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서울의 서쪽 끝, 방화동에는 '옥수탕'이라는 오래된 목욕탕이 있다. 옥수탕 골목 안쪽 2층 양옥집에서 서윤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늦은 밤, 목욕탕 간판 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골목은 적막했다. 서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거실에서 야구 중계를 작은 소리로 틀어놓은 채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갤러리 일이 좀 많았어요.
-너무 열심히 살지 마.
-아버지도 참…
-내가 살아 보니, 인생이 너무 짧더라.
-엄마는요?
-방에서 주무시지. 너, 이리 좀 와 봐라.
아버지는 소파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오늘따라 아버지의 눈가에는 시름이 더욱 깊어 보였다. 누구에게나 한때 뜨거운 청춘과 자유를 갈망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젊은 날, 아버지는 일본행 밀항선을 타다 붙잡힌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결혼 이후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중학교 교사로 성실한 삶을 살아왔고, 단 한 번도 다른 길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 말년에 이른 아버지의 머리 위에는 어느새 세월의 흰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내일 시간 좀 있니?
-왜요?
-갤러리 쉬는 날이잖아. 횡계에 좀 다녀올래?
강원도 횡계에는 아버지 소유의 작은 별장이 하나 있었다. 식구들이 가끔 내려가 머물던 그 집은 얼마 전부터 지붕 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낡은 보일러도 함께 새것으로 교체했다고 했다.
-김 씨 할아버지 아니었으면 온 집안이 물바다 되고, 곰팡이 피고 난리가 났을 거야. 고맙게도 설비 업체도 그분이 소개해 줬는데, 어째 연락이 안 되네.
-전화를 안 받으세요?
-번호가 바뀐 건지, 통 받질 않으셔.
김 씨 할아버지는 근처에 혼자 사는 이웃 어르신으로, 틈틈이 별장에 들러 집 주변을 살펴주곤 했다. 젊은 시절, 밀짚모자에 검은 고무장화를 신은 그는 산골 촌부에게서는 보기 힘든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생전에 큰할머니와 그의 부인이 서로 오가며 반찬도 나누고 허물없이 지냈지만,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는 김 씨 할아버지만 옛집에 남아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닐까요?
-글쎄다. 서울에서 큰 아드님이 와서 모셔갔나?
-지금 연세에 혼자 지내시는 건 무리잖아요.
-그렇지. 때가 되면 자식들 곁이 편하지.
-나, 시집가면... 아빠는 어쩌려고.
-그런 말 마라. 늙어가는 딸을 언제까지 어깨에 이고 지고 살아야 한단 말이냐?
-피이…
-아무튼 내일 네가 가서 지붕이랑 보일러가 제대로 됐는지 살펴보고, 공사대금도 치르고 와야겠다.
-오빠는 어디 갔어요?
-철재? 한참 얼굴도 못 봤어. 또 무슨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지….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괜히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서윤은 잠시 침묵했다. 오늘 최 관장이 명명희 화백에 관해 당부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관장은 당장 내일부터 쉬라고 했지만, 휴가는 수요일부터였다. 화요일은 원래 직원들에게 주어진 정식 휴일이었다. 아무래도 짬을 내어 아버지 부탁을 먼저 들어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루 정도 횡계에 다녀온다고 해서 관장이 부탁한 일에 차질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알았어요. 제가 내일 갔다 올게요.
-미안해, 딸. 휴일인데 쉬지도 못하게 해서.
-뭘요. 잠깐 바람도 쐬고 좋죠. 봄이잖아요.
-그렇지. 벌써 봄이네. 이러다 금세 여름 가고, 가을 가고 그러겠지…
아버지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횡계 별장은 아버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큰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홀로 살던 집으로, 아버지는 그 집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간직해 왔다.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자란 아버지는 어린 시절 친할아버지의 형수였던 큰할머니 댁으로 보내져,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그분의 보살핌 속에서 지냈다. 긴 세월 외롭게 살아온 큰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그리고 연민을 품고 있던 아버지는 그 집을 별장처럼 고쳐 지금까지 손수 가꾸어 오셨다.
-아버지, 정말로 은퇴 후에 거기 가서 살 거예요?
-그럼. 거긴 내 고향 같은 곳이지. 사람들도 연어처럼, 죽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야.
-그 집에서 태어나신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난 이제 거기밖에 없어.
아버지는 먼 기억의 뒤안길을 더듬듯 잠시 시선을 떨군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향으로의 회귀.
그 말이 품은 서늘한 쓸쓸함이 어쩐지 서윤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며 욕실에서 이를 닦는 동안, 어두운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 한 마리가 문득 떠올랐다. 돌아갈 곳을 향해 묵묵히 헤엄치는, 생의 마지막 온기. 그 모습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았다.
그날 밤, 어린 시절부터 되풀이되던 익숙하면서도 낯선 악몽이 다시 서윤을 찾아왔다.
사방은 짙은 어둠에 잠긴 물속이었다. 거센 물살과 뒤엉킨 해초가 시야를 가렸고, 귀청을 울리는 물소리만이 사방에서 밀려왔다. 두 팔을 아무리 휘저어도 붙잡을 것은 없었고, 발끝은 닿을 곳 없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녀의 몸은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순간, 차갑고 억센 무언가가 발목을 움켜쥐었다. 끌어올리려는 것인지,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기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서윤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다. 눈을 뜬 뒤에도 어둠 속 물살과 발목을 감싸던 감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의식의 잔물결 너머로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심연을 떠도는 외로운 물고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