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태일의 집안은 리온 갤러리의 VVIP 컬렉터였고, 최 관장과도 오랜 세월 밀접한 관계를 이어왔다. 주요 전시마다 통 큰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매년 몇 차례씩 작품을 사들이는 중요한 고객이었다. 그런 집안의 안주인과도 같은 수경의 방문을 맞아 관장이 직접 손님 접대에 나선 건 너무도 당연했다.


-여러분,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서윤은 곁에서 행사 진행을 돕고 있던 노영미 연구원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서둘러 수경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아니, 내가 못 올 데를 온 건가?


그녀의 웃음은 해맑았지만 그 안에는 뾰족하게 돋친 가시들이 숨겨져 있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좀 바빠 보인다.


수경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호호, 어린이 단체 관람객들을 맞을 때마다 리온 갤러리가 들썩인답니다.


관장이 중간에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피노키오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아주 특별한 아이콘이죠. 오늘은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


관장의 말에 수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렇군요.


수경은 평소보다 한층 더 도드라진 존재감을 뽐냈다. 짙은 향수 냄새가 공기 속으로 번지고, 화려한 의상은 조명에 반사되어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농익은 동백꽃처럼 탐스러운 외양 아래 어쩐지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나 그림 사러 왔지. 최 관장님, 너무 요란하지 않고, 선물하기 딱 좋은 걸로 몇 개 골라주세요. 소프트하고, 해피해피한 그림이면 좋겠어요. 마티스의 ‘삶의 기쁨’ 같은 느낌? 요즘 사람들, 다들 스트레스 많잖아요. 그러니까… 잔잔하게 힐링 되는 걸로요.


수경의 말투에는 백화점 VIP 라운지에 앉아 있는 듯한 안락함이 배어 있었다. 그 편안함을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는 사람 특유의 느긋한 오만마저 느껴졌다. 그녀에게 그림을 산다는 건 명품 옷을 고르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술 작품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소유와 과시의 증거였다. 그녀의 지갑은 여왕벌의 꿀통처럼 결코 바닥날 줄을 몰랐다.


신우 일가 여성 서열 1호인 수경은 욕망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었고, 눈에 거슬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단숨에 지워버릴 수 있었다. 그녀 뒤에는 무시할 수 없는 황금 덩어리들이 견고하게 쌓여 있었다. 그 호사스러운 거푸집 안에서 품위와 교양, 겸손 같은 것들은 단지 반짝이는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보여드리고 싶은 꽤 괜찮은 작품들이 몇 점 있어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


관장은 평소의 권위적인 태도를 내려두고, 다소 호들갑스럽게 응대했다.


-유럽 쪽에서 활동한 작가들 작품 중에 예쁜… 아, ‘예쁘다’는 표현은 좀 그런가요? 호호. 색채도 고상하고, 전체적으로 아주 나이스한 것들이죠. 제가 우리 수경 씨의 높은 안목,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호호호.


관장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또 웃었다. 오늘따라 그 웃음이 더욱 어색한 가면처럼 느껴졌다.


-참, 조금 있으면 제 동생, 강 실장도 올 겁니다. 오늘 그림은 특별히 강 실장이 부탁한 거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윤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림부터 고른 뒤에 다 같이 저녁 어때요? 관장님도 함께하시죠. 강 실장이 오늘 관장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다던데요.


수경은 미소를 띤 채 서윤과 관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서윤의 심장 깊숙이, 뜨겁고 메마른 모래바람이 일렁였다. ‘이제부터 나도 너처럼 반말을 하겠노라.’ 큰소리를 치며 돌아선 그녀 앞에, 바로 다음 날 자기 누이를 보낸 태일의 행보가 선명하게 겹쳐졌다. 눈에 드러난 부와 권력으로 또 한 번 상황과 심리를 틀어쥐려는, 태일 특유의 교묘한 술책이 아니겠는가.


어제 처음으로 그에게 맞섰던 일이 어디까지 파장을 불러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약혼 파기를 먼저 입에 담지 않고, 그 일을 기회 삼아 가장 세련되고 은밀한 방식으로 그녀의 삶에 올무를 다시 씌우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전시장의 할로겐 조명이 낯설게 흔들리며, 서늘한 경고가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손바닥 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명심해.


귓가에서 날카롭고 음습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윤은 생의 민낯을 후려치는 그 무언의 메시지를 또렷이 체감할 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