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도준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깎아지른 오대산 절벽을 기어올랐다. 손바닥은 흡반처럼 바위에 착착 들러붙고, 손가락 하나하나가 차가운 바위의 미세한 틈을 정확히 짚어냈다. 등에는 로체에 오를 때 짊어질 무게와 비슷한 배낭을 멘 채였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무게와 고도에서의 무게는 질적으로 달랐다. 표고차가 커질수록 중력의 압박은 천근만근으로 증폭되기 마련이었다.


앞으로의 트레이닝 동안 그는 배낭 무게를 조금씩 늘려갈 작정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이 과정이 고통 속에서도 분명 성장의 발판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년 5월의 로체 남벽 등정을 준비하며, 그는 체력을 조금씩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무거운 장비와 모래주머니를 두른 채 산등선을 서너 시간씩 내달리는 건 기본이었다.


한 손 턱걸이, 팔굽혀펴기, 거꾸로 매달리기, 들어올리기, 수영 같은 훈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히말라야에서 혼자 버티기 위해서는 과학적이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8천 미터급 고지에서는 강인한 육체와 정신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모든 근육을 더욱 정밀하게 단련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몸이 고달플수록 마음은 더욱 굳건해졌고, 정신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투명해졌다. 인간의 한계를 매일 갱신하는 훈련은 더 이상 고행이 아닌, 오히려 해방의 순간이 되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로체 남벽을 향해 있었다. 그곳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도준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그 운명은 필연처럼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존재를 이끌어갔다.


로체의 크레바스 같은 빙벽 낭떠러지에서 친구 민혁을 잃은 후, 벌써 8년이 흘렀다. 그날의 비명처럼 터져나간 자일, 그리고 눈보라에 파묻힌 계곡의 침묵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 풀리지 않은 한으로 남았다. 영영 아물지 않을 그 상처에는 상실의 고통이 피처럼 고여 있었고, 도준은 자신이 민혁 대신 살고 있다는 죄의식을 좀처럼 떨쳐낼 수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곱씹었다.


그때 내가 먼저 내려갔더라면...’


한순간의 우연이 결국 생과 사의 향방을 엇갈리게 했다. 되돌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그 찰나의 순간. 이제 남은 건, 민혁 대신 숨을 쉬고 있다는 살아남은 자의 뼈아픈 자각과 아직 말라붙지 않은 상흔뿐이었다.


도준과 민혁은 고등학교 시절, 우이동에서 출발해 북한산 백운대 능선을 오르던 첫 동계 등반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둘은 말없이 통하는 동질감을 느꼈고,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깊은 교감이 형성되었다. 산을 향한 순수한 열정은 곧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졌고, 청소년기의 그들의 관계는 바위처럼 단단해져,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이 뿌리내렸다.


민혁은 작은 체구에서 비롯된 놀라운 끈기와 추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산을 대하는 감각은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밴 듯 정확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선두에 서서 길을 여는 대담함이 있었다. 다만, 긴 호흡으로 먼 걸음을 내딛는 일에는 다소 서툴렀다. 도준과 민혁은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지녔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서로의 장단점을 파악하며 상호 보완적인 자일 파트너가 되었다. 험난한 고비마다 함께 견뎌낸 세월은 그들의 동지애를 더욱 굳게 다져주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비가 조용히 내리던 오후였다. 도준과 민혁은 모리스 에르조그의 최초의 8000미터를 처음 펼쳐 들었다. 1950, 프랑스 원정대가 인류 최초로 안나푸르나에 오른 기록이 담긴 책이었다.


원정대의 리더였던 에르조그는, 손가락과 발가락 대부분을 잃는 대가를 치르면서도 정상에서 느낀 황홀한 기쁨을 생생히 전했다.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인간 정신의 불꽃이, 페이지마다 깊게 새겨져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산악인들의 성서처럼 전해져 온 이 책의 첫머리에는 그의 목소리처럼 짧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한 문장이 있었다.

 

There are other Annapurnas in the lives of men.


사람들의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가 있다.

 

책장을 넘기며, 도준과 민혁은 오직 무산소 등반만이 주는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구상에는 모두 14개의 8000미터급 봉우리가 있다. 그중에서도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곳은 로체 남벽이었다. 수많은 산악인의 우상이던 라인홀트 메스너조차 끝내 오르지 못한, 악명 높은 벽. 성난 짐승처럼 거칠고 잔혹한 그곳이, 오히려 더욱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왔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989, 폴란드의 전설적 등반가 예르지 쿠쿠치카가 로체 남벽 8,350미터 지점에서 추락해 생을 마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 산악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아무도 넘지 못한 벽이 있다는 사실이 모두의 흥미를 자극했다. 도준과 민혁 역시 이 사건에 깊은 자극을 받은 터라, 마침내 로체 남벽을 향한 현실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자. 언제까지 꿈만 꿀 거야?

-메스너는 중간에 포기했고, 쿠쿠치카는 꼭대기에서 밧줄이 끊어졌지. 우리가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진 않아. 둘 다 알파인 스타일로 도전했잖아. 관건은 속도야. 최대한 빨리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

-쿠쿠치카가 8,350미터까지 갈 수 있었던 건, 파트너가 있었기 때문일 거야.

-그들은 실패했지만, 우린 다를지도 몰라.

-우리가 해낸다면 세계 최초야. 메스너도 우리 이름 보면 놀라겠지?

-신문에 우리 얼굴 나오면, 메스너도 씁쓸하겠지. 근데 어쩌겠어. 우리가 미래인 걸.


그해 가을, 마침내 네팔 땅을 밟은 두 청년의 눈빛은 결연한 의지로 불타올랐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한 결단의 순간, 이제는 그 무엇도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운명처럼 다가온 도전 앞에서, 그들의 결심은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굳건했다.


루클라까지 비행기로 이동한 뒤, 남체와 탕보체, 추쿵을 지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그들은 중앙 루트를 개척하며 8,511미터 정상까지 단숨에 오르겠다는 열망으로 가슴이 뜨거웠다. 로체샬을 7,100미터까지 오르며 고소 적응을 마친 뒤, 라마제를 올린 다음 드디어 본격적인 등반 길에 나섰다. 6,400미터, 아슬아슬한 마의 구간을 간신히 넘은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위협적으로 치솟은 급사면을 따라 쉼 없이 올라갔다. 하늘은 내내 맑았고, 이대로라면 곧 정상을 밟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었다.


-조금만 더 힘내.

-네 걱정이나 해.


두 친구는 서로를 다그치듯 격려하며, 한 번 떨어지면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몸을 위로 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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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작년 4, K2 등정을 마치고 스카르두와 이슬라마바드를 거쳐 카트만두로 돌아온 도준은 곧장 네팔 관광청으로 향했다. 로체 남벽 등반 허가증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그곳, 친구 민혁이 목숨을 잃었던 바로 그곳. 가혹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남벽. 다시 그 벽에 도전장을 내민다는 것은 더 이상 한때의 목표가 아니라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K2에서도 그는 최소한의 장비만 지닌 채 알파인 스타일로 단독 등반을 감행했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홀로 서는 것, 혹독한 고독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꿈꾸던 등반의 방식이었다. 그 길은 민혁과 함께 시작한 길이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둘은 알파인 스타일로 로체봉을 오르겠다는 꿈을 나누어 왔었다. 그러나 이제 민혁은 없다. 그저 그의 흔적이 남아 눈 덮인 산맥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을 뿐이다.


-민혁아. 이제 내가, 우리의 꿈을 이어갈 거야.


해발 8천 미터가 넘는 고지까지 산소마스크도 없이 홀로 버티겠다는 결심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번 도전은 더 이상 그저 한 번의 등반이 아니었다. 친구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도전이기도 했다.


혼자서 로체 남벽을 오른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불러오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6400미터 지점, 클라이머에게 최악의 난관으로 여겨지는 그곳. 가파른 설빙이 널브러져 있어 안전하게 비박할 곳조차 찾기 어려웠고, 자일에 몸을 의지한 채 절벽에 매달려,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조금만 방심해도 돌풍에 휘말리거나, 확보 지점이 무너지며 깊은 크레바스로 추락할 수 있었다.


-크레바스의 끝은 지구 반대편까지 뚫려 있다고 하더라.


언젠가 민혁이 농담처럼 남긴 말이 떠올랐다. 도준은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왜 또다시 고독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가. 무엇을 위한 증명인가. 나만의 고집일까, 아니면 치기 어린 아집일까. 아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것은 단 하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보고 싶은 열망뿐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매킨리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한 선배가 무심한 듯 충고했다.


-앞으로 길어야 몇 년이나 더 현역으로 뛰겠냐. 체력에도 한계가 있어. 산에서 죽을 생각 아니면, 이제 슬슬 먹고살 궁리 좀 해야지.


도준은 그 조언을 묵묵히 들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다짐뿐이었다. 신은 인간의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한계란 결국 인간 스스로가 그어놓은 선일 뿐이다. 그는 나이 들어감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월과 함께 조금씩 닳아가는 것이 나이 아닌가.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무덤에 비석 하나 세우고 이름을 새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그런 부질없는 명예와 이기심에 더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생의 종착역에서, 남이 정해준 꿈을 좇는 삶은 끝내고 싶었다그는 이제 자신의 꿈을 향해 걸었다. 도준이라는 이름은 국내에서 제법 알려진 등산가였지만, 삶의 본질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방랑자에 가까웠다. 1987, 독일의 한 회사에서 제작한 특수 차량으로 3년에 걸쳐 세계를 일주했다. 적도에서 극지까지, 산간 오지마을에서 대도시까지 정해진 경로 없이 여행하며, 배터리 성능을 실험하면서 다양한 사진을 찍고 그 모든 과정을 기록했다.


그 여정의 기록들은 한 시사 잡지에 연재되었고, 한동안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판에도 실렸다. 그렇게 떠도는 동안 그는 깨달았다. 너무 멀리, 너무 길게 내다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멀리서 보면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 비로소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렇게 바람처럼 떠돌며 어느새 서른다섯이 되었다. 여전히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는 여성들이 드물지 않았다. 강인하고 야성적인 외모와, 어딘가 여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우울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매력 같았다. 방탕한 생활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 마음에 맞는 여성과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와도 오래 만나지는 못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자신이 추구하는 삶에 균열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과,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서른한 살 때, 그는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상대는 조용하고 성실한 초등학교 교사였다. 한동안 깊은 관계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정을 쌓았지만, 결국 결혼은 취소되었다. 험한 산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피한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고, 언제 그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 무게를 그녀에게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그 마음을 이해했고 두 사람은 담담히, 그러나 아쉬운 마음을 안고 헤어졌다.


산은 그의 삶을 어느 정도 제약했지만, 동시에 기대 이상의 것을 안겨주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일본 북알프스를 처음 올랐을 때부터 산은 그의 또 다른 인생이 되었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산을 오르는 것은 남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산을 내려서며 다시 오를 결심을 하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삶처럼, 오르내림의 반복 그 자체가 그의 존재였다. 더 큰 의미나 목적은 필요하지 않았다.


살아오는 동안 늘 옳은 선택만 한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아도 크게 후회되는 일은 없었다. 몇 년 전, 에베레스트를 함께 오른 오스트리아 출신 등산가는 이렇게 말했다.


-일주일 내내 일하며 일정한 수입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 산에서 영웅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보다 더 큰 극기와 용기를 요구하지요.


어쩌면 그 말은 자기 변명일지 모른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인내와 극기, 그리고 용기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위도나 고도와 무관하다. 높은 산에서든 지표면에서든 본질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도준에게 회색빛 일상은 고통이었다. 생계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본성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고독 속에서 공포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다. 그렇다. 도준은 고독과 친숙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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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김미진

 

까마귀 한 마리가 멀리서 울었다. 리듬감 있게 내딛는 발소리가 산길 위로 퍼졌다. 발목을 감싼 얇은 덧신이 낙엽을 헤치며 바스락거렸고, 뿌옇게 흩어지는 입김은 햇살 속으로 번지듯 사라졌다. 산속 깊은 계곡은 숨을 죽인 채 잠잠했다. 그 고요의 한가운데, 한 남자의 심장 박동이 울려 퍼졌다.


쿵- 쿵-


봄기운이 천천히 산등성을 타고 오르던 그날 오후, 도준은 오대산 능선을 따라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스쳤지만, 강인하게 다져진 그의 몸에서는 더운 김이 피어올랐다. 꽤 오랜 시간, 그는 같은 호흡으로 보폭을 이어갔다. 두 발이 일정하게 땅을 내딛는 순간마다 머릿속이 맑아지며 온갖 잡념이 사라졌다.


이런 의식의 공백은 그에게 익숙했다. 오직 달리는 일에만 몰두한 채, 세상의 시름에서 풀려난 무중력의 고요를 사랑했다. 등산로 끝자락을 지나자, 가파른 암벽길이 길게 펼쳐졌다. 울퉁불퉁한 화강암 절벽 앞에서도, 그의 몸짓엔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급경사의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지만, 익숙한 동작으로 거침없이 뛰어넘었다. 오대산의 거친 산길을 매일 달리며 체력을 단련해 온 그에게, 이 험준한 경사로조차 철저히 계산된 훈련 과정의 일부였다.


검은 바탕에 푸른 띠가 들어간 등산복, 얇은 폴리에스터 장갑, 길게 묶은 꽁지머리. 20킬로그램짜리 배낭에, 발목엔 모래주머니까지 찬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경사를 타고 올랐다. 두 발은 땅을 박차고, 호흡과 시선, 균형 감각이 정교하게 맞물렸다. 움직임은 빠르되 한 치의 무리도 없었다. 그는 야생의 본능과 생존의 가쁜 숨을 내쉬며, 자연의 심연 속을 달리는 한 줄기 맥박 같았다.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등줄기를 스쳤다. 그것은 그의 몸을 식히는 동시에, 주변의 공기 흐름에 몸을 맡기게 했다. 도준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바닥으로 향한 채, 발걸음과 호흡만을 따라갔다. 나무와 돌, 떨어진 잎 하나까지도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감각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때로 그는 스스로를 시험하듯, 한층 더 가파른 바위를 올랐다. 손끝과 발끝에 집중을 모으고, 중력을 거슬러 몸을 밀어 올리는 순간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시선과 속삭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산, 그리고 한 줄기 길뿐이었다.


계곡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면서, 그가 달리는 길 위에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그가 남긴 발자국처럼 땅에 새겨졌다가 곧 사라졌다. 도준의 내면에도 비슷한 밀도의 그늘이 깊이 자리 잡았다. 지난 기억과 앞으로 맞이할 고통, 그리고 끝내 닿을 수밖에 없는 고요한 결말까지.


그는 속으로 단 한 가지를 되뇌었다


달려라. 멈추지 마라.’ 


모든 판단과 감정이 그의 몸을 지배했지만, 달리는 행위 자체가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자연의 리듬 속에서 느낀 온도와 바람, 땅의 질감은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증거였다


도준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암벽과 계곡, 바람과 햇살, 그리고 심장 박동과 호흡이 하나로 맞물리며, 한 인간이 자연과 마주한 순간의 총체적 경험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오대산은 그의 몸과 함께 숨 쉬고 있었고, 도준 자신도 그 흐름 속에서 삶의 맥박을 단단히 새기고 있었다.


해발 8,511미터.


로체.


피의 계곡처럼 벌어진 기억 너머에, 깎아지를 듯한 쿠로와르가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지난 100년간의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가장 치열한 난코스로 여겨지는 로체 남벽을 완등한 이는 아직 없다. 오직 슬로베니아 출신의 저명한 산악인, 토모 체센만이 1990년 봄, 무산소 단독으로 초등정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422일 오후 5시에 출발해, 25일 오전 7시에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고 알려졌다. 62시간 만에 등정을 마쳤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발표는 곧 거센 의혹과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처음 그는 등반 중 촬영한 사진이 없다고 밝혔으나, 이후 프랑스 등산 전문지에 제출한 사진들로 다시 논란이 일었다.


그 자료들이 사실은 다른 등반가가 촬영한 것임이 밝혀지면서, 그의 이름은 신화의 정상에서 허위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경외의 정점에 서 있던 그는 한순간, 조롱과 의심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가 로체 정상에서 찍었다고 공개한 사진 속 풍경들조차, 실제 정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도준도 한때 그 악마의 벽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달라붙은 적이 있었다. 토모 체센의 등반 주장이 아직 논란에 휩싸이기 일 년 전인 198910, 그는 절친 민혁과 함께 메스너조차 21세기에나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던 그 벽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단 5일 만에 8,200미터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목숨을 거는 위기마다 서로의 눈빛 하나로 결정을 내렸고, 등반로는 마치 기적처럼 열렸다. 벼랑 끝에서 손을 내밀고, 눈사태 속에서도 로프 하나에 서로를 지탱하며 수많은 고비를 넘었다.


로체봉 정상에 거의 도달했던 그날,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하늘이 찢기듯 열리며 눈보라가 몰아쳤고, 모든 것이 눈앞에서 뒤엉키는 바람에 그들은 정상 직하의 설원 낭떠러지에서 아이스 피켈을 필사적으로 찍으며 온몸을 내던지듯 하산을 시작했다. 그때, 떨어지는 낙석에 그는 자신의 분신 같았던 친구 민혁을 잃었다. 민혁은 로체의 크레바스처럼 깊은 계곡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해발 8천 미터를 넘나드는 고봉 위에서 인간의 운명은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곳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과연 신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로체 남벽을 오를 수 있는 것인가. 때때로 그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작은 가능성과 희망을 향해 좁은 보폭이나마 한발씩 내디뎠다. 시바 신이 미소를 지을지, 아니면 분노의 화살을 쏘아댈지,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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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김미진


인호는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의문과 설명되지 않는 거리감이 남아 있었다. 말투와 표정, 시선에 이르기까지, 어딘가 어긋난 감정의 온도 차가 그를 계속 불편하게 만들었다.


기자 생활 십수 년. 익명 뒤에 숨어 정보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 말보다 눈물이 먼저였던 고발자들,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마치 진실인 듯 내보였던 그들. 그런 이들을 상대해 온 세월은 인호에게 사람을 가려내는 직감을 남겼지만, 동시에 모든 이야기를 의심하게 만드는 나쁜 습관도 함께 남겼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목적을 떠올렸다. 도준과 SY 사건의 핵심에 놓인 두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단어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기도 했다. 인호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숨을 삼켰다.


전혀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군.’


그 순간, 조금 더 지켜봐도 괜찮겠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이 앞에서 무엇인가가 막 실체를 드러내려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더니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꺼낸 봉투 안에는 도준이 어떤 여인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포즈와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깊이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은 맑고 따뜻했다. 가늘게 실눈을 뜬 눈매와 수줍은 미소가 투명한 봄 햇살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감쌌다. 단번에 시선을 압도하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오래도록 눈길이 머무는 얼굴이었다. 침묵이 고여 있는 사진의 안쪽에서, 그녀는 말없이도 분명한 어떤 것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


-이 여자분이 그 SY라는 말씀이신가요?

-, 그래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과연, 이 사진들만으로 이 여자가 <지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의 수취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호는 섣불리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고수했다. 지금은 그녀의 말을 먼저 들어보는 편이 나아 보였다.


-, 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 편지는 가지고 오셨죠?

-, 그게 좀...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을 주셔서. 사실은...

-그럼, 안 가지고 나오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짧고 단호하게 물었다. 인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원정대는 아직 네팔에 머물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무사히 하산한 뒤, 현재 카트만두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서바이벌 키트와 함께 로체 정상에서 발견된 그 편지는, 도준과 각별한 사이였던 문형근이 여전히 보관하고 있었다. 한성일보에 실린 편지 전문은 그가 하산 중에 팩스로 전송한 것이었다.


-다음 주쯤, 한국원정대가 귀국할 예정입니다. 이 여자분이 SY라는 게 확실하다면, 그때 원본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이 복사본밖에 없습니다.


인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슬며시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도준이 남긴 편지를 복사한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의심과 당혹감이 어렴풋이 스쳤다.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솔직히 장담은 못 드립니다.

-그럼, 제가 왜 여기에 나온 거죠?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예라뇨...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이죠?

-이분이 수취인이 맞는지, 그것부터 판명하는 게 우선입니다. 정말로 SY가 확실하다면, 제가 최대한 돕겠습니다.

-잘 모르겠네요.

-SY 본명은 뭔가요?

-오늘은 날씨가 좋았어요.

-?

-산에 높이 올라갔다가, 굴러떨어지기 딱 좋은 날이죠.

-그게, 무슨...?

-등산 안 좋아하세요? , 안 좋아하시는구나.

-허허, 말씀을 돌리시는군요.

-.

-죄송합니다.

-...

-저기...

-...

-저는 그러니까...

-저랑... 친자매나 다름없는 친구예요.

-? 이분이... 이 여자분이요?


인호가 사진 속 여인을 가리켰다.


-SY... 서윤이에요. , ,


그녀는 다시 침묵했다. 떠오르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인호는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어떤 말이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를 바라며,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창밖으로 서울 시내의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의 녹음기는 조용히 작동하며 빨간 불빛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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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저녁 6시경, 초판 신문이 배포되자 인호는 신문사 앞에서 택시에 올랐다. 약속 장소를 남산 자락의 한 호텔 라운지로 정한 데에는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이라는 공간이 무의식중에 도준의 이미지를 불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호텔로 들어서자 라운지 창가 쪽에서 홀로 앉아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자른 머리와 매끄럽게 재단된 회색빛 바지 정장 차림. 서른 초중반쯤으로 보였지만, 인상은 또래보다 한층 성숙했다. 단정하고 절제된 옷차림과 말간 피부, 침착한 눈빛이 묘하게 어우러져 특종 분야의 전문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양손을 단정히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에서는, 첫인상과는 다른 어딘가 애잔한 기색이 느껴졌다.


-제 이름은 제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인호도 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친 뒤, 신문사 로고가 새겨진 명함을 그녀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녀는 커피를, 인호는 버번위스키를 주문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테이블 위로 잔잔한 재즈가 낮게 깔렸다.


그녀의 눈빛은 꿰뚫는 듯 예리하면서도 정제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쏘아보는 건 아니었지만, 정면으로 마주한 그 시선에는 묘한 압박이 있었다. 인호는 그 눈빛이 어쩐지 불편했으나, 말이 끊겨 어색해지는 순간을 피하려 주문한 게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이름 외에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잠시 뒤, 웨이터가 커피와 위스키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인호는 숨을 고른 뒤,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신문 기사에 나온 SY를 알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사진 속 여자분이 정말 SY라는 걸 제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며 두어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손끝은 무척이나 침착했고, 입가엔 말간 김이 스치듯 흩어졌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만난 분 앞에서 꺼내는 게 쉽지 않네요. 하지만 제 친구를 위해서 용기를 내야겠죠.


그녀는 커피잔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소 엉뚱하면서도 도발적인 의문을 꺼내놓았다.


-저기... 남녀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이라는 게, 결국 뭘까요?

-그게 무슨?


인호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쾌했다기보다, 질문 자체가 너무 느닷없고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에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던 단어, 그 어색하고도 진부한 이름, ‘사랑’. 이런 이야기를,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눠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인호는 등받이에 기댄 허리가 굳어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오히려 이 만남의 본질이 바로 그 단어 안에 있다는 듯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인호를 똑바로 응시했다그것은 친구 SY를 위한 용기이자어쩌면 그녀 자신을 향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 감정의 속살 같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인호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피했다.


-지금 그게, 꼭 필요한 질문인가요?


그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다소 냉정한 어조로 덧붙였다.


-전 질문을 받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질문은, 제가 해야죠.

-, 그렇죠. 물론이에요.


제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의 반응이 무례하게 느껴졌을 법도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어진 대화 속에서 그녀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현실이 때로는 남녀 사이의 애정보다 더 단단하고 귀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세상이 부여한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도준 씨와 제 친구가 그랬어요.


제이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 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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