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제이가 운영하는 출판사 해오름은 홍대 피카소거리 근처의 길게 뻗은 골목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낡은 주택을 개조한 이 건물은 겉보기엔 소박했지만, 기획 방향에 따라 작은 방과 거실이 저마다 다른 용도로 쓰이곤 했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책꽂이에는 신간 도서와 편집 노트, 기획 자료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커피 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공간 안에 한 겹 따스한 온기처럼 부유했다


편집부는 30대 초반의 젊은 편집자들이 주를 이뤘다. 그들은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낮은 목소리로 편집 기획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책에 대한 열정과 미지의 문장에 대한 설렘이 어려 있었다.


해오름이 펴내는 책들은 철학과 문학을 중심으로 일상에 지혜를 더하는 실용서까지 폭넓게 아울렀다. 제이가 불황 속에서도 이 작은 출판사를 여기까지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초창기부터 선택과 집중을 유일한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시적인 유행을 좇기보다 한 권의 책이 지닌 시간의 무게와 가능성을 두고 늘 고민해 왔다. 벽에 걸린 오래된 액자 속 글귀 한 줄이 출판사의 신념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책으로 세상을 바꾸다.’


그날 저녁, 서윤은 여덟 시가 다 되어 홍대 앞에 도착했다. 피카소거리 주변은 젊은 청춘과 다양한 예술가들의 아지트답게 떠들썩한 인파로 축제 같은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색색의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거리마다 젊은 웃음과 음악이 넘실거렸다. 노점의 풍경과 음식 냄새가 뒤섞여 온통 생생한 활기를 뿜어냈다. 길 한가운데 가만히 멈춰 선 서윤은,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여러 감정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걸 느꼈다. 낯선 도시에 홀로 떨어진 듯,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사람과 차량으로 들끓는 도로를 벗어나 고요한 주택가의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거리의 소음은 점차 잦아들고, 밤의 한기가 어깨를 스쳐 갔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는 오래된 벽돌 건물들이 묵묵히 늘어서 있었고, 어둑한 적막 속에 그녀의 구두 소리만이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 마침내 서윤이 걸음을 멈춘 곳은 낡은 간판이 희미하게 빛나는 해오름 출판사 앞이었다. 건물 입구의 작은 창으로 불빛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오늘도 야근하고 있는 거야?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출입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에는 조용한 숨결처럼 아늑한 기운이 감돌았다. 직원들이 모두 빠져나간 사무실, 제이는 작은 스탠드 조명 아래 홀로 앉아 책상 위 교정지를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얼굴에는 짙은 피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은 단정했고 자세도 꼿꼿하니 흐트러짐이 없었다.


-서윤아? 이렇게 늦게 웬일이야?


제이가 고개를 들며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에는 신간 작업에 대한 깊은 몰입이 묻어났다. 손에 들린 교정지에는 여기저기 빨간 글씨로 표시된 대목들이 빼곡했고, 짚어낸 단어와 문장마다 편집자의 지혜와 세심한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근처에 왔다가 혹시나 해서 들러봤어. 그런데 왜 또 너 혼자야?

-직원들에게는 퇴근 시간이 있지만, 사장은 퇴근 시간이 따로 없지.


제이는 웃음기를 섞어 말했지만, 그 속에 스스로를 다독이는 묘한 고집이 스며 있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괜찮아. 그런데 잠깐왜 이렇게 지쳐 보여?


그녀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더니, 서윤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일은 무슨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지만, 사실은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퇴근길을 배회하다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물며 애써 말을 삼켰다. 괜스레 제이에게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갈 곳 없이 떠도는 이 감정을, 그녀 자신조차 어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잘 왔어. 저녁 아직 안 먹었지?

-, 배고파.

-근처에 새로 생긴 집이 있어. 밥도 먹고, 기분도 풀 겸 같이 가자.


제이는 퇴근 준비를 하다 말고, 옆 책상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 이것 좀 봐. 이번에 막 나온 책이야.


그녀가 건넨 책은 모네의 수련 그림이 표지를 장식한 어린이용 미술 동화책이었다. 페이지마다 모네 특유의 자유로운 붓질과 따스한 색감이 살아 있었고, 글자 크기부터 그림 구성까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세심하게 꾸며져 있었다.


-모네의 삶과 작품을 동화 형식으로 풀어낸 거야. 그림을 감상하며 이야기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지.


제이는 책장을 펼쳐 보이며 설명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책을 향한 긍지와 깊은 애정이 배어 있었다.


-이 책을 시작으로 화가들에 관한 시리즈를 만들어볼 생각이야.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미술을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서윤은 표지를 넘겨 발행일과 저자 이름을 확인하고는, 페이지를 몇 장 천천히 훑어보았다. 내용도 술술 잘 읽혔고, 이야기 사이사이에 배치된 삽화도 산뜻하게 어울렸다. 무엇보다 모네의 작품 사진까지 함께 편집되어 있어, 글과 그림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한층 풍요롭게 다가왔다.


-좋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겠어.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이는 고개를 끄떡이며 짧게 자른 머리 위에 검은 비니를 깊숙이 눌러썼다. 어깨에 둘러멘 가죽가방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무거워 보였다.


-뭐야? 또 집에까지 일거리 들고 가는 거야?

-우리 같은 영세 출판업자는 심신을 몽땅 바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 그게 바로 내 비밀 영업 전략이야.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 마. 난 아직 뽀빠이처럼 튼튼하거든.

-그래서 결국 일중독자가 되셨다?


서윤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든 중독될 거라도 있어야지. 아니면 내 인생, 너무 가엾고 심심하잖아.


제이의 농담 섞인 말 한마디가, 오늘따라 서윤의 가슴 한쪽을 저릿하게 파고들었다.


서윤이 제이를 처음 만난 건 송정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제이는 늦둥이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나이 많은 어머니와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오빠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양친에 이어 오빠마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았다. 제이에게 서윤은 단순한 친구로만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오랜 시간 서로의 삶에 깊숙이 스며든 두 사람은 어느덧 친자매 이상의 유대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었다.


-그래도 아프면 안 돼. 네가 아프면, 내가 정말 슬플 거야.


서윤은 그날 밤 유독 작고 여려 보이는 제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알았어, 알았어. 근데 얘가 왜 이래, 징그럽게. 숨 막히니까 좀 떨어져, ?


제이가 눈을 흘기며 잽싸게 서윤을 밀쳐냈다. 그녀들의 티격태격하는 말소리와 장난스러운 몸짓이 한동안 이어졌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실내의 불을 모두 끄고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으로 나란히 걸어 나갔다. 봄밤의 정적 속에서 그녀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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