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 속에서, 서윤은 알 수 없는 설렘에 잠시 발을 떼지 못했다. 자전거에서 내려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도준 역시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깊고 조용한 눈빛이 은밀한 인사처럼 닿아왔다. 말로는 다다를 수 없는 어떤 기척이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렸고, 숨결마저 가늘어졌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도준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서윤은 자전거를 끌고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어쩐지 부담스러워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읍내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경계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저는 벌써 서울로 올라가신 줄 알았어요. 자전거는 잘 굴러가나요?
-그럼요.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아, 잠깐만요.
도준은 말을 끊고 차로 가더니, 곧 서류봉투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저희 고모부님 집에 있던 건데요, 주소를 보니 여기 것이 맞는 것 같아서요.
그가 내민 것은 한 종교 단체에서 보내온 우편물이었다. 봉투 두 개 모두에 어머니의 이름 ‘이경옥’이 또렷이 인쇄돼 있었다.
-어휴, 이렇게까지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신세를 지네요.
-별말씀을요. 이렇게 하면 얼굴도 다시 보고, 저야 좋죠.
-네? 그게 무슨…
-하하, 그냥 농담입니다. 남자들은 가끔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하잖아요.
도준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렇군요. 아무튼 고마워요.
서윤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두어 걸음 물러섰다. 남자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그 눈빛에는 느긋함과 함께 묘한 열기가 배어 있었다. 말없이 머뭇대는 사이, 짧지만 선명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어제의 땀내 밴 운동복 대신, 검은 면바지에 연청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셔츠 자락은 허리 안으로 말끔히 정리돼 있었고, 늘씬하면서도 탄탄한 몸의 윤곽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벼운 바람에 옷 주름이 미묘하게 움직였고, 밝은 빛깔의 셔츠는 구릿빛 피부와 어우러져 그만의 은은한 기품을 자아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제처럼 그냥 가라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도준의 말에 서윤의 표정이 흐려졌다. 우편물까지 일부러 챙겨온 그에게 그냥 가라고 말하는 건 너무 야박한 일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편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그녀를 붙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커피 한 잔 드시고 가실래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기쁘게 마시겠습니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서윤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미소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끌어당기면서도, 봄날 스쳐 가는 햇살처럼 눈부셨다. 난처할 때마다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는 그녀에게, 지금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남자였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잊은 채, 그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자, 그건 제가 들게요.
남자의 손이 스치듯 그녀의 손등을 지나 자전거 핸들을 넘겨받았다. 그 짧은 접촉에서 전해진 온기가,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을 남겼다.
도준은 자전거를 덥석 들어 오른쪽 어깨에 얹었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두어 걸음 앞서서 별장 앞 돌층계를 성큼성큼 올라갔다.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황혼이 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 두 사람의 등 뒤로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녀가 웃으며 살짝 뒤를 돌아본 순간, 마지막 남은 햇살 한 조각이 마치 무대 조명처럼 그녀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낯설고도 강렬한 감정에 이끌리듯, 그녀는 남자를 따라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