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최 관장은 회고전에 관해 몇 가지 문제점을 더 지적하다가,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목소리 톤을 낮췄다.


-명명희 선생님, 요즘은 어떠신가?

-?

-벌써 연세가 일흔 중반이잖아. 어디 예전만 하시겠어.

-, 네에.

-그래도 작업은 꾸준히 하시는 거지?

-저기매일 작업실에 계시는 것 같아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명명희 화백은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원로 화가로, 일제 강점기 시절 홀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선구적이고 독립적인 여성 작가였다. 시중에 진품을 위조한 모조품들이 횡행할 정도로, 그녀의 작품 가치는 한층 더 치솟아 있었다. 서윤이 갤러리 리온에 입사한 뒤 처음 참여한 전시도 바로 명명희 화백의 개인전이었다. 그 전시를 계기로 서윤은 선생 측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레 신뢰를 쌓아왔다.


-내년 상반기 중에 명명희 선생의 미공개작들을 모아 개인전 기획했으면 좋겠는데. 어때?

-, 글쎄요


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명명희 선생은 한동안 위작 사건에 휘말려 법적 송사를 치른 뒤로, 대외 활동은 물론 전시에서도 한발 물러난 채 지내왔다. 그 일 이후로는 외부인과의 만남마저 피하고 있었다.


-선생님 건강 더 나빠지기 전에, 특별전처럼 전시 한번 기획해 봐.

-제가요?

-이 일만 성사되면, 내가 힘 좀 써볼게.

-? 무슨

-, 모교에서 미술사 강의하고 싶잖아. 거기 학장을 내가 잘 알아. 어때, 나쁘지 않은 거래지?


최 관장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인간관계란 보이지 않는 거래와 은밀한 욕망으로 촘촘히 엮인 그물 같은 것. 그런 셈법을 읽고 조율하는 데 있어 그녀만큼 노련한 이도 드물었다.


서윤은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입시학원 강사 일을 병행하며 미술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리온에 입사한 뒤에는 문예진흥원 연구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1년간 뉴욕대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미술사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리온은 이름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화랑이었지만,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오누이 밑에서 직원들은 늘 소모품처럼 다뤄졌다. 오너의 잇속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이곳에서, 서윤의 큐레이터라는 직함은 허공에 잠시 걸어둔 명패처럼 공허했다.


언제 잘릴지 모를 현실을 떠올릴 때마다, 차라리 대학 강단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며 경력을 쌓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속내를 관장은 이미 빤히 꿰뚫고 있었다. 내년이면 어느새 서른. 리온에서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를 생각할 때, 관장의 눈 밖에 나는 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였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휴가 줄게. 당분간 갤러리에 나올 필요 없어.

-? 그게 무슨손문기 선생님 오프닝은 어쩌고요?

-손 화백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거 나도 잘 알지. 그런데 어차피 돌아가신 분이잖아. 기자들 대접하고 홍보는 최 실장이 맡을 거고, 서윤 씨가 컬렉터들을 직접 상대할 것도 아니고, 그렇지?


그녀의 청소년기를 보듬어준 옛 스승을 기리는 회고전이었다. 오프닝 행사에는 예전 방화동 화실 식구들도 몇몇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했잖아. 좀 쉬어야지. 그렇다고 마냥 무작정 쉬라는 건 아니고

-그럼

-이번 기회에 명명희 선생 작업실도 방문하고미공개 작품들이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하는 게 좋겠지? 선생 개인전 기획안도 한번 작성해 보고. , 대전 시립 미술관에 좋은 전시회 있던데 거기 포함해서 몇 군데 둘러봤으면 해. 이번 기회에 우리 리온을 위해 서윤 씨 능력을 한 번 보여줘. 지금 우리가 원하는 건 바로 그거야.


최 관장은 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했다. 우리라니. 우리속에 는 존재하는 걸까.


-알겠습니다.


서윤은 손바닥에 자국이 날 정도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곳에서 과연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창밖에는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 아득한 밤의 소음이 번져왔다. 그건 먼 우주에서 실려 온 정체 모를 수신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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