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내가 왜 이런 말을 한 거야.’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차라리 울어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해질까. 하지만 눈물 대신 가슴 속 허무만이 더욱 깊어졌다. 아버지는 그제야 별 뜻 없이 맞장구친 말이 서윤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깨닫고, 이번에는 큰 목소리로 오빠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야, 이놈아. 사업한다고 그렇게 설치더니 내 퇴직금까지 절반이나 말아먹고, 이제 와서 어디에 또 숟가락을 얹겠다는 거냐? 정신 나간 놈 같으니라고!

-아, 좀… 그래서 서로 돕고 살자는 얘기잖아요!


오빠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자, 안방 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아니, 이 밤중에 왜들 이래? 그리고 철재, 넌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나타나서 또 집안을 시끄럽게 만드는 거야? 응?


엄마는 눈을 부라리며 오빠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쳤다.

 

-아, 죄송해요! 근데 엄마 손은 왜 이렇게 매운 거야?


오빠는 과장스레 아픈 시늉을 하다가, 흠, 흠, 짧게 헛기침을 하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참, 아버지는 내년에 정년 퇴임하면 정말로 횡계에 가서 사실 생각이세요?


2층 층계로 향하던 서윤은 ‘횡계’라는 말에 더는 발을 떼지 못했다. 공중전화 숫자판을 하나씩 눌러가던 자신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차마 꺼내지도 못했고, 끝내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던 말들. 그 순간의 침묵이 되살아나듯, 목이 뜨겁게 메었다.


-나한테 횡계는 고향 같은 곳이야.

-그렇죠. 고향이나 진배없죠. 큰할머니 산소도 거기 있잖아요.


오빠가 공손히 두 손으로 아버지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문제는 네 엄마야. 엄마는 서울 생활이 좋단다.


아버지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슬쩍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서윤은 한 손으로 벽을 더듬듯 짚으며, 등을 대고 천천히 앉았다. 제이 앞에서조차 입에 올리지 못했던 그 이름을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떨궜다.


-당신이 가면, 나는 뭐 별 수 있나… 근데, 나이 들어서 횡계에 가서 뭘 하려고요? 여긴 병원도 가깝고, 교통도 편리하고, 교회 친구들도 다 여기 있는데…


엄마는 겉으로는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는 듯 말했지만, 불편한 시골 생활을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참에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가 횡계로 가더라도 자신은 서울에 남을 수 있다는 뜻을 에둘러 밝혀두려는 눈치였다.


그때 올케가 서윤에게 따뜻한 인삼차 한 잔을 가져다주고는 옆에 앉았다.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지요. 별장도 계속 비워두면 안 좋아요. 그냥 방치하느니, 이참에 아예 팔아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김 씨 할아버지도 안 계시는데, 지난번처럼 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해요?

-그동안 김 씨 할아버지께 신세를 너무 많이 진 것 같아요. 거의 공짜로 관리 다 해주셨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김 씨 할아버지, 건강은 어떠시니? 연락은 해 봤어?


아버지가 잔을 내려놓으며 서윤을 바라보았다.


-수술 받으시고 지금은 서울 큰아들 댁에 계신다는데, 제가 연락처를 알 방도가 있어야죠.


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집 큰아들 전화번호를 어디 적어뒀을 텐데… 생각이 나질 않네.


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동네에 비상 연락망 같은 게 있다고 들었어요. 이장님께 전화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올케의 말에 서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건 마을의 독거노인들을 위한 비상 연락망이었지만, 서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김 씨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알게 된다면, 어쩌면 그걸 통해 도준과 다시 연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하지만 간절한 희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꾸물거렸다.


‘그에게 전화를 걸자.’


실제로 전화를 걸기까지 몇 번이나 망설이며 스스로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와 통화가 되는 순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빠는 여전히 태일과의 결혼 날짜를 잡으라며 재촉했지만, 서윤의 머릿속은 온통 도준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로 들끓었다.


‘다시 연락하면, 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생각만으로도 열에 들뜬 듯 가슴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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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지하철역에서 집까지는 10분 거리였다. 하루의 끝자락에, 인적 드문 어두운 길을 지나 초등학교 앞 차도를 건넌 뒤, 옥수탕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연립주택과 단독 주택이 늘어선 골목에 희미한 가로등 불빛 하나가 조는 듯 서 있었다. 어느 집 담장 아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뒤적이다가 그녀의 발소리에 놀라 급히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열쇠로 대문을 열고 집 마당에 들어서자, 거실의 흐린 유리창 너머로 올케가 분주히 오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평소 같으면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인데, 오늘따라 집 안에는 어수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윤이 거실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이미 술에 얼큰히 취해 있었고, 오빠는 벌겋게 달아오른 낯빛으로 무언가 열변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오빠가 부모님 집에 다시 나타난 건 거의 두 달 만이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사라진 뒤,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새 얼굴은 꺼칠하니 겉늙은 듯 보였고, 광대뼈가 도드라질 만큼 두 볼은 홀쭉했다.


-아가씨, 이제 오세요? 저녁은요?


올케가 두툼하게 부친 녹두전 한 접시를 밥상에 올려놓으며 짧게 눈길을 던졌다. 평온한 말투와 달리, 축 처진 어깨에는 온종일 가사 일에 시달린 피로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벌써 먹었겠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오빠는 손바닥으로 술잔을 굴리며, 서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경계하듯 탐색하는 태도에서 특유의 허세가 느껴졌다. 실내에는 기름내와 꽁치구이 냄새가 가득했지만, 그런 온기만으로는 가족 사이의 냉랭함을 덜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머니는 안방에 계세요. 오늘도 하루 종일 선호랑 씨름하시느라 많이 고단하신가 봐요.


올케가 담담하게 말했다. 선호는 두 살배기, 오빠의 아들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내일 출근할 사람이 이렇게 늦게 다니면 어떻게 해. 데이트하다가 온 거야?


오빠는 무심한 척했으나, 속내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의 힐끔거리는 눈빛에는 신우건설에 대한 기대와 미련이 담겨 있었다. 혼맥이라는 가느다란 연줄에 매달려 그 집안에서 흘러나올 작은 콩고물이라도 바라는 절박한 심정. 그렇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내 핏줄 앞에서 차마 불편한 내색을 보일 수는 없었다. 부모님에게 하나뿐인 아들이자, 그녀에게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친오빠가 아닌가.


-아니. 오늘은 대학 동창들 좀 만났어. 오빠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서윤은 애써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나야 바쁘게 잘 지냈지. 지방에서 사업하는 친구 일도 좀 도와주고.


오빠의 얼굴에는 어색한 웃음이 번졌고, 올케는 그런 오빠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신 없는 동안 아가씨가 대신 횡계 다녀왔어요. 그런 일은 남자들이 나서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쳇! 집안일에 남자 여자 일이 따로 있나?


오빠는 더는 말대꾸를 이어가지 않은 채 술잔을 기울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굳어진 입매에는 언짢은 기색이 스쳤다.


‘횡계’


그 지명이 다시금 서윤의 머릿속에서 둥근 파문을 일으키더니, 곧이어 몇 개의 장면이 작은 스틸사진처럼 연달아 떠올랐다. 랜드로버가 멈춰 선 숲길. 김 씨 할아버지네 집 마당. 펑크 난 자전거 타이어. 별장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초록색 스프링 노트와 코끼리 머그잔. 그 모든 순간의 끝에서 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착제가 잘 굳었나 보네요. 당분간 자전거 타는 데 문제없겠어요.


서윤은 가늘게 숨을 삼킨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실 한쪽에 켜진 TV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볼륨이 낮춰져 있고, 재방송 중인 축구 경기가 무심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관중의 함성도 해설자의 목소리도 사라진 화면은 거실의 침묵과 섞여 한층 쓸쓸하게 느껴졌다. 텔레비전 속 무음의 스포츠 중계는 마치 수많은 사람이 무대 위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제자리만 맴도는 무언극을 떠올리게 했다. 서윤은 문득 그 장면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목격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강태일 실장이랑은 요즘 어때? 잘 지내는 거지?


그녀는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다 오빠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뭐, 그냥…

-그냥은 아니지. 너희 약혼한 지도 꽤 됐잖아.

-왜 그래 또?

-결혼식 날짜는 언제쯤 잡을 건데? 사람 마음은 갈대 같은 거야. 특히 남자는 더 그래. 태일이한테 눈독 들이는 여자들도 꽤 많을걸.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여기저기서 쿡쿡 찔러댈 거야. 그러니 너 조심해.


서윤은 오빠를 흘겨보았다. 만날 때마다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속셈이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었다.


오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층 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막말로, 빨리 시집가서 부잣집 사모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리면 좋잖아. 나도 잘사는 동생 덕 좀 보고 살아야지.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뭐… 서로 돕고 사는 게 좋긴 하지.


아버지까지 거들고 나서자, 서윤은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북받쳐 오르는 걸 느꼈다.


-식구들 도와주려 나더러 빨리 결혼하라는 거야? 내가 무슨 심청이야?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서윤도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귓가에 울린 그 낯선 어조는 단순한 반박이 아니라, 오래 눌러 왔던 원망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처럼 들렸다. 실내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는 듯했다. 서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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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전철역에서 나오자, 편의점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한 남자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대방과의 대화가 즐거운 듯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마법의 환영처럼 공중전화 부스 속 남자의 모습 위로 도준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


–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간 더 고모부 집에서 지낼 건데, 그 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고모부를 대신해 제가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도준이 초록색 노트 위에 적어 준 10자리 숫자는 결국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날의 대화와 그 목소리는 여전히 서윤의 마음 깊이 남아 있었다.


-우리 아직 통성명도 못 했군요. 제 이름은 도준입니다.


다시 횡계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몇 번이나 당장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과 싸워왔는지 모른다. 거리 위를 지나는 시외버스만 보아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을 붙들어 둔 건 현실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이었다. 


자신에게 이미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처신할 수 없다는 자각.


인간 사회는 관계와 책무로 서로를 얽매어 왔다. 서로를 구속하는 일이 구원이라 믿도록 만들고, 감정의 충동보다 일상의 성실함이 우선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미 잘 디자인된 미래의 청사진을 감히 구겨버릴 만큼 어리석거나 용감하지 않았다. 염치를 모르거나, 배은망덕한 여자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배운 대로 늘 성심성의껏 살아왔다.


그녀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그를 만나게 된다면, 무언가 중대한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선택 또한 예정된 궤도 안에 갇힌 건 아닐까.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을 집어 들든, 어떤 운명을 받아들이든, 정해진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 앞에서 그녀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언젠가 다다를 미로의 끝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과는 같을지도 모른다는 체념이 스쳐갔다. 여기 이대로 멈춰 서는 것, 그것만이 상처를 남기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가슴에 단단한 빗장을 질렀다. 그러나 때론 감정의 사슬이 살짝 느슨해지는 것만 같았다. 편의점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남자를 본 순간, 가슴속에 눌러 두었던 것들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외면해 왔던 그리움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맹세가 한순간 연기처럼 허무하게 흩어졌다.


정수리를 뜨겁게 내리쬐는 유혹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횡계로 가자! 그와 낚시도 하고, 쾌락의 꿀을 빠는 벌처럼 달콤한 추억들을 맘껏 쌓아 올리자. 인생은 결국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일회성의 무심한 꿈과 같고, 지나간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찬란했으나 허망한 순간들에 불과하다. 미래의 내 삶을 함부로 깨뜨려버릴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이고, 내 선택을 납작하게 짓눌러버릴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뿐이 아닌가.


젊은 남자는 전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불이 꺼진 텅 빈 전화부스는 어두운 거리에 홀로 떠 있는 난파선처럼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주머니 속 동전 두 개를 꺼내 조심스럽게 투입구에 넣었다.


신호음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전화기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메신저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어 있었다. 횡계 별장에서 도준이 적어 준 열 자리 번호는 이미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지워졌지만, 그날의 다정했던 온기를 되살리듯 0부터 9까지 숫자판을 하나씩 눌러갔다.


첫 번째 벨이 울리고, 곧 차갑고 무심한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신호음이 반복될수록, 그녀는 얼어붙은 겨울 새벽의 그림자처럼 고립된 자신을 느꼈다. 부스 안을 맴돌던 소리는 이내 사라졌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그녀는 고요한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바로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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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홍대 밤거리는 빛의 향연을 쏟아내고 있었다. 수많은 상점과 포장마차, 길거리 가판대 사이로 밤의 풍경이 소란스러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교차로를 지난 후 피카소거리 아래쪽으로 한참을 걸어갔다.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오밀조밀한 가게와 식당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가스등이 켜진 핫도그 가게와 액세서리 숍, 모자 전문점을 지나 미술용품을 파는 호미 화방 근처에 다다르자, 컨트리 스타일로 꾸며진 퓨전 식당이 눈길을 끌었다. 가게 앞에서 ‘오늘의 특별 메뉴’를 칠판에 적고 있던 여자 종업원이 환한 미소로 반기며 칸막이가 있는 테이블로 그녀들을 안내했다.


-아, 배고파 죽겠네!


제이는 메뉴판을 빠르게 훑은 뒤, 해물 샤브샤브 2인분과 생맥주 2.5리터를 주문했다. 맥주가 너무 많지 않나 싶었지만 서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늦은 밤까지 교정쇄와 씨름한 제이에게, 이 정도 도파민 충전은 필요했다.


잠시 후, 종업원이 무쇠 냄비를 들고 와 테이블 중앙에 놓인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맑은 육수가 보글보글 끓기를 기다리며, 제이는 능숙하게 맥주잔 두 개를 가득 채웠다.


-이걸로 나 좀 쉬게 해줘. 아니면 네 책임이니까.


말끝에 얹힌 장난기가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온기를 퍼뜨렸다.


-덕분에!

-건배!


두 개의 맥주잔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하얀 거품이 잔 위로 넘실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하루 종일 쌓인 피로와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종업원이 쌈 채소와 고기를 담은 음식 카트를 밀고 오더니, 테이블 위에 빈 접시와 여러 양념 소스를 놓아주었다. 그녀들은 뜨거운 육수에 살짝 담갔다 건져 낸 느타리버섯부터 먹기 시작했다.


-요즘 일이 고됐던 모양이야. 얼굴색이 안 좋아.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 괜찮아. 한강에서 자전거 좀 타느라 얼굴이 그을렸어.

-태일 씨가 잔소리 안 해? 그 남자 스타일은 너 얼굴 타는 거 안 좋아할 텐데.

-내 얼굴이야. 내 얼굴 내가 태우는데, 뭐가 어때서?

-어머, 둘이 싸웠나? 오늘 좀 예민한걸.

-내가? 예민해? 왜?


그 순간, 한 남자의 목소리가 기억의 배경음처럼 귓가를 스쳤다.


-우리 내일 낚시하러 갈래요? 반나절이면 충분해요.


흡.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온 세상이 전혀 다른 빛깔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태일과 함께하는 시간은 늘 가슴이 무거웠다. 숨소리조차 끔찍하게 느껴지는 그와는 달리, 도준이 잠시 머물다 간 마음의 빈터에는 미련만이 감돌았다.


도준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서윤은 그와 함께한 순간들이 꿈처럼 흐릿해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와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가슴 한쪽이 저릿저릿해졌다.


제이가 자기 맥주잔으로 서윤의 잔을 툭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냐.


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도 부럽다. 누구는 약혼자도 있고, 곧 결혼해서 천사 같은 아이도 낳을 거잖아.

-나는 울 엄마한테 천사였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집에 가서 물어봐.

-부러우면 너도 결혼해. 너는 왜 이렇게 혼자인데?

-나 남자들한테 관심 없는 거 알잖아. 나는 너를 사랑하잖니.


제이의 입술에 어른거린 씁쓸한 미소에는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사연이 응어리져 있었다. 제이가 처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내비친 건,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날 밤, 서윤은 제이 집에서 시험공부를 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새벽녘, 낯선 손길이 숨을 죽이며 그녀의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 기묘한 꿈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살갗을 스치는 감촉이 너무 또렷해, 얇은 막 너머의 깊은 곳까지 전율처럼 번져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입술이 그녀의 입에 닿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손길의 주인이 제이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자신이 깨어 있다는 사실조차 내색할 수 없었다.


사지가 묶인 듯, 호흡마저 가늘어졌다. 그것은 사춘기 소녀의 의식 너머를 떠돌던 그 무엇. 두려움도 연민도 아닌, 아직 언어도 표정도 갖추지 못한 은밀한 떨림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서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보다 섬세하게 이해했다. 동성 간의 사랑과 우정이 얽혀 빚어낸, 쉽게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그 밤의 소극적인 사랑은 이제껏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못한 채, 둘만의 비밀로 남아 있었다.


서윤은 제이의 애틋한 심정을 오랫동안 가까이 느껴왔지만, 끝까지 모른 척했다. 그 마음을 우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받아들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제이 곁에는 가까운 인척 하나조차 없었다. 서윤은 늘 생각했다. 자신이 없으면 제이는 무중력 속에서 표류하는 우주선처럼 끝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서윤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고, 제이 또한 한결같이 그녀 곁을 지켜왔다.


-서윤아, 아까 보여준 그 모네 미술 동화책 말인데, 너도 그 시리즈 작업에 함께해 볼래?

-내가 어떻게? 아냐, 난 자격 미달이야.

-자격 미달이라니? 너도 이미 유럽 여행기를 낸 작가잖아. 《파리에서 베네치아까지, 고양이처럼》

-제목은 느낌 좋았는데…

-백 권쯤 팔렸나? 아니지, 반품된 게 더 많았어. 아직도 창고에 쌓여 있잖아.

-미안.

-그러니까 이번엔 나 좀 도와줘.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쓰고, 삽화도 직접 그려보는 거야. 유럽 여행기에 실었던 그림처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글과 그림을 이어주면 돼. 너라면 이 시리즈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거야.

-말이야 쉽지. 내가 정말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믿는 거야?

-그럼 믿지. 너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상도 많이 탔잖아. 그때도 그림 잘 그렸고. 기억나? 미술 대회에서 네가 내 그림 대신 그려준 거.

-그럼, 기억나지.

-근데 나만 상 받고, 넌 못 받아서… 그땐 정말 미안했어.


송정초등학교 3학년 시절, 서윤은 교내 사생대회에서 제이의 그림을 대신 그려준 적이 있었다. 제이는 그 그림으로 우수상을 받았지만, 정작 그림을 그린 서윤은 아무런 상장도 받지 못했다. 그때 서윤은 커다란 나무문과 그 사이로 보이는 또 다른 세계를 그렸다. 양쪽 문은 도화지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고, 중앙에 화면을 가르듯 약간 벌어진 문틈으로 현실 너머의 공간이 아득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생이 넘기 어려운 기교의 벽 앞에서 그 그림은 손을 댈수록 무너져 내렸고, 끝내 참담한 흔적만 남았다.


그 실패가 단지 표현력 부족 때문이었다면, 서양화와 미술사까지 전공한 지금에는 같은 아이디어를 토대로 비로소 그 그림을 완성해 낼 수 있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혹여 나는 아직도 내 능력을 과신하며, 결코 잡을 수 없는 꿈을 좇고 있는 건 아닐까. 현실 저 너머, 실체의 열린 틈 사이로 얼핏 스치던 또 다른 세계가 결국 나조차 가질 수 없는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천천히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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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제이가 운영하는 출판사 해오름은 홍대 피카소거리 근처의 길게 뻗은 골목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낡은 주택을 개조한 이 건물은 겉보기엔 소박했지만, 기획 방향에 따라 작은 방과 거실이 저마다 다른 용도로 쓰이곤 했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책꽂이에는 신간 도서와 편집 노트, 기획 자료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커피 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공간 안에 한 겹 따스한 온기처럼 부유했다. 


편집부는 30대 초반의 젊은 편집자들이 주를 이뤘다. 그들은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낮은 목소리로 편집 기획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책에 대한 열정과 미지의 문장에 대한 설렘이 어려 있었다.


해오름이 펴내는 책들은 철학과 문학을 중심으로 일상에 지혜를 더하는 실용서까지 폭넓게 아울렀다. 제이가 불황 속에서도 이 작은 출판사를 여기까지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초창기부터 ‘선택과 집중’을 유일한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시적인 유행을 좇기보다 한 권의 책이 지닌 시간의 무게와 가능성을 두고 늘 고민해 왔다. 벽에 걸린 오래된 액자 속 글귀 한 줄이 출판사의 신념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책으로 세상을 바꾸다.’


그날 저녁, 서윤은 여덟 시가 다 되어 홍대 앞에 도착했다. 피카소거리 주변은 젊은 청춘과 다양한 예술가들의 아지트답게 떠들썩한 인파로 축제 같은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색색의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거리마다 젊은 웃음과 음악이 넘실거렸다. 노점의 풍경과 음식 냄새가 뒤섞여 온통 생생한 활기를 뿜어냈다. 길 한가운데 가만히 멈춰 선 서윤은,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여러 감정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걸 느꼈다. 낯선 도시에 홀로 떨어진 듯,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사람과 차량으로 들끓는 도로를 벗어나 고요한 주택가의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거리의 소음은 점차 잦아들고, 밤의 한기가 어깨를 스쳐 갔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는 오래된 벽돌 건물들이 묵묵히 늘어서 있었고, 어둑한 적막 속에 그녀의 구두 소리만이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 마침내 서윤이 걸음을 멈춘 곳은 낡은 간판이 희미하게 빛나는 해오름 출판사 앞이었다. 건물 입구의 작은 창으로 불빛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오늘도 야근하고 있는 거야?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출입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에는 조용한 숨결처럼 아늑한 기운이 감돌았다. 직원들이 모두 빠져나간 사무실, 제이는 작은 스탠드 조명 아래 홀로 앉아 책상 위 교정지를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얼굴에는 짙은 피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은 단정했고 자세도 꼿꼿하니 흐트러짐이 없었다.


-서윤아? 이렇게 늦게 웬일이야?


제이가 고개를 들며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에는 신간 작업에 대한 깊은 몰입이 묻어났다. 손에 들린 교정지에는 여기저기 빨간 글씨로 표시된 대목들이 빼곡했고, 짚어낸 단어와 문장마다 편집자의 지혜와 세심한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근처에 왔다가 혹시나 해서 들러봤어. 그런데 왜 또 너 혼자야?

-직원들에게는 퇴근 시간이 있지만, 사장은 퇴근 시간이 따로 없지.


제이는 웃음기를 섞어 말했지만, 그 속에 스스로를 다독이는 묘한 고집이 스며 있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괜찮아. 그런데 잠깐… 왜 이렇게 지쳐 보여?


그녀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더니, 서윤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일은 무슨…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지만, 사실은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퇴근길을 배회하다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물며 애써 말을 삼켰다. 괜스레 제이에게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갈 곳 없이 떠도는 이 감정을, 그녀 자신조차 어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잘 왔어.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응, 배고파.

-근처에 새로 생긴 집이 있어. 밥도 먹고, 기분도 풀 겸 같이 가자.


제이는 퇴근 준비를 하다 말고, 옆 책상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참, 이것 좀 봐. 이번에 막 나온 책이야.


그녀가 건넨 책은 모네의 수련 그림이 표지를 장식한 어린이용 미술 동화책이었다. 페이지마다 모네 특유의 자유로운 붓질과 따스한 색감이 살아 있었고, 글자 크기부터 그림 구성까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세심하게 꾸며져 있었다.


-모네의 삶과 작품을 동화 형식으로 풀어낸 거야. 그림을 감상하며 이야기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지.


제이는 책장을 펼쳐 보이며 설명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책을 향한 긍지와 깊은 애정이 배어 있었다.


-이 책을 시작으로 화가들에 관한 시리즈를 만들어볼 생각이야.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미술을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서윤은 표지를 넘겨 발행일과 저자 이름을 확인하고는, 페이지를 몇 장 천천히 훑어보았다. 내용도 술술 잘 읽혔고, 이야기 사이사이에 배치된 삽화도 산뜻하게 어울렸다. 무엇보다 모네의 작품 사진까지 함께 편집되어 있어, 글과 그림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한층 풍요롭게 다가왔다.


-좋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겠어.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이는 고개를 끄떡이며 짧게 자른 머리 위에 검은 비니를 깊숙이 눌러썼다. 어깨에 둘러멘 가죽가방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무거워 보였다.


-뭐야? 또 집에까지 일거리 들고 가는 거야?

-우리 같은 영세 출판업자는 심신을 몽땅 바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 그게 바로 내 비밀 영업 전략이야.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 마. 난 아직 뽀빠이처럼 튼튼하거든.

-그래서 결국 일중독자가 되셨다?


서윤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든 중독될 거라도 있어야지. 아니면 내 인생, 너무 가엾고 심심하잖아.


제이의 농담 섞인 말 한마디가, 오늘따라 서윤의 가슴 한쪽을 저릿하게 파고들었다.


서윤이 제이를 처음 만난 건 송정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제이는 늦둥이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나이 많은 어머니와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오빠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양친에 이어 오빠마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았다. 제이에게 서윤은 단순한 친구로만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오랜 시간 서로의 삶에 깊숙이 스며든 두 사람은 어느덧 친자매 이상의 유대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었다.


-그래도 아프면 안 돼. 네가 아프면, 내가 정말 슬플 거야.


서윤은 그날 밤 유독 작고 여려 보이는 제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알았어, 알았어. 근데 얘가 왜 이래, 징그럽게. 숨 막히니까 좀 떨어져, 응?


제이가 눈을 흘기며 잽싸게 서윤을 밀쳐냈다. 그녀들의 티격태격하는 말소리와 장난스러운 몸짓이 한동안 이어졌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실내의 불을 모두 끄고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으로 나란히 걸어 나갔다. 봄밤의 정적 속에서 그녀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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