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마침내 오대산 정상에 선 도준은겹겹이 이어진 능선들을 바라보았다초봄의 골짜기마다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그 위로 맑고 싱그러운 공기가 가득 퍼져 나갔다주변은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자연이 드리운 정적 속에서, 그는 잠시 또 다른 세계의 입구에 서 있는 듯한 낯선 감각에 사로잡혔다. 배낭을 내려놓고 몸을 풀며스포츠 음료를 한 모금씩 음미하듯 마셨다차가운 이온수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전신의 세포가 마치 스펀지처럼 그것을 빨아들였다.


오늘따라 유독 민혁과의 추억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함께 자주 오대산을 오르던 시절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이 민혁의 생일이라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운 옛 친구는 로체 남벽이라는 인생의 미결 과제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겨진 자가 친구가 가졌던 그 꿈의 무게까지 이어받아야 한다.


도준은 정상 정복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정상에 오른 순간마저도 등반에 있어 하나의 과정이라 여겼다. 어떤 루트를 택하느냐, 어떤 방식으로 오르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는 등반 중 마주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분석하고, 거기서 최선의 해답을 도출하는 데 탁월했다. 특히 로체 남벽은 오랜 시간 그의 연구 목록에서 단연 최우선이었다.


도준은 이번에도 로체 남벽 8,350미터까지 최초로 오른 예르지 쿠쿠치카와 로베르트 파블로프스키의 기술을 적용할 생각이었다. 가볍고 빠른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은,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는 전통적 히말라얀 방식과 달리, 등반 루트와 속도, 시기까지 모든 판단을 스스로 내려야 하는 고독한 방식이다. 그만큼 더 큰 결단력과 강한 내면의 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경량 장비 하나로 신속하게 고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은 순수한 등반의 성취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고소에서의 급격한 기후 변화에도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동료의 도움도, 세르파도, 고정 로프도 없이 오롯이 자신만을 믿고 나아가야 하기에 위험도는 극단적으로 높고, 체력 소모 또한 혹독하다.


로체 남벽은 베이스캠프를 떠나는 순간부터 3,300미터에 이르는 가파른 설벽이 기다린다발 디딜 틈조차 없어, 앞발로 포인트를 찍으며 첫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수직 암벽에서는 수시로 눈사태와 스노우 샤워를 견뎌야 하며, 몸을 한 치씩 끌어올릴 때마다 폐를 짓누르는 공포와 맞서야 한다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하지만 등반은 정상에 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산을 끝까지 내려오기 위해서는 체력 안배가 생사의 갈림길이 되며, 올라갈 때 60을 쓰고, 내려올 때 40을 남겨두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도준은 그 모든 과정을,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은 완전한 자유 등반으로 오르겠다고 결심했다.


눈사태와 암석 낙하를 피하려면 밤과 이른 새벽, 얼어붙은 눈을 딛고 오르는 것이 유리했다. 낮 동안 폭포처럼 무너지는 눈사태를 피해 충분히 휴식하고, 한밤중 상단부를 공략해 정상을 찍는 전략이었다. 단시간 내 홀로 정상에 닿고 돌아오기 위해선 폭발적 근력과 순발력, 초인적 집중과 의지, 무릎 꿇지 않는 투지와 끈질긴 정신력이 필요했다. 로체 남벽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벽이자, 대자연의 너그러움 없이는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그 길은 어떤 이에게도 가볍게 열리지 않았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서른다섯그의 나이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체력이 바닥나기 전에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공기 희박한 허공에 매달려 직벽과 맞서 싸우며 끝까지 버텨내려면 단 한 번의 실수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도준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두려움은 어쩌면 신이 마지막까지 인간에게 남겨준 생존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수없이 맞서온 감정이지만, 이번만큼은 그 무게와 깊이가 달랐다. 이건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침묵의 경고. 정말 이 벼랑 끝에 다시 매달리겠다는 건가. 나는 거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는 스스로를 죽음에 내맡기려 하고 있다. 이게 도대체 내가 하고 있는 일이란 말인가.


-, 아니야.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잡념을 털어내자. 민혁의 이름조차 마음에서 지워버리자.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로체뿐. 저 위에서 나를 위협하는 것은 육체의 한계가 아니라, 마음 깊숙이 자리한 불안이다. 그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나는 꺾이지 않으리라. 이미 올라가기로 결심한 이상 그저 묵묵히 오를 뿐이다. 말도, 후회도, 돌아볼 이유도 없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금 의지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는 투지가 아닌, 스스로를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냉정한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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