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그녀는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우고 갤러리 로비로 나갔다. 식수대를 향해 무심결에 걸음을 옮기려는데 도준의 발걸음이 한 박자 늦게 뒤따랐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묵직한 발소리가 강한 전류처럼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전해졌다.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도록 흥분되면서도, 한편으론 흡사 검은 갓을 쓴 저승사자와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몹시 두려웠다.


-오지 마세요. 다가오지 마요.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짧고도 강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러나 도준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곧장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러운 동작처럼 그녀의 어깨를 스치며 오른팔을 뻗더니, 종이컵을 하나 꺼내 정수기에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 잠깐 이야기해요.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했다.


-얘기요? 무슨 얘기요?

-5분이면 돼요.

-안 돼요. 여긴 위험해요.


그때, 뒤쪽에서 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윤 씨, 거기서 뭐 해? 잠깐 나 좀 봐봐.


깜짝 놀란 그녀는 무심결에 도준을 등지고 반쯤 옆으로 돌아섰다. 종이컵에 물을 따르던 도준의 손끝도 잠시 멈칫했다. 그 순간, 세 사람은 보이지 않는 욕망의 삼각 구도에 묶인 듯 서로를 의식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누구도 중심이 아니었고, 누구도 그 경계선 밖에 있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도형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수경은 왜 여기까지 쫓아 나온 걸까. 무슨 이상한 낌새라도 챘다는 건가. 한꺼번에 두 개의 파도가 몰아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늘에서는 천둥이 치고, 발밑에서는 해일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혼절하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어졌다.

 

먼 배경처럼, 낙타 한 마리가 뜨거운 사막 위를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현실은 잠시 정지된 듯했고, 그녀의 감각은 그 멈춤의 틈새로 미끄러졌다. 모든 장면이 정적에 잠긴 사이, 아직 단어가 되지 못한 단어들이 소음처럼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그렇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의미의 파편들이 어느 순간, 예정된 퍼즐처럼 한곳에 맞춰졌다. 그제야 서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태일은 자기 누이를 의도적으로 이곳에 보냈고,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도준이 눈앞에 나타났으며, 이제 태일까지 곧 도착할 참이었다. 운명이라는 잔인한 실험이 그녀를 또 한 번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과거의 끈에 발목을 잡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늙은 부모의 얼굴, 해맑게 웃던 어린 조카, 그리고 그달 치 월세를 들고 사라진 오빠의 뒷모습이었다. 불만과 욕설이 뒤섞인 올케의 눈물도,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되살아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는 어떤 감정도, 어떤 미련도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내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나는 약혼자가 있어. 그 이름은 강태일이야. 너는 도준이라는 이름을 버려야만 해.’


우리는 모두 인생을 건 도박사들이다. 끝내 손에 쥔 패 한 장을 버리고, 숙명처럼 또 다른 패를 집어 들어야만 하는 존재.


극도로 냉담한 그녀의 반응에 도준은 깊이 상처받은 듯했다.


-그렇군요. 이번에도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는 종이컵의 물을 단숨에 마신 뒤, 그것을 구겨 휴지통에 던지고 급히 몸을 돌려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도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군요.’ 그의 말이 징 소리처럼 머릿속을 두드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윤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그가 사라진 계단 아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귓가에 맴도는 그 한마디가 얼음송곳처럼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번에도…오지 말아야 할 곳.’


오면 안 되는 장소와, 오지 말았어야 했던 순간들. 그것이 무상한 현실이 감내해야 할 잘못된 만남에 대한 자책인지, 아니면 상처받은 영혼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수경이 다가왔다.


-뭐야, 서윤 씨? 아까 그 사람, 아는 사람이야?

-…누, 누구요?

-여기서 물 마시던 키 큰 남자. 둘이 무슨 얘기 하는 것 같던데?

-아니, 그냥 여기 온 관람객이에요. 언제 문 닫느냐고요.


서윤은 무의식적으로 코끝을 만졌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는, 그런 순간에 어떤 기분이었을까. 설령 코가 길어진다 해도, 세상에는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피노키오는 알았을까. 진실을 숨기는 사람들의 고통은 대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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