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로체 남벽’이라는 이름은 오래된 상처를 불러왔다. 1989년 가을, 모두의 심장에 새겨진 그날의 기억. 민혁은 그곳에서 추락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도준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무언의 언어로, 그가 견뎌온 시간의 무게를 드러냈다. 민혁을 떠나보낸 슬픔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상실을 넘어서리라 다짐했다. 다시 마주할 그 벽을 향해, 어느 때보다 단단한 결심이 서 있었다.


노르부는 에베레스트 길목, 쿰중 마을에서 태어난 셰르파였다. 산과 더불어 성장하며 날씨와 지형, 고소에 대한 감각을 몸으로 익혔고, 청소년기에는 라마 사원에서 수행하며 심신을 단련했다.

 

이후 네팔 산악협회에서 정식 훈련을 받고, 수많은 원정대와 함께 히말라야를 누비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에베레스트만 해도 열 번을 넘게 오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고산 환경에 적합한 유전적 특성과 반복된 8천 미터급 등반 경험으로, 일반 등반가보다 훨씬 빠르게 고도에 적응하고 극심한 저산소 환경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는 몸이었다.


지금은 파트너와 함께 여행사를 운영하지만, 기회가 닿으면 늘 고산으로 향했다. 산은 여전히 그에게 끝나지 않은 과업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로체 남벽은 악마의 벽이야. 왜 또 거길 오르겠다는 거지?

-혼자 해볼 거야.

-혼자서? …미쳤군.


도준은 고개를 돌렸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돌았어?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안 돼, 절대로!


노르부는 도준 앞에 놓여 있던 맥주잔을 빼앗듯 자기 앞으로 옮겼다.


-노말 루트라면 모르지. 히말라야의 전통적 원정 방식, 셰르파, 쿡, 닥터, 원정대… 함께라면 기적처럼 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 남벽은, 혼자라면 절대 안 돼.

-내년 봄이야. 작년 K2 하산 후 관광성 들어가 등반 허가 받았어.

-너희 같은 사람들,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노르부는 질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자꾸 위험하고 자극적인 것만 골라서 하려는 거야? 히말라야가 무슨 서바이벌 게임장인 줄 알아?

-그건 아니지. 그저…

-작년 에베레스트 참사, 기억나지? 하산길에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시신들이 눈 속에, 길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어.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지. 아, 왜들 기어이 여기까지 와서 죽는 건데?

-노르부, 나도 알아. 객기와 오만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걸.

-그런데?

-나도 눈의 거처에 사는 시바 신이 두렵지. 거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허공의 끝이니까. 그래서 더 정직한 마음으로 그곳에 서려는 거야.

-무산소에 혼자라니, 백 퍼센트 자살 행위야. 그렇게 죽고 싶으면 차라리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돈도 안 들고, 고통도 덜해. 그게 훨씬 경제적이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야. 스폰서도 일부러 찾지 않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감당할 거야.

-뭐, 후원자도 없어? 등반 자금은 어디서 구할 건데?

-그동안 가진 것들, 이것저것 다 팔았어.


도준은 노르부 앞에 있던 자신의 술잔을 다시 가져와 맥주를 가득 채웠다. 그때, 주인 여자가 달밧을 담은 식판 두 개를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노르부는 이미 식욕을 잃은 듯,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민혁 때문이지? 그걸 못 잊고 미안해서, 마음에 맺혀서 그러는 거지? 그럼 그만둬. 부질없는 짓이야.

-오해 마. 아직 아무도 오르지 못했으니까, 내가 한번 오르려는 거야. 로체가 거기 있으니까, 그게 전부야.


도준은 맥주를 들이켜고 손등으로 거품을 닦았다. 알전구를 향해 달려드는 하루살이 떼가 소란스럽게 윙윙거렸다. 뜨거움을 좇는 그들의 본능처럼, 그도 불빛을 향해, 죽음을 향해 겁 없이 돌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스스로 택한 길이었고,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도준은 어두운 허공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친구여, 내가 거의 다 왔다. 거기 너무 춥지는 않은가?’


하얗게 솟은 히말라야 능선을 배경으로, 민혁의 환한 미소가 바람에 흔들리는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두 번째 도전은 처음과 다를 것이다.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기에, 그래서 더욱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빛과 어둠, 생과 사가 뒤엉킨 순간에서도, 도준은 그 길이 끝나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피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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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8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미진 2026-09-1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을 기억해 주시다니 정말 반갑네요. 감사합니다.^^

yamoo 2026-09-21 13:40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 전에 모짜르트가 살이있다면을 매우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당시 작가분이 외국에 거주하신 걸로 아는데...여전히 외국이신가요? 알라딘 서재에서 뵙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그 이후에 <자전거를 타는 여자>까지 봤습니다. 20년대 이후로도 꾸준히 책을 내셨네요. 주로 미술책 위주로 내셨던데, 소설가 김미진 작가님이라는 건 꿈에도 몰랐네요. 미술 전공하신 게 기억이 나긴 합니다만..^^;;

어쨌든 서재에서 작가님의 글을 다시 볼 수 있다뉘, 감개가 무량입니다..^^

김미진 2026-09-22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으신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뿐 아니라 《자전거를 타는 여자》까지 기억하고 계시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 뵙게 되니 저도 감회가 새롭네요. 지금은 한국에 있습니다.
알라딘 서재에 연재하고 있는 《달의 몰락》은 《자전거를 타는 여자》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전면적으로 다시 쓴 작품입니다. 원작의 남자 주인공과 이야기의 일부 골격은 남아 있지만, 여자 주인공은 완전히 다른 인물로 설정했고 여러 인물과 이야기를 더하면서 전체 서사도 크게 확장했습니다.
2부와 3부부터는 원작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예정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여자》를 읽으셨다면 낯익은 흔적과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함께 발견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오래전 제 소설을 기억해주시고 다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그림 김미진


타멜 거리. 도준은 낯선 이방인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스쳐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경적과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운 행렬, 향신료 냄새가 뒤엉킨 복잡한 골목 한복판에서 누군가 불현듯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외쳤다.


-와, 이게 누구신가?


도준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환한 미소를 건네왔다. 훤칠한 키에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체격, 웃을 때마다 양쪽 뺨에 깊이 파인 볼우물이 인상적인 노르부였다.


-마이 프렌드, 바이!


네팔어로 ‘바이’. 형제를 뜻하는 친근한 호칭이었다. 노르부가 도준을 그렇게 부를 때는 조금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티베트계 셰르파족으로 네팔에서 나고 자란 서른여섯 살의 남자였다.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는 여행사를 직접 운영했는데,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오랜 경력의 고소등반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둘은 과거 에베레스트 북서쪽 초오유를 함께 오르며 굳건한 신뢰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당시 노르부는 아홉 명의 셰르파를 이끄는 대장이었고, 등반 루트 결정부터 고정 로프 설치, 피톤 작업까지 진두지휘했다. 정상까지는 무사히 올랐지만, 하산 도중 뜻밖의 눈사태에 휘말렸다. 그때 크게 부상을 입고 쓰러진 노르부를 끝까지 업고 내려온 이가 바로 도준이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목숨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끈끈한 유대가 자리 잡았다.


-내 생명의 은인! 연락도 없이 카트만두엔 언제 온 거야?

-오늘 도착했지. 그동안 잘 지냈어?


도준이 현지어로 짧게 인사를 건네자, 노르부는 활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나야 잘 지냈지. 도준, 정말 반갑다.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어디 가는 길이야?

-스와니가 호텔에 잠깐 다녀오는 길이야. 클라이언트 몇 명이 거기 묵고 있거든. 내일 아침 일찍 포카라행 버스를 타야 해서 전달할 게 좀 있었어.

-나는 사흘쯤 파노라마 포인트에 머물다가 루크라로 갈 생각이야. 그런데 저녁은 먹었어?

-마침 나도 출출하던 참이야.

-그럼 맥주 한잔하면서 같이 먹자. 모처럼 이 동네 로컬 푸드가 당기네.

-좋아! 잘됐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한참 따라 걷다가 왼편으로 꺾어 들자 허름한 식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막 아래 듬성듬성 놓인 테이블 위로 낮게 매달린 알전구가 바람에 흔들리며, 낡았지만 묘하게 따스한 정취를 풍겼다. 쌀밥에 렌틸콩 수프와 야채 커리를 곁들인 달밧(Dal Bhat), 그리고 버팔로 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모모(Momo)가 이 집의 대표 메뉴였다.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자마자 주인 여자가 마른행주로 테이블을 재빨리 훑듯 닦아주었다. 그들은 네팔 맥주 ‘뚜벅’ 세 병과 달밧 두 개를 주문했다. 주인 여자가 맥주를 먼저 가져다 놓고는 커다란 호박처럼 생긴 오이를 도톰하게 썰어 바구니에 담아 내왔다.


노르부는 맥주잔을 가득 채우며 존중과 환대의 뜻을 드러냈다. 그 단순한 손놀림에서 도준은 오래전 눈보라 속에서 맺은 인연을 떠올렸다.


-요즘 비즈니스는 어때?

-정신없어. 가이드만 여든 명, 포터가 백쉰 명이야.

-그 정도면 돈 좀 벌었겠는데?

-젠장, 네팔에 돈 쓰러 오는 사람 봤냐? 다들 다른 나라에선 펑펑 쓰고, 여긴 마지막 코스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와선 싸구려만 찾아다닌다니까. 얼마 전엔 일본 애들이 이십 년도 더 된 여행 책자 들고 와서, 왜 이렇게 비싸졌냐고 따지더라. 질렸지, 완전히. 두 손, 팔다리 다 들었어.

-힘들겠네. 그래도 얼굴은 훤해 보이는데.


도준이 오이를 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노르부는 픽 웃으며 맥주잔을 다시 채웠다.


-루크라는 왜 가는 거야? 이번엔 또 어디로 올라갈 생각이지?

-올해는 시등만 할 거야. 추쿵 쪽으로 빠져 로체샬 중턱쯤까지. 그때 컨디션 봐서 임자체도 다녀올지 몰라. 혼자라서 편해.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혼자 정찰 등반을 왔다, 그런 말인가? 진짜 노리는 봉우리는 어디지?

-로체 남벽.

-뭐라고?


노르부는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도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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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일본으로 떠나기 전, 도준은 오랜만에 사촌 형 집에 머물고 계신 고모부를 찾아뵈었다. 고모부는 환자용 침대에 누운 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 『전원일기』 재방송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퇴원 전보다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졌고, 건강도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었다. 평생 농사일에 그을린 얼굴은 서울에 온 후로 많이 밝아졌는데, 덕분에 세월의 자국처럼 도드라진 검버섯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울 물이 좋긴 한가 보다. 그새 시골 땟국물이 쑥 빠진 것 같지 않니?


고모부는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낮추며 미소 지었다. 목소리엔 여전히 병치레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오래 묵은 삶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도준은 어깨에 메고 온 가방에서 서윤이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종합비타민제와 홍삼 캔디를 꺼내놓았다.


-이게 웬 거냐?

-윗집 살던 아주머니 아시죠? 그분 손녀가 고모부께 드리라며 가져왔어요.

-윗집 손녀가? 아이고, 고맙구먼.


고모부는 약병을 쥔 손끝을 미세하게 떨면서도, 오랫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 떨림은 단순한 고마움을 넘어선,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었다. 그 순간 도준은 오래전 윗집 마당에서 목격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열세 살의 어느 날, 그는 용천 계곡에서 주운 분홍신 한 짝을 들고 윗집을 찾았었다. 그날, 이해할 수 없는 장면 하나가 그의 삶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말해선 안 될 비밀이라는 감각만이 몸에 먼저 새겨졌을 뿐이었다.


전쟁 과부였던 윗집 아줌마는 고모와도 오랜 이웃이었다. 두 사람은 언니와 동생처럼 친하게 지내며 반찬 하나도 나누던 사이였다. 그런 이웃집 아줌마와 고모부의 관계는 소년에게 도무지 믿기 어려운 비밀이었다.


그는 차마 누구에게도 그날 일을 발설하지 못했다. 고모가 알게 되면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고, 그 은폐된 사건이 결국 비극으로 이어질까 몹시 불안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 비밀을 외면한 탓에 하루라도 빨리 기숙학교로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고모는 세상에 없고, 도준도 더는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숨겨온 고모부의 불편한 진실을 한 번쯤 살짝 건드려보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이 불쑥 일었다. 무덤까지 지고 갈 비밀이 아니라면, 고모를 대신해 그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모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그동안 비밀로 간직했던 거예요.

-비밀이라니? 그래서?

-옛날에, 윗집 아주머니 젊었을 때, 고모부가 그 집에서 나오는 걸 봤어요. 그 방에 두 분만 있었죠. 오랫동안.


순간 고모부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꿈틀거렸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모부는 충격과 고뇌가 뒤섞인 눈빛으로 도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모도 그걸 알았니?

-아셨을까요?

-글쎄다.

-저는 아무 말 안 했어요. 곧바로 기숙학교로 들어갔잖아요.

-왜 숨겼니?

-고모가 슬퍼할까 봐서요.

-그랬구나. 고맙다.


고모부의 ‘고맙다’에는 여러 겹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비밀을 지키느라 힘들었던 도준의 침묵일까, 자신의 불륜이 고모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일까. 도준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다.


-고모에게 미안한 생각은 없으세요?


도준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분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었지. 전의 심방리 뱀골. 거기가 우리 고향이야. 그분은 부잣집 셋째 딸, 나는 그 집안 소작농의 아들이었어. 그분이 시집을 갔고, 전쟁통에 홀몸이 되었지. 내가 횡계로 온 건 그분이 여기서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이야. 고모를 만난 건 그 이후였지. 두 여자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걸 안다. 더 잘해주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지.


고모부가 오래 묻어두었던 진실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한 남자의 노쇠한 목소리에는 사랑과 죄책, 회한과 체념이 얽혀 있었다. 도준은 그것을 단순한 도덕의 잣대로만 가를 수 없음을 직감했다. 평생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온 고모부의 고백은, 그의 삶을 관통한 불가피한 굴레였는지도 모른다.


-두 여자 모두를 사랑했나요? 아니면, 고모는 껍데기 사랑만 받은 건가요?

-이제 와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지만, 그분을 보쌈해서 멀리 달아날까 욕심을 낸 적도 있었지. 기차표까지 끊었는데, 네 고모가 마음에 걸려 결국 떠나지 못했어... 고모한테는 미안해서 더 잘해줬고, 윗집 그분은 안타까움에 더 많은 걸 베풀려고 했지. 그러면서도 늘 두 여자 모두에게 미안했어.


고모를 두고 멀리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니. 도준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고모부는 평생 한 여자를 놓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살아왔다. 윗집 그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과거에 머물며 그 집을 돌보았다. 도준은 한때 그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고모 몰래 저지른 부도덕한 행위를 원망했고, 오로지 고모부만 바라보며 살아온 고모가 안쓰러워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지금, 서윤에 대한 갈망 속에서 그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그녀를 향한 벗어날 수 없는 열망이 고모부가 한 여자를 놓지 못한 이유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두 집안에 얽힌 아픈 사랑의 흔적이 비밀스러운 유산처럼 자신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랑이 결국 고모부의 삶을 옭아매고 정의했듯, 언젠가 자신의 삶 또한 같은 방식으로 규정될 것만 같은 예감.


‘나는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도준은 그 질문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고모부와의 대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사촌 형 집을 나서는 그의 머릿속에 ‘사랑인가, 히말라야인가’라는 생각만이 어렴풋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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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하루하루 체념이 깊어지고, 휴대폰을 확인하는 횟수도 줄어들던 어느 날이었다. 모래내 철공소에서 특별히 주문한 등산 장비를 챙겨 나오던 중,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낯선 번호가 액정에 떠올랐다. 일순간 혹시 그녀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하지만 전화를 건 이는 모 TV 방송국의 정 피디였다.


정 피디는 일본 북알프스 등정을 다룬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며, 도준에게 카메라 감독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그는 방송 촬영 기술에 능숙하면서, 거친 지형에서도 빠르게 오를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번 외주 제작 프로젝트에 꼭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산 환경에서의 촬영은 단순한 카메라 기술을 넘어, 강인한 신체 조건과 산악 지형에 대한 이해까지 요구하는 일이었다. 도준은 늘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올랐다. 숫자와 기계에 밝았던 그는, 점차 방송 장비까지 습관처럼 다루며 자연스레 촬영 전문가가 되었다.


니콘 F3, 캐논 New F-1 같은 기계식 SLR 카메라는 배터리 의존도가 낮아 저온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했고, 광각부터 망원까지 다양한 렌즈군, 코닥 Ektachrome와 후지 Velvia 슬라이드 필름, 가볍고 견고한 삼각대, 카메라와 렌즈를 보호할 케이스와 여타 액세서리까지, 모든 장비를 짊어지고 산에 오르는 일은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싸움이자, 완벽한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도준은 그런 극한 조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데 익숙했다. 전문 산악인으로 쌓은 인연 덕에 방송 작업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고, 인디 필름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촬영 감독상을 받은 경력도 있었다.


국내 산을 배경으로 한 프로그램은 제작이 활발하고 인력 충원도 수월했지만, 해외 촬영은 절차가 복잡하고 예산 부담이 커 아무나 시도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이번 기회가 프리랜서인 도준에게까지 돌아온 것은, 외주 제작이라는 특수한 여건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선뜻 응답하지 못했다. 머릿속 어딘가를 여전히 서윤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서울을 떠나면 그녀와의 거리가 영영 멀어질 것만 같은 불안, 그것이 그의 결정을 더디게 만들었다.


-도준 씨, 혹시 다른 일정 있으세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건가요?

-아닙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뭐라고 답을 드리긴 조금…

-김 부장님이 꼭 모셔야 한다고 하셨어요. 도준 씨 아니면 안 된다고요.


정 피디의 상사인 김홍식 부장은 산악 프로그램에 특화된 베테랑 프로듀서였다. 도준도 김 부장의 프로그램에 여러 번 참여한 터라, 그에게 빚진 마음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김 부장은 산악 촬영의 까다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험난한 환경에서도 제 몫을 해내는 사람으로 도준을 신뢰하고 있었다.


-이번에 김홍식 부장님도 함께 가시나요?

-아뇨, 정년 퇴임을 앞두고 뉴욕으로 휴가를 떠나셨어요.

-그렇군요.

-그래도 일본 현지 사정에 밝은 도준 씨가 함께하면 큰 도움이 될 거라며, 꼭 부탁드리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도준은 문득 김 부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철저하고 노련한 모습, 여러 산악 프로그램에서 함께했던 순간들이 선명했다. 그가 하필 이 시점에 자신을 추천했다는 점이 묘하게 마음을 울렸다.


-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니… 영광이네요.


일본 북알프스는 도준에게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 긴 방황 끝에 처음 마주한 그 광활한 풍경은 부모를 잃고 상처투성이였던 어린 소년에게 산악인의 꿈과 생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곳은 추억이 아니라, 그의 삶이 다시 시작된 출발점이었다.


‘어쩌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카메라를 메고 바삐 몸을 움직이다 보면, 그녀를 잊진 못해도 갑갑한 생각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년 네팔 원정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 확보라는 이유도 있었다.


‘낯선 환경과 새로운 일은 삶의 갈림길에서 돌파구가 되곤 하지. 그녀와의 인연도, 어쩌면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지도 몰라.’


막연한 바람이었지만, 그 기대는 조심스럽게 그의 마음을 부추겼다.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일본 북알프스 산맥이 또다시 자신의 삶을 이끌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는 정 피디의 제안을 정중히 받아들이고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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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한동안 어둠에 잠겨 있던 타멜 중앙로에 전깃불이 돌아오자, 외국인 거리 특유의 활기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곗바늘과 정지된 여백의 순간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낡은 릭샤를 끌던 운전사가 천천히 멀어지고, 옷 가게와 기념품 가게, 타로 점집 앞에도 불빛이 번지며 거리 전체가 다시금 살아 숨 쉬었다.


삼거리 반스 책방 앞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군밤을 팔고 있었다. 도준은 환한 불빛에 이끌리듯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매장 안에는 여행객들이 두고 간 중고 서적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고, 장식장 위에 정갈하게 놓인 그림엽서와 기념품들도 네팔 전통의 색감과 문양으로 이방인의 시선을 끌었다. 


도준은 작년도 판 ‘론리 플래닛’ 가이드북을 잠시 넘겨본 뒤, 지도들이 꽂혀 있는 섹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다양한 지역의 지도를 살펴보다가, 마침내 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 지도를 뽑아 들었다.


잠시 후, 다시 거리로 나온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타멜의 고즈넉한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분주히 오가고, 식당에서는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함께 샤데이가 몽환적인 목소리로 부르는 ‘Smooth Operator’가 흘러나왔다. 옷가게에 걸린 전등 불빛은 진열대 위 기념 셔츠와 손뜨개 모자, 두꺼운 스웨터들을 은은히 비추었다. 흘러넘치듯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원색들이 밤 풍경 속에 생기를 더했다.


기념품 가게 앞을 지나치려는데,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What time is it?


그는 무심코 왼손을 들어 올려 손목에 차고 있던 아보셋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느닷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신기하게 생겼네요. 이건 무슨 시계예요?


횡계 별장, 목요일 오후.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던 장면이 아직 선명한 필름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차에 몸을 싣고 사라진 후로, 도준은 삶의 중심을 잃고 무기력한 시간 속을 맴돌았다. 매일같이 오대산 자락을 달리던 일상의 리듬도 흐트러졌다. 그녀가 없는 횡계는 아무도 없는 숲의 적막처럼, 이제 어떤 의미도 건네지 못했다. 결국 일주일 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충동적으로 서울 방향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그녀가 있는 도시로 가자.’


사랑이라는 열병에 잠식된 영혼은 텅 빈 갈증에 쫓기듯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그녀가 일하는 인사동 거리를 서성였다. 그림자만이라도 스칠까 하여 리온 갤러리 주변을 배회하는 일만이 그의 결핍을 붙들어두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으나, 운 좋게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두어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슴이 터질 듯 요동쳤지만, 차마 가까이 다가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철없던 시절의 무모한 격정은 이미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횡계 숲길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줄곧 마음을 옥죄었다.


-당신 누구야?


낯선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이명처럼 귓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약혼자였다 해도 하루 전 자신이 적어준 번호가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 의문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누군가의 보호와 강력한 견제 안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앞날이 예정된 사람 앞에 무턱대고 나서는 일은 결국 불필요한 혼란만 초래할 뿐이었다. 게다가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확실성과 자신감의 결여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로체 남벽이라는 치명적인 도전이 눈앞에 버티고 있는 한, 그 어떤 약속이나 책임도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민다 해도, 언젠가 자신이 비겁하게 그 손을 놓아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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