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림 김미진

 

까마귀 한 마리가 멀리서 울었다. 리듬감 있게 내딛는 발소리가 산길 위로 퍼졌다. 발목을 감싼 얇은 덧신이 낙엽을 헤치며 바스락거렸고, 뿌옇게 흩어지는 입김은 햇살 속으로 번지듯 사라졌다. 산속 깊은 계곡은 숨을 죽인 채 잠잠했다. 그 고요의 한가운데, 한 남자의 심장 박동이 울려 퍼졌다.


쿵- 쿵-


봄기운이 천천히 산등성을 타고 오르던 그날 오후, 도준은 오대산 능선을 따라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스쳤지만, 강인하게 다져진 그의 몸에서는 더운 김이 피어올랐다. 꽤 오랜 시간, 그는 같은 호흡으로 보폭을 이어갔다. 두 발이 일정하게 땅을 내딛는 순간마다 머릿속이 맑아지며 온갖 잡념이 사라졌다.


이런 의식의 공백은 그에게 익숙했다. 오직 달리는 일에만 몰두한 채, 세상의 시름에서 풀려난 무중력의 고요를 사랑했다. 등산로 끝자락을 지나자, 가파른 암벽길이 길게 펼쳐졌다. 울퉁불퉁한 화강암 절벽 앞에서도, 그의 몸짓엔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급경사의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지만, 익숙한 동작으로 거침없이 뛰어넘었다. 오대산의 거친 산길을 매일 달리며 체력을 단련해 온 그에게, 이 험준한 경사로조차 철저히 계산된 훈련 과정의 일부였다.


검은 바탕에 푸른 띠가 들어간 등산복, 얇은 폴리에스터 장갑, 길게 묶은 꽁지머리. 20킬로그램짜리 배낭에, 발목엔 모래주머니까지 찬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경사를 타고 올랐다. 두 발은 땅을 박차고, 호흡과 시선, 균형 감각이 정교하게 맞물렸다. 움직임은 빠르되 한 치의 무리도 없었다. 그는 야생의 본능과 생존의 가쁜 숨을 내쉬며, 자연의 심연 속을 달리는 한 줄기 맥박 같았다.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등줄기를 스쳤다. 그것은 그의 몸을 식히는 동시에, 주변의 공기 흐름에 몸을 맡기게 했다. 도준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바닥으로 향한 채, 발걸음과 호흡만을 따라갔다. 나무와 돌, 떨어진 잎 하나까지도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감각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때로 그는 스스로를 시험하듯, 한층 더 가파른 바위를 올랐다. 손끝과 발끝에 집중을 모으고, 중력을 거슬러 몸을 밀어 올리는 순간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시선과 속삭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산, 그리고 한 줄기 길뿐이었다.


계곡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면서, 그가 달리는 길 위에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그가 남긴 발자국처럼 땅에 새겨졌다가 곧 사라졌다. 도준의 내면에도 비슷한 밀도의 그늘이 깊이 자리 잡았다. 지난 기억과 앞으로 맞이할 고통, 그리고 끝내 닿을 수밖에 없는 고요한 결말까지.


그는 속으로 단 한 가지를 되뇌었다


달려라. 멈추지 마라.’ 


모든 판단과 감정이 그의 몸을 지배했지만, 달리는 행위 자체가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자연의 리듬 속에서 느낀 온도와 바람, 땅의 질감은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증거였다


도준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암벽과 계곡, 바람과 햇살, 그리고 심장 박동과 호흡이 하나로 맞물리며, 한 인간이 자연과 마주한 순간의 총체적 경험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오대산은 그의 몸과 함께 숨 쉬고 있었고, 도준 자신도 그 흐름 속에서 삶의 맥박을 단단히 새기고 있었다.


해발 8,511미터.


로체.


피의 계곡처럼 벌어진 기억 너머에, 깎아지를 듯한 쿠로와르가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지난 100년간의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가장 치열한 난코스로 여겨지는 로체 남벽을 완등한 이는 아직 없다. 오직 슬로베니아 출신의 저명한 산악인, 토모 체센만이 1990년 봄, 무산소 단독으로 초등정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422일 오후 5시에 출발해, 25일 오전 7시에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고 알려졌다. 62시간 만에 등정을 마쳤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발표는 곧 거센 의혹과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처음 그는 등반 중 촬영한 사진이 없다고 밝혔으나, 이후 프랑스 등산 전문지에 제출한 사진들로 다시 논란이 일었다.


그 자료들이 사실은 다른 등반가가 촬영한 것임이 밝혀지면서, 그의 이름은 신화의 정상에서 허위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경외의 정점에 서 있던 그는 한순간, 조롱과 의심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가 로체 정상에서 찍었다고 공개한 사진 속 풍경들조차, 실제 정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도준도 한때 그 악마의 벽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달라붙은 적이 있었다. 토모 체센의 등반 주장이 아직 논란에 휩싸이기 일 년 전인 198910, 그는 절친 민혁과 함께 메스너조차 21세기에나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던 그 벽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단 5일 만에 8,200미터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목숨을 거는 위기마다 서로의 눈빛 하나로 결정을 내렸고, 등반로는 마치 기적처럼 열렸다. 벼랑 끝에서 손을 내밀고, 눈사태 속에서도 로프 하나에 서로를 지탱하며 수많은 고비를 넘었다.


로체봉 정상에 거의 도달했던 그날,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하늘이 찢기듯 열리며 눈보라가 몰아쳤고, 모든 것이 눈앞에서 뒤엉키는 바람에 그들은 정상 직하의 설원 낭떠러지에서 아이스 피켈을 필사적으로 찍으며 온몸을 내던지듯 하산을 시작했다. 그때, 떨어지는 낙석에 그는 자신의 분신 같았던 친구 민혁을 잃었다. 민혁은 로체의 크레바스처럼 깊은 계곡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해발 8천 미터를 넘나드는 고봉 위에서 인간의 운명은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곳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과연 신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로체 남벽을 오를 수 있는 것인가. 때때로 그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작은 가능성과 희망을 향해 좁은 보폭이나마 한발씩 내디뎠다. 시바 신이 미소를 지을지, 아니면 분노의 화살을 쏘아댈지,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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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김미진


인호는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의문과 설명되지 않는 거리감이 남아 있었다. 말투와 표정, 시선에 이르기까지, 어딘가 어긋난 감정의 온도 차가 그를 계속 불편하게 만들었다.


기자 생활 십수 년. 익명 뒤에 숨어 정보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 말보다 눈물이 먼저였던 고발자들,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마치 진실인 듯 내보였던 그들. 그런 이들을 상대해 온 세월은 인호에게 사람을 가려내는 직감을 남겼지만, 동시에 모든 이야기를 의심하게 만드는 나쁜 습관도 함께 남겼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목적을 떠올렸다. 도준과 SY 사건의 핵심에 놓인 두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단어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기도 했다. 인호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숨을 삼켰다.


전혀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군.’


그 순간, 조금 더 지켜봐도 괜찮겠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이 앞에서 무엇인가가 막 실체를 드러내려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더니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꺼낸 봉투 안에는 도준이 어떤 여인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포즈와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깊이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은 맑고 따뜻했다. 가늘게 실눈을 뜬 눈매와 수줍은 미소가 투명한 봄 햇살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감쌌다. 단번에 시선을 압도하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오래도록 눈길이 머무는 얼굴이었다. 침묵이 고여 있는 사진의 안쪽에서, 그녀는 말없이도 분명한 어떤 것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


-이 여자분이 그 SY라는 말씀이신가요?

-, 그래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과연, 이 사진들만으로 이 여자가 <지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의 수취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호는 섣불리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고수했다. 지금은 그녀의 말을 먼저 들어보는 편이 나아 보였다.


-, 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 편지는 가지고 오셨죠?

-, 그게 좀...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을 주셔서. 사실은...

-그럼, 안 가지고 나오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짧고 단호하게 물었다. 인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원정대는 아직 네팔에 머물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무사히 하산한 뒤, 현재 카트만두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서바이벌 키트와 함께 로체 정상에서 발견된 그 편지는, 도준과 각별한 사이였던 문형근이 여전히 보관하고 있었다. 한성일보에 실린 편지 전문은 그가 하산 중에 팩스로 전송한 것이었다.


-다음 주쯤, 한국원정대가 귀국할 예정입니다. 이 여자분이 SY라는 게 확실하다면, 그때 원본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이 복사본밖에 없습니다.


인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슬며시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도준이 남긴 편지를 복사한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의심과 당혹감이 어렴풋이 스쳤다.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솔직히 장담은 못 드립니다.

-그럼, 제가 왜 여기에 나온 거죠?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예라뇨...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이죠?

-이분이 수취인이 맞는지, 그것부터 판명하는 게 우선입니다. 정말로 SY가 확실하다면, 제가 최대한 돕겠습니다.

-잘 모르겠네요.

-SY 본명은 뭔가요?

-오늘은 날씨가 좋았어요.

-?

-산에 높이 올라갔다가, 굴러떨어지기 딱 좋은 날이죠.

-그게, 무슨...?

-등산 안 좋아하세요? , 안 좋아하시는구나.

-허허, 말씀을 돌리시는군요.

-.

-죄송합니다.

-...

-저기...

-...

-저는 그러니까...

-저랑... 친자매나 다름없는 친구예요.

-? 이분이... 이 여자분이요?


인호가 사진 속 여인을 가리켰다.


-SY... 서윤이에요. , ,


그녀는 다시 침묵했다. 떠오르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인호는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어떤 말이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를 바라며,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창밖으로 서울 시내의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의 녹음기는 조용히 작동하며 빨간 불빛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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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저녁 6시경, 초판 신문이 배포되자 인호는 신문사 앞에서 택시에 올랐다. 약속 장소를 남산 자락의 한 호텔 라운지로 정한 데에는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이라는 공간이 무의식중에 도준의 이미지를 불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호텔로 들어서자 라운지 창가 쪽에서 홀로 앉아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자른 머리와 매끄럽게 재단된 회색빛 바지 정장 차림. 서른 초중반쯤으로 보였지만, 인상은 또래보다 한층 성숙했다. 단정하고 절제된 옷차림과 말간 피부, 침착한 눈빛이 묘하게 어우러져 특종 분야의 전문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양손을 단정히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에서는, 첫인상과는 다른 어딘가 애잔한 기색이 느껴졌다.


-제 이름은 제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인호도 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친 뒤, 신문사 로고가 새겨진 명함을 그녀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녀는 커피를, 인호는 버번위스키를 주문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테이블 위로 잔잔한 재즈가 낮게 깔렸다.


그녀의 눈빛은 꿰뚫는 듯 예리하면서도 정제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쏘아보는 건 아니었지만, 정면으로 마주한 그 시선에는 묘한 압박이 있었다. 인호는 그 눈빛이 어쩐지 불편했으나, 말이 끊겨 어색해지는 순간을 피하려 주문한 게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이름 외에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잠시 뒤, 웨이터가 커피와 위스키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인호는 숨을 고른 뒤,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신문 기사에 나온 SY를 알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사진 속 여자분이 정말 SY라는 걸 제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며 두어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손끝은 무척이나 침착했고, 입가엔 말간 김이 스치듯 흩어졌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만난 분 앞에서 꺼내는 게 쉽지 않네요. 하지만 제 친구를 위해서 용기를 내야겠죠.


그녀는 커피잔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소 엉뚱하면서도 도발적인 의문을 꺼내놓았다.


-저기... 남녀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이라는 게, 결국 뭘까요?

-그게 무슨?


인호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쾌했다기보다, 질문 자체가 너무 느닷없고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에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던 단어, 그 어색하고도 진부한 이름, ‘사랑’. 이런 이야기를,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눠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인호는 등받이에 기댄 허리가 굳어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오히려 이 만남의 본질이 바로 그 단어 안에 있다는 듯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인호를 똑바로 응시했다그것은 친구 SY를 위한 용기이자어쩌면 그녀 자신을 향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 감정의 속살 같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인호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피했다.


-지금 그게, 꼭 필요한 질문인가요?


그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다소 냉정한 어조로 덧붙였다.


-전 질문을 받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질문은, 제가 해야죠.

-, 그렇죠. 물론이에요.


제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의 반응이 무례하게 느껴졌을 법도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어진 대화 속에서 그녀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현실이 때로는 남녀 사이의 애정보다 더 단단하고 귀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세상이 부여한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도준 씨와 제 친구가 그랬어요.


제이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 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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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한국 등반사는 1950년대 북한산 개척 등반에서 시작되어, 1960~70년대 본격적인 산악 문화의 활성기를 거쳐 고산 원정으로 발전해 왔다. 1977, 한국 원정대가 히말라야 8,000미터급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며 세계 산악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술적 등반과 스포츠 클라이밍이 확산되었고, 한국 등반의 기반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 흐름 속에서 도준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히말라야 14좌 중 9개를 등정한 산악인이며, 최근 그의 서바이벌 키트가 로체봉 정상에서 발견되면서 세계 최초로 로체 남벽을 단독 등정한 인물로 보도되었다. 비록 생환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누구도 넘지 못한 남벽의 한계를 넘어섰고, 이 소식은 세계 등반사에 중대한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도준의 업적은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전설로 남을 것이다. 그의 삶은 산에서 시작되어, 결국 산에서 조용히 마침표를 찍었다.


지상에서 살다 간 한 인간의 인생은 장편 대하소설처럼 구구절절 기록될 수도, 혹은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축약될 수도 있다. 인호는 그 삶을 글로 남겨야 한다는 책임을 안고, 도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한성일보에 실릴 특집기사를 위해 여러 증언과 이를 뒷받침할 물증이나 기록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사람은,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이번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우태길이었다. 그는 당시 네팔의 한 의료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귀국을 기다리던 그와 어렵사리 전화 연결이 닿은 뒤, 간략하나마 도준의 삶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도준과 함께 등반했던 동료들로부터도 단편적인 일화들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한 인물을 둘러싼 기록과 기억의 조각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도준의 고모부 자택에서는 그의 유품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운 좋게도 등반 일지 몇 권이 발견되었다. 사고 직후, 가장 가까운 일가친척이었던 고모부 식구들에게 전달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진짜 난관은 ‘SY’ 이니셜로만 남겨진 여인을 찾는 일이었다. 그녀는 도준의 기록 어디에도, 누구의 증언 속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베일에 싸인 채, 철저히 지워진 이름, 실체 없는 존재로 남았다. 도준의 오랜 선배 문형근은 그때 카트만두에 머물고 있었다. 그 역시 SY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며 당혹스러워했다.


-기자님, 이렇게 국제전화까지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도준 곁에 여자가 있었다니, 저로선 금시초문입니다.

-전혀 여자와 관련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셨나요?

-아직 젊고 생긴 것도 멀쩡한데, 여자가 아예 없었겠어요? 하지만 누구를 진지하게 사귀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그럼, 로체에서 발견된 그 편지는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훈에게는 산이 인생의 전부였죠. 주말이면 늘 산으로 사라지는 연습벌레였으니, 그런 녀석을 감당할 여자가 과연 있었을까 싶네요. 혹시 누군가를 마음에 품었다 해도, 오래가진 못했을 겁니다.

-여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거죠?

-허허. 다 지난 일 아닙니까. 생전에 연애를 했건, 아니건, 이제 와서 그걸 따지는 게 무슨 의미인지...


사람이 죽고 나면 흔적은 쉽게 잊히고, 미담은 지나치게 포장되기 마련이다. 문형근은 후배의 명성에 더는 손상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이상의 질문에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인호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편집국 안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번잡함이 가득했다. 창밖으로 찌뿌듯하게 흐린 광화문 거리가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뒤엉킨 심경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말없이 그 회색 풍경 속에 자신을 내맡겼다.

 

누구에게나,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세월의 풍화 속에 각인된, 인생의 또 다른 자화상처럼. 도준이 로체에서 실종되기 직전까지 마음속 깊이 품었던 ‘SY’,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마지막이 조금은 따뜻했으리라 믿고 싶었다.


이후, 한성일보는 도준에 대한 특집 기사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다각적인 면모를 취재한 결과, 걸출한 산악인 도준의 생애와 학창 시절, 성격과 등반 스타일, 가족과 지인들에게서 들은 일화들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SY’ 그 여인의 존재는 끝내 미스터리로 남았고, 기사는 조심스러운 여운을 남긴 채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었다.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은 그 퍼즐 하나가 인호의 마음 한편에 묘한 허기를 남겼다.


-김 기자, 빨리 기사 넘겨.

-잠깐만요,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한성일보 편집국은 오늘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준 특집기사가 마지막으로 나간 지도 어느새 사흘째였다. 편집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인호는 한 통의 낯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가 자신이 ‘SY’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비슷한 제보 전화를 몇 차례 받아왔기에 인호는 담담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이번은 뭔가 달랐다. 그녀는 도준과 SY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여러 장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사진들을 제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 서바이벌 키트에서 나온 편지요. 그걸 저에게 주세요.


인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쳤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수화기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그 편지를 주시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그런데... 도준 씨와는 어떤 관계예요?

-저는 그 편지에 나오는 여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 편지를, 제 주인에게 돌려줘야 마땅하죠.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그 편지가 로체봉 정상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했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 그 편지는 산에서 내려왔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 진짜 주인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바로 제 친구예요.


인호는 수화기를 든 채 상체를 길게 뻗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슴이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분명히 무언가 있군.’


지금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준에 관한 진정한 완결편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기사화할 수 없는 이야기라 해도, 도준과 SY에 얽힌 미스터리는 더 이상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진까지 갖고 있다는 제보자를 직접 만나 본다고 해서 손해 볼 일도 없었다.


-좋습니다. 우리 한번 만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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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지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


한성일보의 1면을 장식한 굵은 활자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2년 전 로체 남벽에서 사라진 도준이, 마침내 죽음 너머에서 말을 걸어온 순간이었다. 다른 일간지들도 앞다투어 이 사연을 특종으로 다뤘지만, 도준이 로체봉 정상에 남긴 편지의 전문을 공개한 곳은 한성일보뿐이었다.


그날, 문화부 기자 김인호는 출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신문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몇 년째 줄곧 입고 다니던 트렌치코트는 후줄근했고, 입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전날 밤, 한성 문예지 수상 작가인 시인 모 씨와 함께 신촌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신 터라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에 잠긴 듯 뿌옇게 흐려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긴 복도를 지나 편집국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들썩이는 실내 분위기에 그의 눈빛이 잠시 굳어졌다.


-왜 이렇게 시끌벅적한 거야....


편집국은 본사 건물 3층 전체를 통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천장 아래 허공에는 부서별 팻말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인호는 가급적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문화부에 있는 자신의 데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지각을 하루 걸러 한 번씩 밥 먹듯이 하는 부하 직원을 좋아할 상관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직속 상사인 권 부장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중에 면전에서 크게 꾸지람을 듣게 되겠지만, 우선은 한시름 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스러운지 알고 싶었으나, 옆자리에 앉은 선임 기자 역시 통화 중이어서 그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편집국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문화부에는 좀처럼 얼굴을 비치지 않던 인물이라, 인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꼿꼿하게 바로 세웠다.


-김인호 기자.

-, .


인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제대로 한 방 날렸던데. 축하해.

-?

-그 기사 말이야. 오늘 1면 탑으로 뽑았잖아. 하하하.


편집국장의 큰 웃음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흥미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인호는 회사 내에서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이나 자긍심보다, 전에 없이 펼쳐진 이런 상황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져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날 오전 내내 편집국 전화벨이 멈추지 않았던 건, 도준에 대한 관심이 아직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해외 독립영화제 수상 감독, 발표가 지지부진하던 시나리오 작가와 소설가, 출판 편집자, 방송국 간부들까지 줄을 이었다. 기사에 감동했다는 일반 독자들의 전화도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김인호 기자를 찾았다. 도준 특집 기사를 쓴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편집국장은 다른 경쟁지들을 제쳤다는 승리감에 얼굴이 잔뜩 상기돼 있었다. 반면 인호는 숙취로 인한 후유증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참기 힘들 만큼 하품이 자꾸 새어 나왔다.


-이번에 로체에 올라간 등반대장이 네 친구라며?

-. 등반대장 우태길이 남체에서 팩스를 보냈어요.

-하여튼 대단해. 우리가 크게 한 건 했어. 위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더라고.


편집국장은 인호의 팔뚝을 한 번 꾹 잡아본 뒤, 흡족한 표정을 남기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조용해진 전화기는 이내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홍 기자가 눈을 찡긋하며 양손 엄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


-, 신난다. 브라보!

-, 그런 걸 가지고... 촌스럽게.


인호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문화부장이 자리에 앉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를 불렀다. 인호의 미간이 순간 움찔했다.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 지각이었다. 기사 반응이 좋으니 큰 날벼락은 없겠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왜요.


그는 부장 앞 접대용 의자에 털썩 앉으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입안이 껄끄럽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부장은 신문 지면을 손끝으로 툭 가리켰다.


-여기, 편지에 나오는 ‘SY’라는 사람.


인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이, 거기 있었나?’ 기억의 지면을 되감듯 머릿속에서 활자를 더듬었다.


-부인이나 여자친구라면 굳이 이니셜로 남기진 않았겠지.


부장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도준은 결혼 안 했어요. 자식도 없고...

-그럼 혹시 불륜 관계 아니었을까? 연상녀라든지, 유부녀라든지.

-? 그게 무슨...

-편지 말투, 좀 닭살 돋지 않아? 너무 감상적이잖아. 어이, 손 기자, 이리 좀 와봐.


손 기자는 결혼 15년 차를 맞은 문화부의 유일한 기혼 여성이자, 부서 순환 대상에서 제외된 연륜 깊은 전문 기자였다. 그녀는 재킷 뒷자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다가와 지면을 힐끗 내려다봤다.


-왜요,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요?

-여기 도준. 왜 편지에 존댓말을 썼을까?


손 기자는 피식 웃었다.


-저도 여행 가서 남편한테 엽서 쓸 땐 그래요. 평소엔 반말인데, 그럴 땐 존댓말 써요.

-?

-말실수 줄이려고도 하고... 단정하고 품위 있어 보이잖아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덧붙였다.


-둘만 아는 언어 문법 같은 거죠. 겉으론 존댓말인데, 속에는 훨씬 진한 감정이 들어 있어요. 일종의 이중 어법이랄까요. 그 미묘한 거리감이 오히려 더 끈끈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


손 기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부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인호를 다시 바라봤다. 뭔가 꼼수를 떠올릴 때마다 짓던, 그 불편하고도 느끼한 표정이었다.


-이중 어법이라... 흥미롭군.

-? , ...

-후속 기사 써야지뭐하고 있어?


부장은 휴먼 다큐 형식으로 서너 차례 연재도 가능하겠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 눈빛은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인호는 손에 쥐고 있던 크리넥스를 눈가에 갖다 대고 문질렀다. 자신이 쓴 기사가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기자로서 분명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떠들썩한 반응은 여전히 낯설고, 어딘가 부담스러웠다. 그가 적어 내려간 단어와 문장들, 그 행간의 의미들이 누군가의 오랜 침묵을 건드린 듯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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