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원목으로 만든 별장 출입문에는 묵직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현관 근처 작은 화분 아래에 숨겨둔 열쇠로 문을 열자, 맑은 햇살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집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족이 한동안 부담 없이 지낼 수 있도록 꾸민 친환경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1층은 거실과 부엌이 하나로 이어진 개방형 구조였고, 화이트와 블루 톤의 싱크대와 스토브, 나무 수납장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실내 오른쪽에는 욕실이 있었고, 왼편으로 돌출된 공간은 손님방으로 이어졌다. 그리스 전통 가옥을 연상시키는 소박한 손님방은 푸른 대리석의 차가운 질감과 레이스 커버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져, 한낮 햇살 속에 고요한 정취를 더했다.


욕실 옆 계단을 따라 오르면, 아래층과 허리 높이 가림막 하나를 사이에 둔 복층형 오픈 침실이 나타난다. 목재 난간 너머로 거실이 내려다보이는 이 공간은, 정갈하게 놓인 가구 덕분에 포근하면서도 넉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기울어진 천장 아래 불투명 채광창으로 은은한 햇살이 스며들어, 침대 위를 부드러운 빛으로 감쌌다. 이곳에서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아침 햇살 속에서 눈을 뜨는 바로 그때이다. 숲속에 내려앉은 고요한 빛은 하루의 시작을 부드럽게 물들이며, 마음 깊은 곳까지 아늑한 기운으로 스며든다.


서윤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천장과 창틀을 점검했다. 지붕과 벽 어디에도 물이 배어든 자국이나 곰팡이 흔적은 없었다. 손님방 옆 보일러실에는 새로 설치한 경동 보일러가 낯설 만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부엌 싱크대 앞으로 돌아와 물을 틀자, 보일러가 조용히 작동했고 곧 온수가 흘러나왔다. 서윤은 실내 온도를 24도로 설정한 뒤, 방화동 본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가씨, 오늘 횡계 갔다면서요?


전화를 받은 올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살가웠지만, 일부러 과장된 듯한 말투가 오늘따라 신경 쓰였다.


-이제 막 도착했어요.

-물 새는 데는 없죠? 보일러는 어때요?

-네… 다 잘된 것 같아요.


서윤은 차분한 어조를 유지한 채, 약간 거리를 두었다.


올케가 부모님 댁 살림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건, 오빠가 거듭된 사업 실패로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잃은 무렵부터였다. 신용불량자가 된 오빠는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길어졌고, 젖먹이 조카에게는 올케의 손길이 절실했다. 제 앞가림이 급했던 올케는 월셋집을 방화2동 주민센터 근처로 옮긴 뒤, 가사 도우미처럼 시댁을 들락거리며 미안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생활비를 챙겨 갔다. 못난 자식을 둔 양친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말을 흘리며, 부모님 집을 사실상 제 아르바이트 일터처럼 드나드는 형국이었다.


전화선 너머로 배경음처럼 희미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올케는 라디오를 켜 둔 채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고, 엄마는 늦은 아침을 먹은 뒤 집 근처 한의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나가셨다고 했다. 지금 집에는 올케만 남아 있었고, 그녀는 파김치를 담그기 위해 재료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오늘 꼬리곰탕 끓이고 있거든요. 아가씨도 설비 가게 들렀다가 곧장 올라오실 거죠? 저녁 같이 먹어요.

-저녁이요? 여기 오는 데만 다섯 시간 걸렸어요.


서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가 아니래요. 피곤하죠?

-오늘 하루는 여기서 쉬고 갈까 봐요.

-내일 출근은요?

-당분간 휴가예요.

-아, 다행이네요. 이런 일은 선호 아빠가 나서야 하는데… 휴가 첫날부터 이게 무슨 고생이래요.


올케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오빠 때문에 속상하다며 한참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오빠가 빚쟁이들을 피해 집을 나간 뒤 보름 가까이 소식이 없다는 말에, 서윤은 가슴 한복판에 돌덩이를 얹은 듯 답답함을 느꼈다. 


식구들은 그녀의 결혼을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긍정적인 시선만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신우건설 장남 강태일과 약혼 이야기가 오가던 무렵, 오빠는 서윤을 불러 앉혀놓고 현실적인 차이에 대해 말했다.


-아버지는 퇴직 전에 너를 결혼 시키고 싶어 하셔. 하지만 우리 사정으로는 그쪽 집안 수준에 맞추는 건 불가능해. 그건 너도 잘 알잖아.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집안 분위기가 서서히 서윤을 압박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가씨, 신우건설에 오빠 취직자리 하나 부탁할 수 있을까요?

-그래라. 강 서방에게 말이라도 한번 슬쩍 건네보렴.


엄마도 딸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거들었다.


모처럼 식구들끼리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서윤은 점점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신용불량자인 데다 종종 노름판까지 드나드는 친오빠의 취직 건이라니. 아무리 결혼을 앞둔 사이라 해도, 집안의 위신까지 걸린 그런 부탁을 서윤은 차마 강태일 앞에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껏 아무 말 없이 모른 척해왔는데, 또다시 오빠가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 하나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그녀는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진 사람처럼 괜스레 미안했고,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


-횡계 읍내까지 다시 나가려면 또 택시를 불러야 하잖아요. 에잇, 그냥 이참에 외제 차 하나 뽑아달라고 하세요. 시댁이 뭐, 으리으리하잖아요. 이미 그 집 며느리나 진배없는데, 우리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고생할 이유 뭐 있어요. 그죠?


올케는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가족 사이라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가끔 의도적으로 무시하곤 했다. 외제 차라니. 이건 서윤의 입장을 너무도 쉽게 넘겨짚은 말이었다. 그녀는 아연실색하여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올케는 말실수인 척 흘리듯 말을 꺼냈지만, 실은 ‘가족’이라는 방패를 두른 채 서윤의 반응을 떠보려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어디까지 서윤의 약혼자 집안에 손을 내밀어도 되는지, 태일이 어느 선까지 이번 혼사를 배려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그녀는 그 어색함을 덮으려는 듯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김 씨 할아버지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건데요? 어디 편찮으신가?


김 씨 할아버지의 늙고 쇠약해진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별장 주변을 돌며 집 상태를 살펴주던 그가 홀로 지내시다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 아닌지, 다시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가 내려가서 한번 살펴볼게요.

-혼자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아유, 우리 아가씨는 어쩜 그렇게 순하고 착해빠졌을까…

-지금… 칭찬하는 거예요?

-맞아요. 칭찬이죠. 그리고 진심이기도 하고요. 호호호.


이번 지붕 공사와 보일러 교체를 맡았던 ‘대동종합설비’는 횡계 읍내에 있었다. 오늘 밤을 이곳에서 보내려면 먹을거리도 좀 마련해야 했다.


-택시 부르면 거기까지 들어오는 데도 한참 걸릴 텐데… 참, 자전거 탈 줄 알잖아요. 그죠?


올케는 다시 호호 웃더니 집 뒤편 창고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 그곳에는 작년에 오빠가 사다 놓은 중고 산악자전거가 있었다. 횡계 로터리까지라면 그걸 타고 금방 다녀올 수 있을 듯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우선 짐을 풀고 잠시 쉬기로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 텅 빈 고요함을 누리고 싶었다. 한동안 넓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무엇에 닿아 있는지, 혹은 그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루쯤 더 이곳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느슨해졌다. 이대로 휴가 기간 내내, 아무런 번뇌와 갈등도 없는 시간 속에 잠시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남들은 휴가를 받으면 외국으로 여행도 가는데…’


그녀는 짧은 미소를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 속 물건들을 하나둘 꺼내 놓았다. 랩톱을 꺼내 전원을 연결하려던 순간, 집안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먼지가 눈에 거슬렸다. 문이며 창문을 굳게 닫아두었건만, 손바닥 위에는 어느새 뿌연 먼지가 묻어났다. 그녀는 걸레를 빨아 테이블과 선반, 의자 위를 정성스럽게 닦았다.


‘그런데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녀는 문득 손을 멈추고, 물기 잔뜩 머금은 시커먼 천 조각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쓸고 닦는 일에 매달리는 걸까. 먼지가 쌓였다고 꾸중할 사람도 없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정리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이 깔끔하고 질서정연해야 마음이 놓였다. 옷장 속은 늘 가지런했고, 서랍 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갤러리에서 전시 업무를 맡으면서 이런 성향은 더욱 깊어진 듯했다.


‘당분간 정리 박사 노릇은 잊자.’

‘그래. 오늘만은 눈감아 주자.’


그녀는 물걸레를 툭 물통 속으로 던졌다. 믹스커피가 건강에는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뜨겁고 달곰한 맛은 묘하게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머그잔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그녀는 창가에 서서 다시금 밖을 바라보았다.


건물 아래,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넓은 터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온 대추나무도 이제는 남은 기운마저 다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아버지 말로는 김 씨 할아버지가 수시로 들러 마당의 낙엽을 쓸고, 나뭇가지를 다듬어 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가는 대추나무를 보자, 혹시 김 씨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더욱 커졌다.


우선 김 씨 할아버지 댁부터 살펴볼 생각으로 외출 준비를 하던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늘 붙어 다닌 단짝, 제이였다.


-너희 올케가 너 횡계 갔다고 하더라. 지금 누구랑 있어?

-나 혼자 왔어.

-강태일이 데려다준 거 아냐?

-오늘 나 쉬는 날인 줄 몰라.

-왜?

-여행 가자고 하잖아. 1박 2일. 그래서 오늘 출근한다고 했어.

-같이 하룻밤 지내는 거 아직도 불편하다! 그런데 알아? 그건 너의 콤플렉스야.

-무슨 소리야?

-집안 격차에서 오는 박탈감을 그렇게 방어하는 거지.

-여보세요. 제이 씨, 그건 내 콤플렉스 아니고, 너의 열등감이거든요.

-그래서 난 네가 좋아. 남자랑 여행 가지 마. 앞으로도 쭉. 대신 나랑 가자.

-너랑? 돌아버리겠네.


제이는 요즘 몹시 지쳐 있다며 하소연했다. 4년째 작은 출판사를 운영 중인 그녀는 신간 출간 일정에 맞추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편집부 직원 하나가 장기 휴가를 내고 자리를 비운 탓에, 그 일까지 고스란히 떠맡게 되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제이에게 갑작스럽게 인쇄소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조심해서 갔다 와. 밥 잘 챙기고.

-너도 잘 지내. 특히 남자 조심하고.

-피, 하여튼…


서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화를 끊고는, 문득 생각이 나 평창동에 있는 명명희 선생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신호음 끝에 선생의 양녀 김순자 씨와 연결되었다. 명명희 선생은 동문전 참석차 일본 오사카에 머무는 중이며, 전시 일정과 여행을 함께 소화하느라 다음 주에나 돌아오실 거라고 했다. 서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주 안으로 개인전에 대해 상의하려던 계획은 일단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전화선 너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메마른 신호음이 공허한 정적 속에서 길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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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다음 날, 서윤은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 횡계에 도착했다. 차창 밖으로 읍내 중앙로의 공사 현장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의 별장은 시내에서 차로 20분쯤 더 들어간 산기슭에 있었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막다른 길 끝자락의 외딴집이었다.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탄 그녀는 울퉁불퉁한 숲길을 따라 한동안 달린 끝에 별장 앞마당에 이르렀다. 집 뒤편은 곧장 수풀 우거진 산속 오솔길로 이어져 있었고,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도 거기까지였다. 뒷좌석에서 내리기 전, 서윤은 미터기 요금에 웃돈을 조금 얹어 건넸다. 빈 차로 되돌아가야 할 운전사를 향한 작은 배려였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손님이 가자면 어디든 가야죠.


차에서 내리려 하자, 택시 기사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긴 외진 곳이라 택시를 불러도 잘 안 들어올 겁니다. 혹시 필요하면 미리 연락 주세요. 사정되는 대로 제가 올 수도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택시에서 내린 서윤은 잠시 숨을 고르며, 비포장도로를 따라 차가 되돌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공기 속에 부옇게 흩날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앞마당의 고요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과 능선을 따라 초봄의 푸른 기운이 스며든 한적한 오후였다. 청바지에 스웨이드 재킷을 걸친 그녀는 어깨에 랩톱이 든 배낭을 메고 있었다. 셔츠 깃을 반듯하게 여민 그녀의 얼굴에는 햇살에 데워진 듯한 혈색이 감돌았다. 두 손을 깍지 끼고 크게 기지개를 켜자, 숲에서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뺨을 스치며 숨 깊은 곳까지 차올랐다. 신선한 공기 덕분인지 서울에서 이어온 긴 여정의 피로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씻긴 듯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하품을 하며, 언덕 위에 자리한 파란 지붕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본래는 낡은 농가였으나, 큰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시간을 두고 개축해 지금과 같은 2층 건물이 되었다. 삼각형 지붕과 테라스를 갖춘 현재의 구조는 아버지가 스위스를 여행하며 마음에 담아두었던 목조주택에서 영감을 얻어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멋을 간직한 이 별장은, 아버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손수 다듬어 온 결과였다.


이 집에서 큰할머니는 암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거의 사십 년을 홀로 지내셨다. 큰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하나뿐인 아들은 그 전쟁 통에 설사병을 앓다 목숨을 잃었다.


-그때 페니실린 한 방만 맞았어도 나았을 텐데….


살아생전 큰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내뱉곤 하던 그 말은, 지금도 서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횡계는 돌아가신 큰할아버지의 고향이었고, 전쟁 미망인이 된 그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몸을 기댈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던 그 아이마저 잃고 난 뒤, 그녀는 세상과 거리를 두듯 스스로 벽을 쌓고 살아왔다. 질병과 전쟁, 가난이 뒤엉켜 있던 시절. 큰할머니의 삶은 그 자체로 상실의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횡계는 서윤에게 전원의 소박한 삶을 처음 가르쳐준 거의 유일한 터전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배려로 큰할머니 곁에 양자처럼 머물게 되었고, 독립한 뒤에도 여름이나 겨울 방학이면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덕분에 그녀의 기억 속에는 유년 시절 횡계에서 마주한 풍경들이 낡고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서울에서 온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고, 서윤은 그 애들 틈에 섞여 낯선 경험들을 하나씩 익혀갔다. 부뚜막 불구덩이에 넣어둔 감자를 들여다보다 볏짚을 타고 번진 불꽃에 놀라 뒷걸음질 치던 일, 아이들을 따라 산에 올라가 칡뿌리를 캐던 일, 겨울 어느 날 밭둑에서 쥐불놀이를 하다 동네 어른들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던 일들. 그 모든 기억은 오래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마음속 풍경화로 간직되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상급 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업에 쫓겨 횡계를 찾는 일은 차츰 뜸해졌다. 큰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대학 입시 준비에 매달려 있던 그녀는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그 일은 이후로도 미처 갚지 못한 빚처럼 마음 한쪽에 줄곧 남아 있었다.


그동안 큰할머니의 옛집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곳을 다시 찾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별장에 머문 건 2년 전 가을, 약혼자 태일이 차로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학술지 마감을 앞두고 한 달 가까이 머무르며 자료를 검토하고 논문을 정리하느라 거의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집 밖의 풍경이나 계절의 빛깔이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단순히 집수리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니, 적어도 일을 보는 동안만큼은 마음을 풀고 편히 머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횡계에 오길 잘한 것 같아.


그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처럼 따스한 햇볕 아래 나온 탓인지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며 언덕 위 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막 새순이 돋아난 나무들이 집 주변을 감싸며 싱그러운 기운을 더하고 있었다. 최근 공사를 끝낸 별장 지붕은 한결 든든해 보였다.


-이제 빗물이 새는 일은 없겠지….


서윤은 생수병을 손에 쥔 채 돌층계를 따라 천천히 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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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서울의 서쪽 끝, 방화동에는 '옥수탕'이라는 오래된 목욕탕이 있다. 옥수탕 골목 안쪽 2층 양옥집에서 서윤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늦은 밤, 목욕탕 간판 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골목은 적막했다. 서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거실에서 야구 중계를 작은 소리로 틀어놓은 채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갤러리 일이 좀 많았어요.

-너무 열심히 살지 마.

-아버지도 참…

-내가 살아 보니, 인생이 너무 짧더라.

-엄마는요?

-방에서 주무시지. 너, 이리 좀 와 봐라.


아버지는 소파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오늘따라 아버지의 눈가에는 시름이 더욱 깊어 보였다. 누구에게나 한때 뜨거운 청춘과 자유를 갈망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젊은 날, 아버지는 일본행 밀항선을 타다 붙잡힌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결혼 이후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중학교 교사로 성실한 삶을 살아왔고, 단 한 번도 다른 길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 말년에 이른 아버지의 머리 위에는 어느새 세월의 흰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내일 시간 좀 있니?

-왜요?

-갤러리 쉬는 날이잖아. 횡계에 좀 다녀올래?


강원도 횡계에는 아버지 소유의 작은 별장이 하나 있었다. 식구들이 가끔 내려가 머물던 그 집은 얼마 전부터 지붕 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낡은 보일러도 함께 새것으로 교체했다고 했다.


-김 씨 할아버지 아니었으면 온 집안이 물바다 되고, 곰팡이 피고 난리가 났을 거야. 고맙게도 설비 업체도 그분이 소개해 줬는데, 어째 연락이 안 되네.

-전화를 안 받으세요?

-번호가 바뀐 건지, 통 받질 않으셔.


김 씨 할아버지는 근처에 혼자 사는 이웃 어르신으로, 틈틈이 별장에 들러 집 주변을 살펴주곤 했다. 젊은 시절, 밀짚모자에 검은 고무장화를 신은 그는 산골 촌부에게서는 보기 힘든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생전에 큰할머니와 그의 부인이 서로 오가며 반찬도 나누고 허물없이 지냈지만,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는 김 씨 할아버지만 옛집에 남아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닐까요?

-글쎄다. 서울에서 큰 아드님이 와서 모셔갔나?

-지금 연세에 혼자 지내시는 건 무리잖아요.

-그렇지. 때가 되면 자식들 곁이 편하지.

-나, 시집가면... 아빠는 어쩌려고.

-그런 말 마라. 늙어가는 딸을 언제까지 어깨에 이고 지고 살아야 한단 말이냐?

-피이…

-아무튼 내일 네가 가서 지붕이랑 보일러가 제대로 됐는지 살펴보고, 공사대금도 치르고 와야겠다.

-오빠는 어디 갔어요?

-철재? 한참 얼굴도 못 봤어. 또 무슨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지….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괜히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서윤은 잠시 침묵했다. 오늘 최 관장이 명명희 화백에 관해 당부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관장은 당장 내일부터 쉬라고 했지만, 휴가는 수요일부터였다. 화요일은 원래 직원들에게 주어진 정식 휴일이었다. 아무래도 짬을 내어 아버지 부탁을 먼저 들어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루 정도 횡계에 다녀온다고 해서 관장이 부탁한 일에 차질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알았어요. 제가 내일 갔다 올게요.

-미안해, 딸. 휴일인데 쉬지도 못하게 해서.

-뭘요. 잠깐 바람도 쐬고 좋죠. 봄이잖아요.

-그렇지. 벌써 봄이네. 이러다 금세 여름 가고, 가을 가고 그러겠지…


아버지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횡계 별장은 아버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큰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홀로 살던 집으로, 아버지는 그 집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간직해 왔다.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자란 아버지는 어린 시절 친할아버지의 형수였던 큰할머니 댁으로 보내져,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그분의 보살핌 속에서 지냈다. 긴 세월 외롭게 살아온 큰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그리고 연민을 품고 있던 아버지는 그 집을 별장처럼 고쳐 지금까지 손수 가꾸어 오셨다.


-아버지, 정말로 은퇴 후에 거기 가서 살 거예요?

-그럼. 거긴 내 고향 같은 곳이지. 사람들도 연어처럼, 죽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야.
-그 집에서 태어나신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난 이제 거기밖에 없어.

아버지는 먼 기억의 뒤안길을 더듬듯 잠시 시선을 떨군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향으로의 회귀. 


그 말이 품은 서늘한 쓸쓸함이 어쩐지 서윤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며 욕실에서 이를 닦는 동안, 어두운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 한 마리가 문득 떠올랐다. 돌아갈 곳을 향해 묵묵히 헤엄치는, 생의 마지막 온기. 그 모습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았다.

 

그날 밤, 어린 시절부터 되풀이되던 익숙하면서도 낯선 악몽이 다시 서윤을 찾아왔다.

사방은 짙은 어둠에 잠긴 물속이었다. 거센 물살과 뒤엉킨 해초가 시야를 가렸고, 귀청을 울리는 물소리만이 사방에서 밀려왔다. 두 팔을 아무리 휘저어도 붙잡을 것은 없었고, 발끝은 닿을 곳 없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녀의 몸은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순간, 차갑고 억센 무언가가 발목을 움켜쥐었다. 끌어올리려는 것인지,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기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서윤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다. 눈을 뜬 뒤에도 어둠 속 물살과 발목을 감싸던 감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의식의 잔물결 너머로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심연을 떠도는 외로운 물고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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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인사동 밤거리에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윤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섰다. 뿌옇게 흐린 유리 벽 너머로, 수묵화처럼 번지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아스라이 멀어져 간 옛 기억들을 떠올렸다.


방화동 손 화실을 다니던 어린 시절, 손문기 선생을 따라 드나들던 인사동 거리에서 그녀는 운 좋게 한국 화단의 원로 거장들을 먼발치에서 뵐 수 있었다. 이름으로만 듣고 작품으로만 알던 대가들을, 숨죽이며 지켜본 기억은 놀람과 설렘 그 자체였다.


사춘기 소녀에게 꿈과 낭만을 선사하던 예술가들의 거리. 지금은 그 모든 시간이, 그녀가 매일 맞서는 현실과 책임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덧 29세가 된 그녀에게는 때때로 숨을 돌릴 만한 공간이 필요했다. 공중전화 부스는 그럴 때마다 잠시나마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은밀한 쉼터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오늘 밤, 전화 수화기를 손에 쥔 서윤의 마음은 무거웠다.


강태일과 약혼한 지도 어느새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까다롭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의 기준으로 늘 그녀를 대해왔다. 지금도 그가 미간을 찡그린 채 자신의 전화만을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자 몸이 절로 굳어졌다. 그는 즉시 연락이 안 되면 괜한 짜증으로 그녀를 힘들게 했고, 자신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대하는 태도 역시 용납하지 않았다.


서윤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벨이 세 번 울렸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전화기를 쏘아보고 있을 태일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네 번째 전화벨이 울리고 나서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바빴나 봐?

-미안해요. 전시 준비하느라 자리에 없었어요.

-아직 일 안 끝났어?

-네, 뒷마무리가 남았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내일 쉬는 날이잖아. 1박 2일 여행 가자고. 오늘 밤 떠났다가 내일 오후에 돌아오면 돼.


그의 말투는 유독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이 서윤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의 뜻에 반하는 말을 꺼내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1박 2일의 여행이라니. 젊은 남녀에게 그것은 은연중에 하룻밤의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 아닌가.


‘나를 너무 쉽게 여기는군.’


서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더 이상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가 점점 더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마음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왜, 싫어? 우리 밤에 같이 있었던 것도 꽤 오래됐잖아.


강태일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들떠 있었다. 그 안에 조급한 갈증이 묻어났다.


-아니, 그건 알지만…

-뭐가 문제야? 내가 지금 당장 데리러 갈게.


잠시 망설이던 서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생각할 틈도 없이 둘러댄 말이었다.

 

-아니요. 내일 출근해야 해서요.

-출근해?


그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번 전시를 수요일에 제대로 오픈하려면 정리할 게 아직 많아요.

-너무하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잖아. 리온에서 사람을 너무 부려 먹는군.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못 끝낸 거예요. 제 책임이니 끝까지 해야죠.

-쳇, 그런데 거… 그 갤러리 언제까지 다닐 셈이야? 이제 쉴 때도 되지 않았어?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미래의 배우자를 향한 배려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것만 귀하게 여겼고, 타인이 지닌 가치나 바람쯤은 쉽게 흘려보냈다.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인사동 거리를 밝히는 크고 작은 불빛들이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처럼 흔들렸다. 소녀 시절, 예술가의 꿈을 처음 품게 했던 이 거리. 그 꿈을 지키기 위해 버텨온 시간과 노력만큼은 허망하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의 요구에 맞춰 움직이고, 약속을 조율하고, 성적 주체성을 내어준 채 여행에 나서고, 가족사마저 복잡한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결혼 후 펼쳐질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묶이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가고 싶었다. 한 집안의 울타리에 갇혀 쉽게 소진될 인생이라면, 지금껏 애써 걸어온 이 길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서윤은, 곧 남편이 될 약혼자와의 잠자리가 꺼림칙하다는 말을 끝내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아직 너의 여자가 아니라고, 쉽게 허락할 내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긋는 일도 그녀에겐 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앞으로 닥칠 일보다 방화동 식구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는지 몰랐다. 늙으신 아버지는 은퇴를 앞두고 있었고, 병약한 어머니는 여전히 자주 자리에 눕곤 했다. 집안의 기둥이어야 할 오빠는 사업 실패 이후 신용불량자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집안 사정들을 떠올릴수록, 그녀는 도무지 자기 입장만을 앞세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아, 지금은 좀 그래요…


태일은 신경을 건드리는 말들을 이어갔지만, 서윤은 늘 그러하듯 감정을 숨긴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마침내 전화를 끊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늘 하루는 유난히 길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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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사무실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그 위에는 강태일의 이름과 함께 ‘회신 부탁’이라는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서윤은 수화기를 집어 들려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우건설의 후계자인 강태일을 처음 만난 건, 서윤이 뉴욕대 미술사 프로그램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그 무렵 리온 갤러리에서는 아프리카 조각전이 한창이었다. 최희숙 관장이 직접 짐바브웨에서 선별해 온 쇼나 조각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열망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당시 한국 미술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서윤은 작품 목록을 손에 든 채 전시장을 찾은 컬렉터들을 일일이 응대하고 있었다.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이나 야수파의 원시주의와 연결 지어 덧붙이는 그녀의 설명만으로도 관객들은 20세기 초 파리 아방가르드의 현장에 직접 서 있는 듯한 몰입과 감동을 표했다. 짐바브웨의 열악한 경제 사정과 환율 변동으로 인해 작품 가격이 예상보다 낮게 책정되었다는 것도 전시회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국의 원시성과 현대 미술적 맥락이 결합된 전시는 컬렉터들의 예술적 향수를 자극했고, 작품 구매 열의는 한층 고조되었다.


강태일도 그때 자기 누나 강수경과 함께 리온 갤러리를 찾았다.


-짐바브웨의 쇼나 조각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석조 예술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입니다. 석영, 말라카이트, 록 마블, 호화석 등으로 다듬어진 이 조각들은 부드러운 표면 덕분에 섬세한 조형을 가능케 하며, 그 독특한 윤기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신입 큐레이터였던 서윤이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태일은 두 눈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서윤은 어딘지 모르게 끈적이는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애써 모른 척 외면하며 준비한 말만 끝까지 전한 뒤 자리를 피했다.


쇼나 조각전이 끝난 얼마 후, 서윤은 관장의 요청으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성북동에 있는 강태일의 본가로 향했다. 조각상을 직접 배달하기 위해서였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언덕길 골목으로 차량이 들어서자, 주차장과 맞닿은 문을 지나 드넓은 정원이 펼쳐졌고, 집 울타리 안은 대도시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고요와 적막이 감돌았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이렇게 꾸미고 살지? 집도 무슨 미술관 같잖아.

-쉿, 조용히 해.


작품을 함께 나르던 남자 직원들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잔디밭에 놓인 디딤돌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프렌치 도어 양식의 현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 큰 거실에는 대동여지도 같은 고서화와 고가구, 오래된 골동품들이 품격 있게 놓여 있었다. 그날 배달된 쇼나 조각은 모두 여덟 점이었다.


-어서 와요. 그런데 아프리카 조각인지 뭔지, 전시장에서 봤을 때와는 좀 다른 것 같네. 안 그런가?


강태일의 누나 강수경은 서윤을 마치 자기 밑에 있는 여직원처럼 대하며, 무례하게 굴었다. 그런 누나 옆에서 어슬렁거리던 태일이 입꼬리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은 채, 서윤에게 느닷없이 데이트를 제안했다.


-우리 언제 같이 저녁 먹을래요? 그쪽에 흥미가 있어서…

-미쳤니? 처음 보는 여자한테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


강수경은 눈을 부라리며 남동생을 나무랐다.


-처음 보긴? 그때 리온에서 만난 큐레이터, 나서윤 씨잖아.


인사동 첫 만남부터 몹시 눈에 거슬리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윤은 더욱 불쾌함을 느꼈다. 리온 갤러리의 일개 큐레이터라는 직함이 이런 자리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들이 속한 세상과 자신의 세계가 너무 다르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들 앞이라도 함부로 얕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조각품 자리 배치가 끝난 후, 서윤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했다.


-어, 잠깐만요. 제가 실례를 했다면 용서하세요.


태일은 그녀 앞으로 다가서며 짐짓 성의를 담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갤러리로 돌아가야 해서요.

-그렇군요.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면 좋겠네요.


서윤은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일주일 뒤, 강태일이 서윤 앞에 다시 나타났고, 그 후 벌어진 여러 사건과 기막힌 사연들이 결국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때 조각품을 배달하던 갤러리 여직원은 어느새 성북동 유력가 집안의 약혼녀가 되어 있었다. 강태일의 아버지 강문태는 신우건설의 창립자였고, 그의 맞아들인 태일은 스탠퍼드 MBA를 마치고 귀국한 뒤 전략기획실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수도권 재건축 사업을 기반으로 굳건한 실적을 쌓아온 이 중견 건설사는 업계에서도 ‘묵직한 실속형’ 회사로 평가받았다.


-성북동의 컬렉터라…. 이제 신분 상승 사다리에 올라타신 건가요?


언젠가 친구 제이가, 비아냥조로 서윤에게 던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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