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행마을 방앗간> 유채 2012-14
가끔 이런 꿈을 꾼다. 수영장인지 연못인지 모를 물속에 한 타래의 머리카락이 떠 있고 그것은 검은 그림자처럼 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 나는 겨우 도망쳐 나와 풀밭을 지난 다음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는 수많은 징검다리가 놓여 있고 나는 기를 쓰며 그것을 건너간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몇 번 넘기기는 하지만 결코 물에 빠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루는 버스 정거장에서 달팽이 도사님을 만났다. 몸집은 작고 왜소했지만 수염만큼은 무척 풍성한 도사님이었다. 우연히 서로의 말문을 트게 되었는데..정말이지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던 날이었다. 이 근처에 괜찮은 찜질방이 있느냐면서 도사님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여기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찜질방 한 군데를 소개해 주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곳이라 깨끗할 거예요."
“고맙구려. 이 나이가 되면 뜨끈뜨끈한 데 가서 한참 지지고 싶거든. 그런데 시설도 어지간하겠지?"
“그럭저럭요. 숯방, 황토방 가마솥방 게르마늄방 그런 것들도 있고 참, 목욕하는 데는 초록색 물로 된 허브탕도 있어요. 어른이 들어가면 애들이 좀 싫어하긴 하지만.”
“허브탕이라! 초록색? 이거 이거, 오늘이라도 당장 한번 가봐야겠는 걸.”
나는 벌써부터 달팽이 도사님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말투나 눈빛, 은연중에 떠오른 표정 같은 것은 것들이 결코 범상치 않았다. 그것은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전혀 평범하지 않은 것, 약간 4차원적이면서도 현실과 비현실을 관통하는 그 무엇이었다. 무슨 말 끝에 달팽이 도사님이 꿈 해몽에 일가견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바짝 호기심이 당겼다. 나는 그 즉시 요즘에도 종종 꾸는 그 물귀신 같은 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신중한 표정으로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한 달팽이 도사님이 갑자기 푸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안 좋은 꿈인가요?"
“이거 참, 물과 머리카락과 징검다리라니! 당장 이사를 가는 게 좋겠어.”
난데없이 이사를 가라는 소리에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내가 괜한 소리를 꺼냈나 싶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거의 10년 가까이나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꾼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꿈은 현실의 또 다른 얼굴이다. 꿈이 상징하는 암시나 숨겨진 의미를 풀기 전까지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이사라뇨? 그건 좀 곤란한데...당장 집을 옮길 수 있는 그런 처지가 아니라서.”
“이사는 안 된다! 그럼, 하는 수 없지!”
“하는 수 없다니, 뭐, 뭐가요?”
“땅을 파는 수밖에 없어.”
“땅이요? 무슨 땅?”
“아무 땅이나 괜찮아. 이왕이면 아주 깊이 파는 게 좋을 거야. 그쪽 키 정도면 충분하겠어.”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갑자기 땅을 파라니...”
“10년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다면서? 그냥 내 말만 믿고 삽 들고 가서 무조건 아무 땅이나 파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쓸데없는 것들을 몽땅 쓸어 넣고는 다시 흙으로 덮으란 말이요.”
도사님은 열심히 땅 파는 시늉을 하더니 그 위에 흙을 덮고는 발로 꾹꾹 다지기까지 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뭔가 의미심장한 충고 같은데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거라니! 집에 있는 안 쓰는 물건들? 안 입는 옷? 혹시, 안 읽고 싸놓기만 한 책들은 아닐까? 솔직히 나한테는 안 읽은 책들이 많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껴안고 있자니 자리만 차지하는 그런 책들. 어떻게 아신 거지? 아무래도 진짜 도사 같은 걸!
그때 달팽이 도사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기 내 버스 온다! 먼저 가야겠는 걸. 그럼, 여기서 이만.”
달팽이 도사님은 손까지 살짝 들어보이고는 버스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나도 다급하게 따라 일어서며 목청을 높여 물었다.
“잠깐만요! 쓸데없는 것들이라니 그게 뭔데요?”
달팽이 도사님은 한 발은 앞으로 다른 한 발은 뒤로 한 자세 그대로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하필이면 그 순간 머플러를 뗀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리 앞을 지나갔다. 은색 철제 가방을 실은 총알 탄 오토바이라고나 할까. 정말이지 한 대 딱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요란하고도 극성스러운 오토바이였다. 달팽이 도사님이 뭔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진 건 바로 그때였다.
내 인생의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그런 한마디였는지 아니면 그냥 장난기어린 황당무계한 발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귀청을 울리는 오토바이 소음 때문에 '길쭉한'이라는 단어 외에 전혀 아무런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달팽이 도사님 바로 앞에 멈춰선 버스는 공항을 지나 시내 쪽으로 나가는 직행버스였다. 요즘 버스 기사님들은 정말로 칼 같은 운전 솜씨를 발휘하는 것 같다. 1mm의 오차도 없었다. 달팽이 도사님은 다시 한 번 손을 살짝 들어 보이더니 진짜 달팽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는 아주 천천히 버스에 올라탔다. 거대한 버스 안으로 작은 달팽이 하나가 조심스럽게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곧이어 버스는 문을 닫고 출발했다.
그날 밤, 나는 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낮에 그런 일을 겪고 어찌 맘 편히 잘 수 있겠는가. '길쭉한' 다음에 과연 어떤 말이 와서 달라붙었던 것일까. 단어 맞추기 퍼즐게임이라도 하듯 온갖 단어에 '길쭉한'이라는 형용사를 대응해 보았다. 길쭉한 소파, 길쭉한 스피커. 길쭉한 빵. 길쭉한 버터, 길쭉한 젓가락, 길쭉한 다리, 길쭉한 가래떡. 길쭉한 촛대... 이 세상에는 의외로 길쭉한 것들이 아주 많았다. 나는 결국 멀미를 느낄 지경이 되어 두 손을 번쩍 항복하고야 말았다.
“이런 호랑말코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도대체 땅에 뭘 파묻으라는 거야! 길쭉한 거 뭐? 뭐?”
허공 대고 삿대질을 하다 말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벽을 향해 돌아누운 여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나, 나를 파묻으라고? 새겨들을 말이 따로 있지. 하면서도 왠지 가슴이 서늘했다.
나로 말하면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대한민국 여성 평균 사이즈의 아담한 체구다. '길쭉한'이라는 용어를 갖다 붙일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로도 파악될 수 있다. 그렇다면 길쭉한...길쭉한 그 무엇...속이 미식미식하니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내 삶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길쭉한 뭔가가 암흑 속에서 까만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세찬 파도가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밀려오더니 거짓말처럼 빠져나갔다. 뙤약볕이 시리게 반짝였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양의 연병장 같은 백사장 주위로 삐죽빼죽한 바위 덩어리들만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더 이상 잠은 이상 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불면증이 그해 가을 내내 나를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