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나무들에 둘러싸인 별장 주위엔 늦은 오후의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도준은 마당 오른편, 후박나무 그늘 아래 차를 세웠다. 뒷문을 열어 자전거를 꺼내는 동안, 서윤은 숨을 고르며 차에서 내렸다.


-고마웠어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옮길게요.


그녀의 정중한 목소리에는 선을 긋는 듯한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 그럼 이거 챙기세요.


펑크 난 앞바퀴를 그녀에게 건네며, 도준이 싱긋 웃었다.


-이건 제가 직접 배달할게요.


도준은 자전거를 번쩍 들어 어깨에 척 얹었다.


-얼른 앞장서세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앞바퀴를 들고 한발 먼저 별장 입구의 계단을 올라갔다.


-이 집엔 이제 사람이 안 산다고 고모부에게 들었어요. 가끔 필요할 때만 내려오신다고요.


앞서가는 그녀를 향해 도준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부모님 부탁으로 지붕 공사한 걸 확인하러 온 거예요.

-예전에 여기 사시던 분을 저도 잘 알아요.

-우리 큰할머니요?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어느새 가까워지자, 도준은 멈칫 발을 멈추었다. 그는 서윤보다 머리 하나쯤 더 컸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깊고 조용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서윤의 가슴속 어딘가를 간지럽혔다.


-어릴 적에 저도 여기, 고모부 집에서 한동안 살았어요.


그가 비밀스러운 사연이라도 털어놓듯, 그녀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시선을 돌렸다.


-그렇군요.

-그럼요. 그러니 우린 거의 이웃사촌인 셈이죠. 하하하.


그가 활짝 웃자, 검게 그을린 얼굴 위로 하얀 치아가 눈부시게 드러났다. 서윤도 벙긋 웃으며 다시 돌아서 발을 내디뎠다.

 

길게 뻗은 돌층계를 오르는 동안, 그녀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큰할머니와 함께했던 옛 시절을 떠올렸다. 큰할머니의 뜨개질 바구니에는 늘 다채로운 색실이 가득했다. 틈틈이 스웨터와 장갑을 떠 친척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를 즐기셨는데, 도준 역시 그 따뜻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 고모 친구분이셨잖아요. 그때는 아직 젊으셔서 윗집 아줌마라고 불렀죠. 제게 곶감도 주시고 가래떡도 구워주셨어요. 연두색 털모자도 손수 떠주셨고요.

-어머, 저도 어렸을 때 큰할머니가 떠주신 연두색 망토를 입은 적 있어요.

-연두색 망토요?

-같은 연두색이면 같은 실로 짠 걸지도 모르겠네요. , 신기해요.

-고모가 담근 겨울 김장을 제가 여기까지 날라다 드리기도 했어요.

-어머나, 전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오해할 뻔했어요.


서윤은 손끝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민망하게 웃었다.


-무슨 오해요?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운명이니, 인연이니 그러셨잖아요. 처음 만난 여자한테.

-, 죄송합니다.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근데 정말 그런 걸 믿으세요?

-, 그거요? 하하하.


도준이 입을 크게 벌려 호탕하게 웃자,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소년 같은 웃음이 번졌다. 서윤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출입문 앞에 이르러, 서윤은 문 열쇠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잠시 멈춰 섰다. 온화하던 미소는 어느새 지워지고, 냉철한 현실 감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전거만 건네받고 그를 돌려보낼지, 아니면 집 안으로 들여 음료 한 잔이라도 내어놓을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큰할머니와 그의 고모부 집안 사이의 오랜 인연을 떠올린다 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여전히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별장까지 무사히 오긴 했지만, 정체도 분명치 않은 남자를, 그것도 그녀 혼자만 있는 집안에 발을 들이게 한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됐으니 그만 돌아가 달라 말하기에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윤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전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타이어 펑크 패치 있나요? 바람 넣는 펌프도요.

-? 창고에 있을 거예요.

-다행이군요. 금방 손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전거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그의 태도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서윤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말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도준의 눈빛은 여전히 확고했다.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대로 두고 가면, 계속 마음에 걸릴 것 같아요. 밑에 차도 안 보이던데, 자전거까지 없으면 많이 불편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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