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횡계 읍내는 도로포장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거리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라 읍내를 뿌옇게 뒤덮었다. 그 위로 스며든 초봄 햇살이 풍경 전체를 엷은 장막처럼 감쌌다. 중앙로를 따라 트럭과 롤러가 쉴 새 없이 오가며 땅속까지 울릴 만큼 굉음을 토해냈다.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은 낮은 건물과 오래된 상가들 사이로 슈퍼마켓과 스키 숍, 공인중개사 사무소, 식당들의 간판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


이 동네는 겨울 한 철이 성수기였다. 12월 삭풍이 불기 시작하면 용평 스키장을 찾는 사람들로 이 좁은 거리도 제법 북적거렸다. 스키장은 사월까지 문을 열었지만, 그해 삼월은 유난히 따뜻했다. 슬로프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도 일찌감치 뜸해졌다. 도로에는 외지인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공사장 트럭들만 먼지를 풀풀 날리며 오갈 뿐이었다.


이튿날, 도준은 오대산 등반을 마친 뒤 횡계로 돌아왔다.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몸의 감각을 다듬고 근력 훈련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거의 다 보낸 것이다. 그의 몸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절어 있었고, 어깨에는 쇠뭉치를 올려놓은 듯 묵직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다리 근육은 은근히 잡아당기듯 뻐근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먼저 몸에 밴 냄새를 씻어내고 싶었다.


중앙로 근처 사우나탕에는 대낮부터 술기운을 씻어내려 온 남자들이 몇 명 눈에 띄었다. 간단히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도준은 젖은 머리를 털며 느긋하게 거리를 걸었다. 늘 단골로 다니던 납작식당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소박한 분위기의 함박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빛바랜 간판 아래 황태국밥과 황태 고추장구이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탓인지, 가게 안은 손님 한 명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어서 오세요. 저리로 앉으시죠.


부엌에서 나온 주인 남자가 창가 옆 빈자리를 가리켰다.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고, 좌식 테이블이 놓인 방으로 들어섰다.


흰색 모조지를 깔아놓은 밥상 앞에 앉으려던 순간,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는 무릎 주변을 마사지하듯 손으로 꾹꾹 누르며, 묵직한 다리를 천천히 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이 시큰거리는 관절통은 이미 몸에 밴 익숙한 통증이었다. 겨울마다 빠지지 않고 즐겨 왔던 모굴 스키의 흔적일 터였다. 좁고 울퉁불퉁한 슬로프를 내달리던 짜릿한 쾌감이, 그만큼 무릎 속 관절과 근육을 서서히 갉아낸 것이다.


재작년 함께 스키장에 왔던 정형외과 의사 친구가 그의 무릎 통증을 지켜보며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야, 신은 공평해. 슬로프 내려오면서 평생 쓸 무릎 다 썼잖아. 재밌게 놀았으면 아픈 것도 감수해야지. 버틸 때까지 버텨. 나중엔 인공 관절 넣어야 할지도 몰라.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도준의 귀에는 전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부실한 무릎으로, 저 검푸른 마의 벽처럼 솟은 로체 남벽에 다시 설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첫 시도에서 이미 8,200미터까지 올랐으니, 이번엔 정상의 마지막 구간까지 닿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삶이란 결국 모든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형상이지 않은가. 그 끝을 보기 전까진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다. 도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불길한 생각을 조용히 밀어냈다.

주인 남자가 다가와 물컵을 밥상에 내려놓았다.


-뭘 드시겠어요?

-황태국밥 하나 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부엌에서 식당 아줌마들이 도란도란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겨울엔 눈이 안 와서 다들 재미 못 봤잖아요.

-장사 안돼 큰일에요. 이러다 문 닫는 건 아닌지.

-부정적인 생각은 몸에 안 좋아요. 그럴수록 더 힘들어지지 않겠어요?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도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정적인 생각은 정신 건강에도 해롭고말고.’


스키장도, 날씨도, 밥장사도 이들에게는 모두 소중한 삶의 일부였다.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짧은 여유. 식당가 골목의 잔잔한 소음과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그는 잠시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았다.

 

얼마 후 식당을 나온 그는 차를 골목 어귀에 세워둔 채 큰길가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한 달 가까이 고모부 집에 머무는 동안, 슈퍼 주인과도 어느새 낯이 익었다.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른걸레로 당면 봉지를 하나하나 닦고 있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이구…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좀 어떠세요?

-젠장, 사방 천지가 먼지투성이라 숨도 못 쉬겠어요.

-공사 때문에 힘드시겠어요.

-누가 아니라오. 좀 보시구려. 물건들이 죄다 이 모양이니, 이렇게 매일 닦아줘야 한다니까.

-횡계가 좋아지면, 스키 손님도 늘고 좋잖아요.

-그렇긴 하죠. 나쁜 게 있으면 좋은 것도 있고. 그래야 세상만사 서로 퉁 치면서 살아가지.


가게 안은 시골 동네치고는 제법 큰 규모였다. 각종 음료수와 식료품은 물론, 크고 작은 광주리와 둥근 밥상 같은 생활용품까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공사판 먼지 속에서도 주인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매대마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도준은 생수와 캔맥주, 짭짤한 안줏거리 몇 가지를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


-오늘도 산 다녀오는 길이요?

-네.

-아이고, 부지런도 하시지. 그럼, 또 봅시다.

-안녕히 계세요.


가게 문을 나서자, 공사판 먼지가 뿌연 연기처럼 퍼지며 시야를 가렸다. 도준은 두어 번 허공을 휘저은 뒤, 눈을 가늘게 뜬 채 맞은편 공중전화 부스로 걸어갔다.


그는 웬만한 전화번호는 거의 다 외우는 편이었다. 머리가 좋아서라기보다 숫자에 집착하는 성격 탓이었다. 머릿속에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두는 습관은 전문 산악인으로서 생사를 가르는 순간마다 큰 도움이 되었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 필요한 정보를 직관적으로 꺼내 쓸 수 있는 능력이 산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그런 방식을 신체적 반응처럼 익힐 때까지 오래도록 반복해 왔다.


도준은 수화기를 집어 들며 청소 용역회사를 운영하는 최윤 선배의 사무실 번호를 떠올렸다. 동전을 넣고 숫자 버튼을 누르자, 곧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사장님 조금 전까지 여기 계셨는데... 잠깐 나가셨나 봐요. 어디시라고 전해드릴까요?

-저는 도준이라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러시겠어요? 그럼 5분쯤 후에 다시 전화 부탁드릴게요.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자전거를 탄 여자가 나타났다. 노란색 바람막이를 입은 여자는 전화 부스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MTB 자전거가 빠르게 전화 부스를 스쳐 지나갔다. 흙먼지가 일렁이는 도로 위로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며,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도준은 문을 밀치고 나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잠시 서 있었다.


어제 고모부 집 마당에서 본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장면 위로 22년 전 기억 속 어린 소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인연의 시곗바늘이, 어느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듯했다.


‘또 만나는군, 꼬마 아가씨.’


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래된 시간의 틈 사이로, 무엇인가가 다시 깨어나는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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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겁도 없이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얕은 물살이 발목을 감싸며 서늘한 기운이 밀려왔다. 소녀는 잠깐 멈춰 서는가 싶더니, 신발을 붙잡으려는 듯 다시 발을 내디뎠다.


-안돼! 위험해!


도준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소녀는 어느새 물살이 빠른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물이 순식간에 허벅지까지 차올랐고, 소녀는 중심을 잃고 휘청대다가 그대로 물속에 휩쓸렸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계곡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퍼져나갔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작은 몸짓이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악몽이 불쑥 되살아났다.


칠흑 같은 어둠, 도무지 아침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밤. 차 안에 갇힌 채 앞좌석에서 들려오던 부모님의 희미한 신음.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숨 막히는 침묵. 그날, 그는 더 이상 손을 뻗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내가 구할 거야.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아.’


도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친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갈게!


사납게 꿈틀거리는 계곡물이 허벅지를 휘감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이미 거센 물살에 휩쓸린 채 몸부림치다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도준은 미친 듯 팔을 휘저으며 급류를 헤집었다.


-꼬마야, 어딨니? 대답해! 조금만 버텨!


그것은 찰나였으나, 그의 의식 속에는 영원처럼 각인된 한순간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소녀의 몸을 물살은 쉬이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거친 물결 속에서 간신히 손끝에 아이의 살결이 스치는 순간, 그는 단숨에 그 여린 몸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사건이 났던 그날 밤에는 부모님을 붙잡을 수 없었다. 전복된 차 안, 어둠의 간격은 너무 멀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 생은 이미 저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두 분의 신음은 끝내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생명의 온기를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얕은 물가에 닿은 그는 소녀를 널찍한 바위 위에 눕혔다. 소녀는 축 늘어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노란 원피스 밖으로 가냘픈 팔다리가 드러났고, 창백한 이마에는 젖은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있었다. 작은 얼굴은 눈을 꼭 감은 채 잠든 인형처럼 고요했다. 도준은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을 내려주고, 떨리는 손으로 소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숨소리는 점점 옅어졌고, 호흡은 금방이라도 멎을 듯 위태로웠다.


그 순간, 보이스카우트 캠프에서 배운 구조법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지도 교사는 아이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입을 맞대고,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누른다. 실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도준은 단호한 손길로 여린 가슴을 꾹꾹 눌렀다. 이어 소녀의 차가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고 숨을 불어넣었다. 몇 초가 끝이 없는 시간처럼 아득했다. 그러다 문득 소녀의 가슴이 미세하게 들썩이더니, 거친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냈다.


-괜찮아. 안심해. 괜찮아.


도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특해. 잘했어. 이제 다 괜찮아.


소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의 티셔츠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힘에,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어둠 끝에서 처음 만난 따뜻한 체온에 기대듯, 소녀는 다시 잠이 들었다. 도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작고 연약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구했어.’


뜨겁게 달궈진 바위 위에서 소녀를 내려다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작은 용기가 단지 소녀만을 살려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 밤, 점점 식어 가던 두 분의 숨결. 어떻게든 붙잡으려 허공을 더듬던 어린 손. 자신을 옭아매던 어둠 속에서, 그는 분명 한 발짝 벗어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다는 안도감이, 오래전부터 목말라하던 어떤 감각처럼 다가왔다. 잃어버린 온기. 끝내 닿지 못했던 손. 내내 갈망해 온 것들이었다.


‘내가 아이를 구한 게 아니라, 오늘은 나도 함께 살아난 거야.’


그런 생각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아주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윤아! 서윤아! 어디 있니?


도준은 소녀를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네 이름이 서윤이로구나. 만나서 반가웠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바위 위에 남겨두고 소나무 그늘 속으로 물러났다. 그의 발자국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솔잎을 흔들었다. 잠시 후,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군가 소녀를 안아 들며 외쳤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서윤아.


고모부 내외와 친하게 지내던 윗집 아줌마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도준은 나무 그림자 속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잘 가라, 꼬마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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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1997년 가을, 도준이 남긴 등반일지 한 귀퉁이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횡계에 있는 고모부 댁 마당에서였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 여자가 마당에 서 있었다. 나는 온몸이 땀에 절어 엉망인 차림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묘하게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선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예감 같은 것이었다.


살면서 여자로 인해 이렇게 가슴이 뛰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 순간, 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몸이 굳어졌다. 나는 늘 죽음의 바깥에서 살아온 자였다. 산의 벼랑 끝에서, 눈보라 속에서, 매번 ‘살아남은 이유’를 묻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본 순간, 처음으로 ‘살아 있어도 좋다’는 감정이 스쳤다. 생존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응답처럼.


그때 내가 횡계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땠을까. 여전히 서로 다른 세계에 머물며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인연이었다. 기억에서 사라져도, 멀리 흩어져 있어도, 결국 다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으니까.


조금 전에, 우리의 인연을 설명할 만한 비유 하나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걸어온 모든 길을 실로 묶어 이어 놓는다면, 나는 아마 다른 이들보다 훨씬 긴 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 실의 길이를 늘여 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조그마한 실타래의 일상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녀의 씨실과 나의 날실이 오래전에 한 번 엇갈린 적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어린 꼬마 아가씨는 이제 어여쁘고 성숙한 여자로 자라 있었다. 그녀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내가 그녀를 구했던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했다. 그녀를 구했던 순간, 사실은 나 역시 그녀에게 구원받고 있었다는 것을.


인생에서 중요한 건 실의 길이나 두께가 아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 긴 여정은 결국 공허와 외로움 속을 떠도는 덧없는 여로일 뿐이다. 나는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 죽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스물두 해 전 여름, 열세 살 도준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바다에 잠겨 있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날, 그의 세계는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어린 그에게 횡계의 고모만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고모는 막내아들처럼 살뜰히 그를 보살피며 따스한 식사와 부드러운 말을 건넸지만, 도준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절망이 쌓아 올린 성벽이었다.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가두는 장막이었다. 소년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길 위에 홀로 선 작은 그림자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여름방학이 다가오던 7월의 어느 날, 도준은 학교를 빼먹고 집 근처 용천 계곡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떠올리기에 그보다 더 나은 장소는 없었다. 산이었다. 그곳에 가면 아직 아버지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올랐던 푸른 능선. 땀에 젖은 목덜미를 닦아내며 건네던 시원한 물 한 모금, 정상에서 내려다보던 끝없는 풍경. 아버지 몸에서 번져 오던 그 냄새와 땀의 열기, 단조롭지만 어딘가 따스했던 그 목소리. 그렇게 눈을 감으면, 손끝에 스며드는 듯 아버지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도준, 너는 발이 빠르구나. 아버지를 곧 따라잡겠어.


너그러운 미소로 그를 격려하던 아버지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이제 산은 더 이상 따뜻한 위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 한편에 보듬어 두고 싶은 추억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한 은신처에 가까웠다. 산자락에 홀로 앉아 아픈 시간의 장면들을 더듬다 보면, 그 고통이 서서히 뻗어 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심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모든 순간을 삼켜버릴 듯했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잔인한 물결에 몸을 내맡겼다.


‘그래. 나를 가져가거라.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해 한여름의 햇살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강렬했다. 나무 그늘조차 뜨거운 기운을 피하지 못하고, 흐릿한 열기로 공기마저 일렁였다. 도준은 녹아내릴 듯한 무력감 속에 스스로를 방치한 채, 개울가 근처 널찍한 바위 위에 무심히 걸터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의식의 저변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 여기 있다!


고개를 돌리자, 개울 건너편에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어린 소녀가 물가를 따라 가볍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면 가까이 날아오르는 나비를 쫓아, 한 걸음 한 걸음 빛 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개울물은 투명한 보석처럼 반짝였고, 소녀는 물비늘 사이를 부유하는 초롱한 그림자 같았다. 도준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릎 위에 무기력하게 얹힌 자신의 손등. 아무런 의욕도 없이 축 늘어진 채, 거기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소녀는 자신과 너무도 먼 세계의 사람이었다. 환한 빛살 아래 자유롭게 뛰노는 저 작은 몸짓은, 그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보드랍고 따스한 무엇처럼 느껴졌다. 어린 날의 바람도, 체온도, 품에 안기던 기억조차 비껴간 삶. 소녀는 그에게 꿈의 풍경 같았다. 아니, 꿈조차 꿔보지 못한 세계의 조각이었다.

 

그러나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어, 내 신발!


도준은 그 소리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물가에 벗어놓은 소녀의 분홍신 한 짝이 개울물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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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기억은 수많은 더듬이를 지닌 촉수처럼, 다른 차원과 이어진 은밀한 통로에 닿아 있는 듯하다. 훗날 그녀는 그해 봄날 오후의 풍경을 반복해서 떠올리며,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조금씩 아껴가며 되짚곤 했다.


당시엔 지루한 기다림과 이곳이 남의 집이라는 불편함 외에, 특별한 감정이 뚜렷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 장면도 의식 깊숙이 새겨졌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눈을 감기만 해도 마치 꿈속 장면처럼 그날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오래 접어 두었던 담요를 다시 펼치듯, 뽀얀 실밥 사이사이에 스며 있던 적막과 긴장이 손끝에 만져진다.


익숙한 냄새를 따라 기억의 문이 열리고, 그 감각은 서서히 그녀를 감싸안는다. 김 씨 할아버지가 사는 함석집 뜨락 한편에 서 있던 바싹 마른 감나무 한 그루. 빈집의 정적을 지키며 댓돌 위에 놓여 있던 검정 고무신. 텅 빈 축사 한쪽 흙벽에 걸린 그물 망태기. 반질거리던 낫과 쇠스랑, 그리고 곡괭이들. 깊은 샘에서 물을 퍼 올리던 무쇠 펌프와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 안방 문고리에 비뚤게 걸린 자물통. 서늘한 바람결에 실려 오던, 이름 모를 새소리. 그런 것들이 여러 장의 오래된 스틸 사진처럼 하나씩 의식 위로 떠오른다.


그 장면들이 이토록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그날 마주친 한 사람 때문이다. 남자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와 낡은 사륜구동 랜드로버에서 내렸다. 잠시 멈춰 선 그는 열린 운전석 문에 오른손을 얹은 채, 오래전 말보루 담배 광고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모습으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 순간,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며 그녀의 머릿결이 흩날렸다.


남자는 차 문을 닫고, 서두르지 않는 보폭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역광 속에서 윤곽만 또렷해진 그의 모습은, 현실의 한 장면이라기보다 기억 속에서 다시 조립되는 이미지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시공간의 감각이 서서히 흐려지고, 그가 마침내 대문간을 지나 집 안에 고여 있던 적요를 가르며 가까워졌다. 아주 멀리서부터 걸어와 마침내 그녀 앞에 선 남자. 그가 바로 도준이다.


그녀는 주인이 없는 집 마당에 홀로 서 있었다. 저 먼 경계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뚜벅뚜벅, 느릿하지만 망설임 없는 걸음이었다. 그녀 앞에 멈춰 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가슴께로 번져 왔다.


‘누군데, 나를 저렇게 보고 있는 거지?’


남자는 크고 다부진 체형에, 오랫동안 야외 생활을 해온 사람처럼 햇빛에 짙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무심하게 하나로 묶은 꽁지머리가 조금은 특이하게 보였다. 그밖에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지만, 유독 그의 눈빛이 서윤의 마음을 파고드는 듯했다. 오래 쌓인 피로와 깊이 가라앉은 사념들이 겹쳐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친절도, 경계도 아닌,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여백이 그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여백이 그녀의 심장을 살짝 조여 왔다. 몸은 먼저 반응하듯 어깨가 움츠러졌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이해하려는 마음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저, 어떻게 오셨죠?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김 씨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고 말했다.


-저는 저 위쪽 집에 살고 있어요.

-아, 그러시군요.

-아무도 안 계시는데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해요.

-아, 괜찮습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는데, 그 안에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여운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번져 오는 그 묘한 감정에 마음이 흔들렸다. 남자의 목에는 작은 통 모양의 은색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햇빛에 오래 노출된 피부와 세월 속에서 다져진 몸은, 그가 일상에 쉽게 얽매이지 않는 사람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어쩐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 남자의 정체가 문득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김 씨 할아버지의 처조카라고 소개했다. 김 씨 할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고 지금은 서울 큰형님 댁에서 요양 중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젠 많이 나아지셨어요.

-어머나, 큰일 날 뻔했네요. 아, 참… 이거.


그녀는 손에 든 선물 가방을 들어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바로 건네기엔 난처했고, 다시 들고 돌아가기에도 망설여졌다. 결국 가방을 마루 한쪽에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가 할아버지 드리라고 보내신 거예요. 비타민인데, 전해주시겠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구라고 전하면 될까요?

-저는 김순내 할머니 손녀예요. 저희 큰할머니와 할아버지 내외분은 오랫동안 각별하게 지내셨어요.

-그럼 혹시… 저 위쪽에 있는, 막다른 길 끝 집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거기 파란 지붕 집이요.


그 순간,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그림자가 스쳤다.


-하하… 이게 우연은… 그러니까,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말끝을 흐리는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운명…?’


서윤의 내면은 한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처음 만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운명’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낯설었고, 어딘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금기어처럼 불길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 흥미는 순식간에 씻겨 나가고, 대신 날카로운 경계심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의 시선과 말투,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 안에 고요히 가라앉은 적막까지, 모든 것이 문득 위험한 징후처럼 느껴졌다.


-저,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서윤은 한 걸음 물러선 뒤 몸을 돌렸다. 대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심장은 어쩐지 엇박자로 뛰는 듯했다. 등 뒤에서 무언가 잡아당기는 느낌에, 대문간에 이르러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남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서윤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그 집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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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봄 햇살이 은은하게 감도는 연청빛 하늘 아래, 텅 빈 시간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서윤은 작은 종이 가방을 손에 들고 별장을 나섰다. 가방 안에는 아버지가 김 씨 할아버지께 전해 달라며 챙겨주신 종합 비타민과 홍삼 캔디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출입문을 잠그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 일 없으셔야 할 텐데…’


집 앞 돌층계를 내려선 서윤은 산등성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길 양옆에는 파릇한 새싹과 양치류가 돋아 있었고, 이끼 낀 자갈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 산길은 동네 사람들만 다니는 평범한 길이었지만, 산새들의 지저귐과 발밑을 스치는 나뭇잎의 바스락거림이 새봄의 기운을 더욱 싱그럽게 했다.


잠시 오르막을 지나 시냇물을 건너 조금 더 내려서자, 마침내 김 씨 할아버지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담장에 붙은 대문은 빗장이 채워지지 않은 채, 조금 열려 있었다. 손으로 밀자 삐걱— 낮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며 문이 더 벌어졌다. 서윤은 흰색 종이 가방을 가볍게 매만진 뒤 대문턱을 넘었다.


-할아버지, 안에 계세요?


툇마루 앞 댓돌 위에는 검정 고무신 한 켤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비어 있는 곳간과 축사를 차례로 살핀 뒤, 내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방 문고리에 걸린 자물통 역시 채워져 있지 않은 걸 보니, 그리 멀리 나가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여기서 지내시나 보네.


집안 곳곳에 사람 사는 흔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서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중에 다시 올까 망설이다가, 결국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나뭇결이 허옇게 드러난 툇마루에 앉아 침묵 속에 가라앉은 집안을 둘러보자니, 큰할머니가 머물던 그 낡은 기와집의 포근하고 정겨운 풍경이 눈앞을 스쳤다. 집안 어딘가에서 장작불이 탁탁 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반갑게 맞아주시던 큰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숨을 고르며 집안을 살피시던 그분의 목소리, ‘서윤아!’ 지금도 귓가를 스치는 듯 고요한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오래전 시간의 창 너머, 뒤뜰 외양간에서는 코뚜레를 단 황소가 나지막이 음매 울고, 자기 집 울타리를 뛰쳐나온 돼지는 앞마당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푸드덕거리며 서까래를 향해 날아오르던 닭들, 부엌 아궁이에 묻어둔 고구마가 서서히 익어가던 구수한 냄새, 펌프질로 길어 올리던 찬물의 맑고 청량한 기운까지—모든 풍경이 큰할머니의 옛집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기억 속에서 서윤은 아늑하고 풍성했던 유년의 뜨락을 거닐며,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추억의 온기를 느꼈다.


시간은 숨을 죽인 채 더디게 흘렀다. 늦은 오후 햇살이 투명한 적막 속으로 내려앉아, 마당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돗가 근처, 맨흙이 드러난 마른 땅 위에는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처마 끝에서 꺾인 해그림자는 장독대를 향해 멈춰 섰다. 그때까지도 김 씨 할아버지는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환한 봄볕을 오래 쐰 탓인지, 몸이 점점 나른해지면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 게 낫겠어.


손바닥으로 하품을 가리며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자동차 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신작로와 맞닿은 언덕 위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차 한 대가, 마침내 대문 밖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서윤은 선물 가방을 챙겨 들고, 잡풀이 드문드문 돋아난 마당으로 내려갔다. 커다란 구형 랜드로버가 집 앞 공터에 천천히 멈춰 섰다. 험한 산길과 오프로드를 견뎌온 차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찻길은 여기서 끝이 났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외길이었다. 왜 저 차는 여기까지 온 걸까. 길을 잘못 든 걸까, 아니면 김 씨 할아버지가 외출했다가 누군가와 함께 돌아온 걸까. 그녀는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랜드로버를 바라보았지만, 전면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으로 차 안은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운전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얼핏 보기에도 단단하게 균형 잡힌 체격이었다. 그는 잠시 차 문에 손을 얹은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눈빛은 마치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서윤은 불안과 호기심이 엇갈린 마음으로 남자의 표정과 몸짓을 살폈다. 이 외딴 길 끝자락까지 일부러 차를 몰고 왔다면, 그에게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씨 할아버지와 관련된 상황 외에, 다른 가능성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주인 없는 집에 이렇게 허락도 없이 혼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왠지 더 움츠러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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