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덕포리 과수원>
pen and watercolor on paper, 25.1×18.3cm, 2012
줄곧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게 농촌은 가깝고도 먼 이국의 영토다. 어쩌다 차를 타고 지나는 길에 풍광이 좋아 잠시 쉬어가는 곳 정도였다고 한다면 어쩐지 무례한 발언이 될 것도 같다. 지난 주말에는 김포에 있는 덕포리에 야외 스케치를 다녀왔는데, 그림을 그리며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한국의 농촌 모습이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오늘 소개하는 그림은 <덕포리 과수원>이다. 지난주에 찍어온 사진들을 살펴보다, 이런 구도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펜을 들고 그려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딘가 이국적으로 보이는 덕포리 마을의 전경이 새롭게 다가왔다. 한동안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린 시절 내가 경험했던 시골 동네의 일상, 외갓집이자 나의 생가였던 충청남도 전의 심방리 뱀골 풍경이 옛 기억 속에 아른거렸다.
우리 외갓집은 천안에서도 한참 들어간 시골 촌구석이었다. 뒷마당 외양간에는 소와 돼지들이 있었는데, 가끔 집채만 한 돼지가 울타리를 뚫고 뛰어나오곤 했다. 그러면 큰 대문으로 나갔다가 뒷마당 작은 대문으로 다시 들어와 마당을 가로질러 달리고, 또다시 큰 대문으로 빠져나갔다가 작은 대문으로 되돌아오는 통에, 조용하던 집안은 금세 일대 격랑에 휩싸였다. 어른들은 작대기를 들고 마당 곳곳에 진을 치며 돼지를 뒤쫓느라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끼니때가 되면 할머니는 자연의 찬가게나 다름없는 집 근처 텃밭으로 나가 직접 찬거리를 뜯어오고, 새로 시집 온 외숙모는 장작불을 지펴 무쇠 가마솥에 밥을 지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는 외가 친척들도 많았는데, 서로 앙숙이 된 사람들끼리 싸움이라도 붙을라치면 난데없이 똥지게며 똥바가지들이 날아다니는 형국이 펼쳐졌다.
도시 생활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검은 색조를 구경할 수 있었던 곳도 바로 그 시골 마을에서다. 외갓집 곳곳에 놓여 있던 거무추레한 고가구들, 동네 사람들이 즐겨 신던 검은색 고무신, 할머니가 모처럼 내려온 손녀딸을 위해 군것질거리로 만들어주던 조청, 잿물을 받아 집에서 직접 만든 까만색 빨랫비누. 그 모두가 내게는 생소하기만 한 까만색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겁에 질리게 했던 검은색은 깊은 밤 들판에서 마주쳤던 거대한 어둠의 장벽이었다. 당시 외갓집에는 천안에 있는 고등학교로 기차 통학을 다니던 막내 이모가 있었다. 어느 날 밤 외조부를 따라 이모를 마중하러 나갔는데, 정말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내 손가락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이러다 텅 빈 들녘에 홀로 남겨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 불안한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연거푸 불러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딨어? 어딨어, 할아버지!”
“왜 그러니? 가만히 좀 있거라. 이제 곧 네 이모가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곧이어 할아버지가 이모의 이름을 크게 부르기 시작했다.
“정숙아! 정숙아! 거기 있니?”
근엄하기만 했던 외조부가 내게 보여주었던 아버지로서의 또 다른 면모였다. 어둠만이 가득한 들판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이 떠올랐다가 메아리처럼 번져갔고, 저기 어딘가에서 화답하듯 할아버지를 부르는 이모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외갓집에 대한 나의 추억들은 주로 겨울과 한여름에 머물러 있다. 그것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의 일이다. 그때 그 농촌의 모습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자연과 흙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채 반쪽짜리 콘크리트 인생만 살았을지도 모른다. 글이든 그림이든 평생 자신의 삶을 소재로 작업해야 할 사람에게 그것은 결코 이로운 상황이 아니다.
어느 해 여름에는 외갓집에 도착하자마자 동네 아이들 틈에 끼어 수박 서리를 한 적도 있다. 원두막에는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가 혼자 밤을 새우며 도둑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축축한 흙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엉금엉금 기어야만 했다.
거기에 같이 있던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 낄낄 웃으며 이제 콩서리를 하러 가자고 한 걸 보면 그날 밤 범행이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던 모양이다. 그러나 완전범죄는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야! 어떤 놈들이야!”
벼락같이 내지르는 목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친척 아저씨가 나타났다. 우리는 모두 꼼짝 못 하고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날 밤의 최대 재앙은 우리가 하필이면 죄다 설익은 수박들만 건드렸다는 사실이다. 어떤 것이 잘 익었는지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쿡쿡 찔러본 것이 화근이었다.
친척 아저씨는 우리가 따놓은 수박이며 여기저기 쑤셔놓은 것들까지 한데 모아놓고는 다시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니들이 다 먹어! 힘들게 농사지은 걸 그냥 버릴 수는 없잖아! 여기, 내가 보는 앞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먹어 치우란 말이야!”
친척 아저씨는 가뜩이나 큰 눈을 부라리며, 충청도 특유의 느릿한 사투리로 우리를 압박했다. 아이들은 주눅든 얼굴로 하나씩 수박을 집어 들었다. 돌에 대고 툭툭 깨트린 수박 한 덩이를 손에 들자 끈적이는 과즙이 손목과 팔꿈치를 타고 흘렀다.
먹어도 먹어도 수박은 끝이 없었다. 한 입 한 입 삼킬 때마다 뱃속이 빵빵하게 불러오고,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옆에는 아직도 씨앗까지 허연 물컹한 수박들이 쌓여 있었다. 살짝만 눈을 돌려도 수박 더미가 나를 노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러다 정말 배가 풍선처럼 터지는 건 아닐까.
그때 나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그 여름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먹는다는 행위의 고통’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