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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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태일의 집안은 리온 갤러리의 VVIP 컬렉터였고, 최 관장과도 오랜 세월 밀접한 관계를 이어왔다. 주요 전시마다 통 큰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매년 몇 차례씩 작품을 사들이는 중요한 고객이었다. 그런 집안의 안주인과도 같은 수경의 방문을 맞아 관장이 직접 손님 접대에 나선 건 너무도 당연했다.


-여러분,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서윤은 곁에서 행사 진행을 돕고 있던 노영미 연구원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서둘러 수경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아니, 내가 못 올 데를 온 건가?


그녀의 웃음은 해맑았지만 그 안에는 뾰족하게 돋친 가시들이 숨겨져 있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좀 바빠 보인다.


수경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호호, 어린이 단체 관람객들을 맞을 때마다 리온 갤러리가 들썩인답니다.


관장이 중간에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피노키오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아주 특별한 아이콘이죠. 오늘은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


관장의 말에 수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렇군요.


수경은 평소보다 한층 더 도드라진 존재감을 뽐냈다. 짙은 향수 냄새가 공기 속으로 번지고, 화려한 의상은 조명에 반사되어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농익은 동백꽃처럼 탐스러운 외양 아래 어쩐지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나 그림 사러 왔지. 최 관장님, 너무 요란하지 않고, 선물하기 딱 좋은 걸로 몇 개 골라주세요. 소프트하고, 해피해피한 그림이면 좋겠어요. 마티스의 ‘삶의 기쁨’ 같은 느낌? 요즘 사람들, 다들 스트레스 많잖아요. 그러니까… 잔잔하게 힐링 되는 걸로요.


수경의 말투에는 백화점 VIP 라운지에 앉아 있는 듯한 안락함이 배어 있었다. 그 편안함을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는 사람 특유의 느긋한 오만마저 느껴졌다. 그녀에게 그림을 산다는 건 명품 옷을 고르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술 작품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소유와 과시의 증거였다. 그녀의 지갑은 여왕벌의 꿀통처럼 결코 바닥날 줄을 몰랐다.


신우 일가 여성 서열 1호인 수경은 욕망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었고, 눈에 거슬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단숨에 지워버릴 수 있었다. 그녀 뒤에는 무시할 수 없는 황금 덩어리들이 견고하게 쌓여 있었다. 그 호사스러운 거푸집 안에서 품위와 교양, 겸손 같은 것들은 단지 반짝이는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보여드리고 싶은 꽤 괜찮은 작품들이 몇 점 있어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


관장은 평소의 권위적인 태도를 내려두고, 다소 호들갑스럽게 응대했다.


-유럽 쪽에서 활동한 작가들 작품 중에 예쁜… 아, ‘예쁘다’는 표현은 좀 그런가요? 호호. 색채도 고상하고, 전체적으로 아주 나이스한 것들이죠. 제가 우리 수경 씨의 높은 안목,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호호호.


관장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또 웃었다. 오늘따라 그 웃음이 더욱 어색한 가면처럼 느껴졌다.


-참, 조금 있으면 제 동생, 강 실장도 올 겁니다. 오늘 그림은 특별히 강 실장이 부탁한 거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윤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림부터 고른 뒤에 다 같이 저녁 어때요? 관장님도 함께하시죠. 강 실장이 오늘 관장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다던데요.


수경은 미소를 띤 채 서윤과 관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서윤의 심장 깊숙이, 뜨겁고 메마른 모래바람이 일렁였다. ‘이제부터 나도 너처럼 반말을 하겠노라.’ 큰소리를 치며 돌아선 그녀 앞에, 바로 다음 날 자기 누이를 보낸 태일의 행보가 선명하게 겹쳐졌다. 눈에 드러난 부와 권력으로 또 한 번 상황과 심리를 틀어쥐려는, 태일 특유의 교묘한 술책이 아니겠는가.


어제 처음으로 그에게 맞섰던 일이 어디까지 파장을 불러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약혼 파기를 먼저 입에 담지 않고, 그 일을 기회 삼아 가장 세련되고 은밀한 방식으로 그녀의 삶에 올무를 다시 씌우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전시장의 할로겐 조명이 낯설게 흔들리며, 서늘한 경고가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손바닥 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명심해.


귓가에서 날카롭고 음습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윤은 생의 민낯을 후려치는 그 무언의 메시지를 또렷이 체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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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오후 두 시경, 오늘 방문이 예정된 초등학생들이 갤러리 앞에 도착했다. ‘아현초등학교’라는 표지도 선명한 노란색 스쿨버스가 멈추자, 햇살처럼 반짝이는 아이들이 하나둘 버스 계단을 뛰어내렸다. 그들은 앞다투어 재잘거리며 갤러리 앞마당에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 활기를 더했다.


버스에서 먼저 내린 선생님 두 명이 아이들의 하차를 돕고 있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선생은 한 명씩 손을 잡아주며 따뜻하게 맞이했고, 깔끔한 셔츠에 넥타이를 맨 남선생은 버스 앞에서 차분하게 질서를 잡았다. 1학년과 2학년으로 구성된 아이들이 갤러리를 향해 흘러가듯 움직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얘들아, 자자! 다들 선생님 보세요!


여선생이 손뼉을 가볍게 치며 아이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남선생은 출석부를 펴 들고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올 때마다 손을 번쩍 들고 힘차게 ‘네!’ 하고 대답했다. 서윤은 한 발짝 뒤로 비켜서서 웃음꽃처럼 환한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출석 확인이 끝난 후, 아이들은 갤러리 직원들의 안내를 따라 4층 전시관으로 향했다. 일부는 두 대의 엘리베이터에 나눠 탄 뒤 먼저 올라갔고, 나머지는 어미 오리를 졸졸 따르는 작은 오리 떼처럼 줄을 지어 천천히 이동했다.


피노키오 전시관 앞에 이르자 환상적인 동화 세계가 한눈에 펼쳐졌다.


-와아!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각국에서 모인 인형과 삽화, 입체 형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소형 인형부터 키가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 조각상까지, 크기와 재질은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공통된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바로 길쭉한 코를 가진 피노키오라는 점이었다. 제페토 할아버지와 푸른 요정, 귀뚜라미도 군데군데 배치되어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상상력을 한층 풍요롭게 자극했다.


피노키오 왕국은 어느새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삼삼오오 어울려 전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진열된 작품들 사이를 탐색하거나 장난스럽게 소곤거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자유 시간을 보낸 뒤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이제 서윤이 나설 차례였다. 그녀는 휴대용 마이크의 스위치를 켠 뒤, 전시관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 피노키오와 전시물 사이에 얽힌 이야기들을 실타래처럼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말을 하는 신기한 나무토막이 있었어요. 목수인 제페토 할아버지가 그 나무로 피노키오라는 인형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인형이 갑자기 말을 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어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답니다. 믿기 힘든 순간이었죠. 피노키오는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였는데, 거짓말을 하면 금세 들통이 났어요. 왜였을까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점점 길어졌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도 혹시 거짓말을 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거나 얼굴이 화끈거린 적 있나요?

-네!

-그렇죠!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할 때 코가 길어졌지만, 여러분의 코는 그대로예요. 대신 심장은 쿵쿵 뛰고, 두 볼은 화끈거리죠. '지금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그녀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저마다 다른 모습과 색채를 지닌 각국의 피노키오 앞에서 설명을 이어가며 한동안 아이들과 함께 동화 속 세계에 푹 잠겨 있었다. 그러다 아이들을 이끌고 다음 칸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경숙 씨가 다가와 조심스레 속삭였다.


-강수경 씨가 조금 전에 오셨어요. 지금 관장실에 계세요.


서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왜 하필 지금, 왜 이 시점에 나타난 걸까. 어젯밤 다래원 앞 골목에서의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혹시 태일이 일부러 누이를 이곳에 보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바로 그때, 전시관 입구에서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관장과 수경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손을 흔드는 수경을 보자, 서윤은 잠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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