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하루하루 체념이 깊어지고, 휴대폰을 확인하는 횟수도 줄어들던 어느 날이었다. 모래내 철공소에서 특별히 주문한 등산 장비를 챙겨 나오던 중,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낯선 번호가 액정에 떠올랐다. 일순간 혹시 그녀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하지만 전화를 건 이는 모 TV 방송국의 정 피디였다.


정 피디는 일본 북알프스 등정을 다룬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며, 도준에게 카메라 감독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그는 방송 촬영 기술에 능숙하면서, 거친 지형에서도 빠르게 오를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번 외주 제작 프로젝트에 꼭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산 환경에서의 촬영은 단순한 카메라 기술을 넘어, 강인한 신체 조건과 산악 지형에 대한 이해까지 요구하는 일이었다. 도준은 늘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올랐다. 숫자와 기계에 밝았던 그는, 점차 방송 장비까지 습관처럼 다루며 자연스레 촬영 전문가가 되었다.


니콘 F3, 캐논 New F-1 같은 기계식 SLR 카메라는 배터리 의존도가 낮아 저온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했고, 광각부터 망원까지 다양한 렌즈군, 코닥 Ektachrome와 후지 Velvia 슬라이드 필름, 가볍고 견고한 삼각대, 카메라와 렌즈를 보호할 케이스와 여타 액세서리까지, 모든 장비를 짊어지고 산에 오르는 일은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싸움이자, 완벽한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도준은 그런 극한 조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데 익숙했다. 전문 산악인으로 쌓은 인연 덕에 방송 작업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고, 인디 필름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촬영 감독상을 받은 경력도 있었다.


국내 산을 배경으로 한 프로그램은 제작이 활발하고 인력 충원도 수월했지만, 해외 촬영은 절차가 복잡하고 예산 부담이 커 아무나 시도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이번 기회가 프리랜서인 도준에게까지 돌아온 것은, 외주 제작이라는 특수한 여건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선뜻 응답하지 못했다. 머릿속 어딘가를 여전히 서윤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서울을 떠나면 그녀와의 거리가 영영 멀어질 것만 같은 불안, 그것이 그의 결정을 더디게 만들었다.


-도준 씨, 혹시 다른 일정 있으세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건가요?

-아닙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뭐라고 답을 드리긴 조금

-김 부장님이 꼭 모셔야 한다고 하셨어요. 도준 씨 아니면 안 된다고요.


정 피디의 상사인 김홍식 부장은 산악 프로그램에 특화된 베테랑 프로듀서였다도준도 김 부장의 프로그램에 여러 번 참여한 터라, 그에게 빚진 마음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김 부장은 산악 촬영의 까다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험난한 환경에서도 제 몫을 해내는 사람으로 도준을 신뢰하고 있었다.


-이번에 김홍식 부장님도 함께 가시나요?

-아뇨, 정년 퇴임을 앞두고 뉴욕으로 휴가를 떠나셨어요.

-그렇군요.

-그래도 일본 현지 사정에 밝은 도준 씨가 함께하면 큰 도움이 될 거라며, 꼭 부탁드리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도준은 문득 김 부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철저하고 노련한 모습, 여러 산악 프로그램에서 함께했던 순간들이 선명했다. 그가 하필 이 시점에 자신을 추천했다는 점이 묘하게 마음을 울렸다.


-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니영광이네요.


일본 북알프스는 도준에게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 긴 방황 끝에 처음 마주한 그 광활한 풍경은 부모를 잃고 상처투성이였던 어린 소년에게 산악인의 꿈과 생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곳은 추억이 아니라, 그의 삶이 다시 시작된 출발점이었다.


어쩌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카메라를 메고 바삐 몸을 움직이다 보면, 그녀를 잊진 못해도 갑갑한 생각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년 네팔 원정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 확보라는 이유도 있었다.


낯선 환경과 새로운 일은 삶의 갈림길에서 돌파구가 되곤 하지. 그녀와의 인연도, 어쩌면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지도 몰라.’


막연한 바람이었지만, 그 기대는 조심스럽게 그의 마음을 부추겼다.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일본 북알프스 산맥이 또다시 자신의 삶을 이끌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는 정 피디의 제안을 정중히 받아들이고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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