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 속에서, 서윤은 알 수 없는 설렘에 잠시 발을 떼지 못했다. 자전거에서 내려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도준 역시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깊고 조용한 눈빛이 은밀한 인사처럼 닿아왔다. 말로는 다다를 수 없는 어떤 기척이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렸고, 숨결마저 가늘어졌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도준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서윤은 자전거를 끌고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어쩐지 부담스러워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읍내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경계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저는 벌써 서울로 올라가신 줄 알았어요. 자전거는 잘 굴러가나요?

-그럼요.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아, 잠깐만요.


도준은 말을 끊고 차로 가더니, 곧 서류봉투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저희 고모부님 집에 있던 건데요, 주소를 보니 여기 것이 맞는 것 같아서요.


그가 내민 것은 한 종교 단체에서 보내온 우편물이었다. 봉투 두 개 모두에 어머니의 이름 ‘이경옥’이 또렷이 인쇄돼 있었다.


-어휴, 이렇게까지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신세를 지네요.

-별말씀을요. 이렇게 하면 얼굴도 다시 보고, 저야 좋죠.

-네? 그게 무슨…

-하하, 그냥 농담입니다. 남자들은 가끔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하잖아요.


도준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렇군요. 아무튼 고마워요.


서윤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두어 걸음 물러섰다. 남자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그 눈빛에는 느긋함과 함께 묘한 열기가 배어 있었다. 말없이 머뭇대는 사이, 짧지만 선명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어제의 땀내 밴 운동복 대신, 검은 면바지에 연청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셔츠 자락은 허리 안으로 말끔히 정리돼 있었고, 늘씬하면서도 탄탄한 몸의 윤곽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벼운 바람에 옷 주름이 미묘하게 움직였고, 밝은 빛깔의 셔츠는 구릿빛 피부와 어우러져 그만의 은은한 기품을 자아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제처럼 그냥 가라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도준의 말에 서윤의 표정이 흐려졌다. 우편물까지 일부러 챙겨온 그에게 그냥 가라고 말하는 건 너무 야박한 일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편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그녀를 붙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커피 한 잔 드시고 가실래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기쁘게 마시겠습니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서윤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미소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끌어당기면서도, 봄날 스쳐 가는 햇살처럼 눈부셨다. 난처할 때마다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는 그녀에게, 지금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남자였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잊은 채, 그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자, 그건 제가 들게요.


남자의 손이 스치듯 그녀의 손등을 지나 자전거 핸들을 넘겨받았다. 그 짧은 접촉에서 전해진 온기가,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을 남겼다.


도준은 자전거를 덥석 들어 오른쪽 어깨에 얹었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두어 걸음 앞서서 별장 앞 돌층계를 성큼성큼 올라갔다.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황혼이 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 두 사람의 등 뒤로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녀가 웃으며 살짝 뒤를 돌아본 순간, 마지막 남은 햇살 한 조각이 마치 무대 조명처럼 그녀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낯설고도 강렬한 감정에 이끌리듯, 그녀는 남자를 따라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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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다음 날 점심 무렵, 서윤은 자전거를 타고 횡계 읍내로 나가, 별장 지붕 공사를 맡았던 설비 가게 주인을 만났다. 오십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허리에 넓은 압박 밴드를 두르고 있었다. 엊그제 작업을 나갔다가 허리디스크가 악화되어, 어제는 강릉 큰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물리치료도 받았다는데, 아직은 몸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했으니, 당분간 지붕에서 비가 샐 일은 없을 겁니다.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사 장비와 건축 자재가 무질서하게 쌓인 가게 안은 오래된 고물 창고를 연상시켰다. 가장 안쪽, 전기난로 곁에 앉아 장부를 뒤적이던 나이 든 여자가 자꾸 이쪽을 흘끗거렸다. 눈매에는 어딘가 날 선 기운이 배어 있었고, 그 시선이 스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괜히 감시당하고 있는 것만 같아,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붕에서 다시 물이 새면, 하자 보수는 해주시는 거죠?

-그럼요. 하지만 제가 공사한 자리가 아닌 곳에서 샌다면, 다시 손을 봐야 할 겁니다.

-또 누수 공사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가 되물었다.


-지붕이 오래돼서 그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전체적으로 점검을 해보는 게 어떨지 아버님과 상의해 보세요.


전체 지붕 공사라니. 서윤은 얕은 한숨을 삼켰다. 가게 주인이 내민 견적서에는, 이번에 시공한 부분 공사비보다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그녀는 공사 내역과 부가세가 포함된 영수증을 건네받고 가게 문을 나섰다. 중앙로에는 흙먼지와 기계음이 뒤엉켜, 도로 전체가 거대한 공사판처럼 들끓고 있었다. 자전거 바퀴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풀풀 일었고, 아득하게 펼쳐진 소도시 풍경이 눈앞에서 뿌옇게 흐려졌다. 잠시 근처 슈퍼에 들러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챙긴 뒤, 그녀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 별장으로 향했다.

 

횡계에 온 지도 어느새 사흘째였다. 목요일 오후, 이제 읍내에서 볼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휴가를 즐기는 셈치고, 오늘은 별장에서 하루 더 느긋하게 쉬다가 내일쯤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쩌면 집에 가는 길에 평창동 명명희 선생 작업실을 먼저 찾아, 양녀 김순자 씨와 전시 계획을 미리 상의하며 조금 더 친분을 다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주 잠깐, 김 씨 할아버지의 조카라는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조차 모르는 이에게 잠시 흔들렸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어제 커피 한 잔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일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질까 봐, 오히려 자신이 더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 지난 일이다. 이제 끝난 거야. 


그녀는 그렇게 단정 지으며, 머릿속을 떠도는 불길한 망상들을 하나씩 밀어냈다. 그 남자 역시, 어쩌다 스친 생의 편린에 불과하다고, 가슴 깊이 새기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얼마 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별장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앞마당에 멈춰 서 있는 랜드로버가 멀리서부터 시선을 붙잡았다. 김 씨 할아버지의 조카가 다시 찾아왔다는 생각이 스치자,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가볍게 두근거렸다. 서윤이 탄 자전거를 발견한 도준은 차에서 내려, 그녀가 다가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저물어 가는 석양을 등지고 선 그의 모습은 오래된 조각상처럼 고요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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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서윤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지붕 공사를 맡긴 설비 가게 주인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어제는 다른 현장 공사로 자리에 없었고, 오늘은 갑작스레 몸이 아파 병원에 갔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아버지는 공사비를 건네기 전에 반드시 가게 주인을 만나, 하자 보수에 관한 설명과 다른 유의 사항들을 꼼꼼히 챙기라고 누누이 당부하였다. 결국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려면 이곳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고, 설비 가게를 다시 찾아가려면 아무래도 자전거가 필요할 것 같았다.


‘큰할머니의 친한 이웃이었다잖아.’


연두색 털모자와 연두색 망토가 그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큰할머니의 뜨개질 바구니에 수북하게 담겨 있던 털실과 뜨개바늘이 그녀의 마음을 잠시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럼… 누추하지만, 잠깐 들어오세요.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고 그를 돌아보았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자전거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실내 공간은 그 안에 누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마련이다. 남자의 큰 키와 넓은 어깨 탓에, 집안은 갑자기 전보다 좁아 보였고 천장도 한결 낮아진 듯 느껴졌다.


그녀는 출입문 근처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입술과 턱 주변에 붉게 벗겨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크지 않은 상처였지만, 그 흔적은 마음 어딘가에 생긴 작은 균열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자전거에서 떨어지며 쓸린 살갗은 불에 덴 듯 쓰라렸고, 턱 아래의 욱신거림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행히 입안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좀 어때요? 병원에 가야 할까요?


그가 불쑥 거울 속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하나의 거울 안에서 두 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엇갈리듯 급히 한발 옆으로 비켜섰다.


-이제 괜찮아요. 흉이 질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그녀는 무심한 듯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엌 수납장에서 구급함을 꺼내 후시딘 연고를 찾아 들었다. 손을 수돗물에 씻은 다음 면봉에 연고를 묻혀 부어오른 턱에 조심스레 펴 발랐다. 따갑고 쓰라린 느낌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피부 속 깊이 남은 뻐근한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괜찮은 거잖아.’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속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그 사이 도준은 아무 말 없이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집 뒤쪽 창고로 가서 타이어 펌프와 펑크 수리 키트를 들고 돌아왔다. 길쭉한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패치 키트가 들어 있었다.


-이거면 될까요?

-네. 충분합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MTB 자전거는 작고 가벼운 장난감처럼 보였다. 자전거포 주인 못지않은 노련한 솜씨로, 두 개의 레버를 다루며 타이어를 벗기고 납작해진 튜브를 꺼냈다. 바람을 불어 넣은 튜브를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댄 그는, 숨소리를 죽인 채 공기가 새는 소리를 들었다.


-아하, 여기네요. 바로 이 구멍이에요. 보이죠?

-어디요?

 

그녀는 무릎을 굽혀 그의 손끝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익숙한 비누 향과 은은한 남자의 체취가 코끝을 스쳤다. 가슴이 불현듯 요동쳤다. 그녀는 얼른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본드를 바르고 조금 기다려야 해요.

-네?

-본드가 꾸덕꾸덕해져야 서로 잘 붙어요.

 

도준은 사포로 튜브 표면을 부드럽게 문질러 정리한 뒤, 키트에서 적당한 크기의 패치를 골라냈다. 길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접착제를 능숙하게 펴 바르는 그의 동작은 빠르고도 정확했다. 그 익숙한 손놀림을 바라보는 동안, 서윤은 자신이 어느새 낯선 리듬 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몸은 아직 그 판단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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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나무들에 둘러싸인 별장 주위엔 늦은 오후의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도준은 마당 오른편, 후박나무 그늘 아래 차를 세웠다. 뒷문을 열어 자전거를 꺼내는 동안, 서윤은 숨을 고르며 차에서 내렸다.


-고마웠어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옮길게요.


그녀의 정중한 목소리에는 선을 긋는 듯한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아, 그럼 이거 챙기세요.


펑크 난 앞바퀴를 그녀에게 건네며, 도준이 싱긋 웃었다.


-이건 제가 직접 배달할게요.


도준은 자전거를 번쩍 들어 어깨에 척 얹었다.


-얼른 앞장서세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앞바퀴를 들고 한발 먼저 별장 입구의 계단을 올라갔다.


-이 집엔 이제 사람이 안 산다고 고모부에게 들었어요. 가끔 필요할 때만 내려오신다고요.


앞서가는 그녀를 향해 도준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부모님 부탁으로 지붕 공사한 걸 확인하러 온 거예요.

-예전에 여기 사시던 분을 저도 잘 알아요.

-우리 큰할머니요?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어느새 가까워지자, 도준은 멈칫 발을 멈추었다. 그는 서윤보다 머리 하나쯤 더 컸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깊고 조용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서윤의 가슴속 어딘가를 간지럽혔다.


-어릴 적에 저도 여기, 고모부 집에서 한동안 살았어요.


그가 비밀스러운 사연이라도 털어놓듯, 그녀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시선을 돌렸다.


-그… 그렇군요.

-그럼요. 그러니 우린 거의 이웃사촌인 셈이죠. 하하하.


그가 활짝 웃자, 검게 그을린 얼굴 위로 하얀 치아가 눈부시게 드러났다. 서윤도 벙긋 웃으며 다시 돌아서 발을 내디뎠다.

 

길게 뻗은 돌층계를 오르는 동안, 그녀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큰할머니와 함께했던 옛 시절을 떠올렸다. 큰할머니의 뜨개질 바구니에는 늘 다채로운 색실이 가득했다. 틈틈이 스웨터와 장갑을 떠 친척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를 즐기셨는데, 도준 역시 그 따뜻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 고모 친구분이셨잖아요. 그때는 아직 젊으셔서 윗집 아줌마라고 불렀죠. 제게 곶감도 주시고 가래떡도 구워주셨어요. 연두색 털모자도 손수 떠주셨고요.

-어머, 저도 어렸을 때 큰할머니가 떠주신 연두색 망토를 입은 적 있어요.

-연두색 망토요?

-같은 연두색이면 같은 실로 짠 걸지도 모르겠네요. 참, 신기해요.

-고모가 담근 겨울 김장을 제가 여기까지 날라다 드리기도 했어요.

-어머나, 전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오해할 뻔했어요.


서윤은 손끝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민망하게 웃었다.


-무슨 오해요?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운명이니, 인연이니 그러셨잖아요. 처음 만난 여자한테.

-아, 죄송합니다.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근데 정말 그런 걸 믿으세요?

-아, 그거요? 하하하.


도준이 입을 크게 벌려 호탕하게 웃자,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소년 같은 웃음이 번졌다. 서윤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출입문 앞에 이르러, 서윤은 문 열쇠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잠시 멈춰 섰다. 온화하던 미소는 어느새 지워지고, 냉철한 현실 감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전거만 건네받고 그를 돌려보낼지, 아니면 집 안으로 들여 음료 한 잔이라도 내어놓을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큰할머니와 그의 고모부 집안 사이의 오랜 인연을 떠올린다 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여전히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별장까지 무사히 오긴 했지만, 정체도 분명치 않은 남자를, 그것도 그녀 혼자만 있는 집안에 발을 들이게 한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됐으니 그만 돌아가 달라 말하기에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윤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전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타이어 펑크 패치 있나요? 바람 넣는 펌프도요.

-네? 아… 아마 창고에 있을 거예요.
-다행이군요. 한번 가져와 보세요. 금방 손봐 드릴게요.

 

자전거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그의 태도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서윤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말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도준의 눈빛은 여전히 확고했다.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대로 두고 가면, 계속 마음에 걸릴 것 같아요. 밑에 차도 안 보이던데, 자전거까지 없으면 많이 불편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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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차 안은 차체의 겉모습보다 훨씬 더 낡아, 오래된 유물처럼 빛이 바래져 있었다. 핸들은 손때가 겹겹이 스며든 가죽 위로 번들거렸고, 변속기 너머로는 세월이 남긴 자국이 부드럽게 패여 있었다. 이름 모를 시간이 묻어난 시트는, 옛이야기의 숨결인 듯 묘하게 따스함을 풍겼다. 자동차의 라디오는 침묵했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락거리는 재즈의 잔향이 번져올 것만 같았다. 


서윤은 이 차가 오래도록 품어온 정서의 무게를 어렴풋이 감지했다. 어쩌면 이 차는 시간이 머물렀다 간 자리이자, 사라진 기억의 흔적들을 감싸안은 쉼터일지도 몰랐다.


-자, 출발합니다.


도준이 웃으며 말했다.


-네.


그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숨을 삼켰다. 밀폐된 공간에서 낯선 남자와 단둘이 앉아 있다는 생각만으로 불안이 스며들었다. 차 안의 정적은 숨소리조차 울리는 듯 어색했고, 약혼자가 있는 몸으로 낯선 남자의 차에 올라탔다는 사실이 자책처럼 가슴을 조여왔다.


강태일이 이런 상황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싸늘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경멸 어린 입술 위로 번지는 비웃음. 심지어 침이라도 내뱉을 듯한 그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도준은 단 한 번도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운전대를 단단히 쥔 채 숲속 비포장길만 응시하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이상하리만치 여유롭고 안정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바라보는 그 모습은 얼마간 서윤을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를 의식하지 않는 거야… 근데 내가 그렇게 매력 없는 여자인가?’


서윤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런 유치한 생각을 떠올린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무심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 서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쩐지 궁금하고 자꾸 신경이 쓰였다.


서윤의 마음이 조금 진정될 무렵, 차가 크게 덜컹거리는 지점을 지나자 오솔길은 점점 좁아졌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 보리암을 가리키는 작은 표지판이, 숲 그림자 속에서 한 가닥 흐릿한 실루엣처럼 드러났다.


-저기서 좌측으로 가시면 돼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그맣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 위에 있는 파란 지붕 집이죠?


도준이 가볍게 웃었다.


-네?


서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그렇게 말했잖아요.

-아, 그렇죠, 참!


서윤은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도준이 핸들을 왼쪽으로 꺾자 엔진이 낮게 웅웅대더니, 랜드로버는 울창한 잡목 숲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른 실개천 같은 고랑을 지날 때는 차체가 더욱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도준이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뻗어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지 않게 받쳐 주었다.


서윤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잡이를 붙잡으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도준의 손이 다시 운전대로 돌아가자, 낯설고 무방비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며 손끝까지 번졌다. 차 안의 정적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도움을 받는 처지에서 계속 침묵만 지키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했다.


-굉장히 오래된 차네요.


서윤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놀란 듯 돌아보았고,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74년형이에요. 곧 폐차될 운명이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굴러가죠.


남자의 말투에는 담담함 속에 묘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대학교 때 이거랑 비슷한 차를 타고 다니던 교수님이 계셨어요.

-그 교수님 차도 이렇게 고물이었나 보죠?

-아니, 이 차가 고물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냥 농담한 거예요.

-아, 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반사되어 속눈썹 아래에 투명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모습을 바라본 순간, 도준의 눈에도 기억의 잔상이 스쳤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감정 하나가, 마치 신호를 받은 듯 서서히 깨어났다. 그녀는 작은 기척에도 놀라 금세 상처받을 것 같은 예민한 생명체처럼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촉촉한 눈빛은 작은 몸짓에도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도준은 친근하게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일부러 꾹 참았다. 성급한 말 한마디로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용천 계곡에서 처음 만난 조그만 여자아이가 이렇게 성숙하게 자라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제 고무부 집 마당에서 홀로 서 있던 그녀를 보았을 때,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한 끌림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감된 재회처럼, 가슴 한가운데 작은 등불이 켜졌다. 그 짧은 순간, 지난 세월이 한 점으로 응축되며, 오랜 인연의 끈이 불쑥 당겨지는 듯했다.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의 접점 같았다. 험준한 봉우리와 절벽을 전전하며 살아온 도준의 세계와, 무르고 따스한 그녀의 세계가 초봄의 투명한 바람 속에서 잠시 포개졌다. 도준은 자신과 서윤이 이토록 오랜 세월 인연을 이어왔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는 매 순간 치열한 경험과 도전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왔고, 때로는 벼랑 끝에서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서윤은 그런 극단적인 세계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부서질 듯 가냘프고 깨끗하며 순수한 분위기는 사람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그녀만의 선명한 존재감이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흘러간 날들 속에서도 변치 않은 기억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불현듯, 서윤이라는 여인의 내면과 그녀가 지나온 계절들이 궁금했다. 마치 자신이 놓치고 살아온 어떤 빛의 조각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려 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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