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 무엇을 선택하고 이룰 것인가
미로슬라브 볼프.마태 크러스믄.라이언 매컬널리린츠 지음, 김한슬기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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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살면서 안고 가는 가장 큰 질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단초는 삶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낳는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답이 나와야 하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무엇을 싫어하는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저자들이 예일대학교에서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엮은 <가치 있는 삶>은 우리 삶이 제시하는 무거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낸다.

삶의 가장 큰 열망을 이루는 데 성공한 삶이 반드시 인간으로서 성공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간다움의 미학은 ‘의문’을 품고 거기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인생을 꾸려나가는 데 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을 품고 답하는 능력은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결정한다.p36

책은 세상을 살아가는 네 가지 방식과 각 방식이 품은 질문을 단계적으로 구성해 놓았다.

첫 번째 방식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동 조종 모드’으로 부를 수 있다..
다음은 의식의 영역으로 ‘효율’, ‘자기 인식’, ‘자기 초월’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효율 단계는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고민하는 단계로, 여기에서는 궁극적 목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세 번째 자기 인식 단계에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자아 성찰을 한다.
네 번째 자기초월 단계에서는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닌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단계이다.

각 단계를 1부 뛰어들기, 2부 심해, 3부 해저면, 4부 한계를 마주하기, 5부 다시 수면으로 로 구분하고 세부적으로 15장으로 구성하고 있다. 각각의 장마다 내용을 삶에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질문이 수록되어 있다.

각 장의 몇몇 질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의 몸 상태는 어떤가?
-지금 내가 가장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요즘 어떤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가?
-그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사람은 ‘길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누렸는가?
-여러분이 시간을 투자하는 활동 중 돈, 권력, 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를 얻기 위한 활동은 몇이나 되는가?
-타인이 행한 실패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여러분은 실패를 저지른 당사자가 어떻게 반응하길 바랐는가?
-여러분은 스스로의 고통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또한, 타인의 고통에는 어떻게 대응하는가? 두 대응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자아가 공허함을 깨닫고 집착을 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부처의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삶이 아무것도 아니기에 죽음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틱낫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여러분은 이 책을 읽기 전에 어떤 이상을 좇았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품게 된 이상이 있는가?
-이상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여러분을 이끄는 깊은 욕망이 존재하는가?
-스스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한 걸음을 내딛으려면 무엇을 연습해야 하는가?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워크북과도 같은 구성이다.
저자는 책을 순서대로 읽고 각 단계별 질문에 답하면서 글쓰기도 병행하기를 권한다. 정답에 이르기 위한 꼼꼼한 가정교사 같다.

각 장의 내용은 앞선 세대를 살아간 위대한 인물들의 사례를 실어 설득력을 더했다. 예수, 부처, 맹자, 링컨, 오스카 와일드 등.

링컨은 불행을 좇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으로부터 달아나지도 않았으며, 미래에 닥칠 불행을 두려워하며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았다.p77

깨달음이 주는 만족은 평범한 쾌락 또는 고통과 전혀 다른 정신적 차원에 존재한다. 깨달음으로 얻은 만족은 즉각적인 감각을 초월하는 고요함이니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은 당장 눈앞의 감정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p112

특히 부처의 주장은 우리가 당연히 좋을 것이라 생각했던 조건에 의심을 품게 한다. 돈, 권력, 명예를 가진 삶이 좋은 삶이라 생각했다면 다시 한번 고민해보기를 바란다. 이는 우리를 옭아매는 사슬일뿐인지도 모른다. <파이트 클럽>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타일러 더든은 부처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소유하려는 것이 결국 나를 소유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p139

맹자는 네 가지 미덕 중에서도 특히 사회적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미덕에 큰 비중을 뒀다.p162

400쪽이 넘는 긴 글을 꼼꼼하게 읽고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의 방향성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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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1 - 선사시대에서 고구려까지 국토박물관 순례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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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나온지 30년. 

우리나라 곳곳을, 우리 역사 구석구석을 아는 만큼 보이게 만들고 사랑하게 만들었던 유홍준교수님의 새로운 답사기가 나왔다. 

『국토박물관 순례』 


총 2권 중 1권에서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고구려의 유적지가 실려있다.

구석기시대는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신석기시대는 부산 영도의 동삼동 패총, 

청동기시대는 울산 언양, 

고구려는 중국 만주의 환인과 집안을 답사하였다.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 주먹도끼가 발굴된 과정은 드라마틱하고 낭만적이다.

미국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다 학비를 벌기 위해 공군에 입대하고 동두천 미군부대에 근무한 그레그 보엔. 한국인 애인과 한탄강 유원지로 데이트 중, 커피 끓일 불을 피우기 위해 돌을 주워 모으고 그 과정에서 구석기시대 주먹도끼처럼 생긴 돌을 발견한다. 

이후 전곡리 유적지는 국가사적으로 지정되고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게 된다. 그야말로 ‘알았기에 보였던’ 돌멩이(주먹도끼)였다. 당시 데이트를 하던 연인은 부부가 되었고 29년 후, 어린이날 구석기 축제에 초청되어 전곡리에 다시 오게 된다. 우연과 필연이 겹친 대단한 스토리이다.


유홍준 교수님은 일명 ‘구라’로 유명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냥 쏙 빨려들어간다. 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야말로 믿고 읽는 책이다.


신석기를 거쳐 청동기, 고구려를 정신없이 쫓아가다 보면 글을 읽고 있는 건지, 그림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의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지점이 온다.


이야기에 들어서게 만드는 힘.

그림을 보듯이 풍경을 그리고 장소에 호감을 가지게 만드는 힘.

그래서 그곳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마술같은 힘이 느껴진다..

고구려 고주몽의 이야기를 읽을 땐, ‘압록강은 압록강이지 뭐’가 아니라 글을 따라 내 발길이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의 빈틈없는 강의에 빨려들어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옛날 유물과 유적을 현재와 연결하여 나의 삶에서의 의미를 찾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이전과 달리 보이게 만든다. 


신석기 부산 영도 패총 이야기에서 영도가 소설<파친코>의 배경이 된 서사로 연결되고 영도를 잇는 연륙교 이야기에서 공포의 부산항대교로 이어지다보면 이전에 부산에서 택시를 타고 부산항대교를 지날 때 아찔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시간을 거슬러 역사와 이어지는 경험이 만들어지고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역사를 증언하는 또하나의 유물, 빗살무늬토기.


구석기인들이 동물적 본능으로 사물에 대한 애정과 인내를 그렸다면 신석기인들은 사물을 의식으로 파악하고 표시하려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부호화, 개념화, 상징화하려는 경향이 생겨 추상 무늬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정복’을 의미하는 생선뼈무늬를 통해 신석기인들의 식생활에 물고기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토기를 통해 6000년 전에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을 상상하게 된다.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내 존재가 어딘가 누군가와 연결되는 기분이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사랑이 느껴졌다. 이땅과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격조 높은 사랑을 받고 싶은 누구라도 읽기를 권한다.

읽고 나면 세상이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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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어루만지면 창비청소년문학 123
박영란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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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소리를 떠올려 본다. 미세한 입자들이 마주치는 소리. 이른 아침 알싸한 공기 속에서 안개와 꽃향기가 서로 부딪는 소리. 멀리서 오는 종소리 같은, 가까이서 오는 쉿소리 같은, 소리가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 준다. 처음 그 집에 발을 들이던 날, 그 순간으로.p7


시작하는 문장을 읽자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랐다. 

낮잠에서 깰 때, 지금 여기는?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시공간이 느껴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감각 안에서 어리둥절하지만 안심이 되는 그런 느낌. 무언지 모르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런 낙천성은 엄마의 생애를 통해 생긴 것이기도 했다. 엄마는 자라면서 매 시기마다 계획한 범위 안에서 일이 이루어지는 걸 경험한 사람이었다. 원하던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했으며 적절한 때에 직장을 구했고 큰 갈등 없이 결혼했다. 결혼한 후에는 계획한 대로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낳고 자산을 늘려 갔다. 엄마는 이루어질 만한 꿈을 꾸고, 그 꿈들이 현실이 되는 걸 보아 왔다. 엄마의 낙천성은 누적되어 온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p36


아버지는 이 세상에 속고, 이 도시에 속고, 직장에서 속았다고 했다. 그리고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속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결국 아버지는 혼자 장원으로 내려갔다.p49


계획한 범위 안에서 작은 성공을 쌓아온 엄마는 남편의 실패에 동참하지 않고 떨어져 지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정원 있는 낡은 집. 1층은 폐쇄되어 있고 2층을 임대하여 살기로 하였는데, 이사 첫 날 주인공인 첫째가 종소리같은 쇳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동생 준에 의해 1층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머니와 종려, 자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


숨어 사는 1층의 가족, 가족의 위기 속에 그늘지고 어두운 집에 숨어 있고 싶었던 2층의 가족이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에게 스며들어 배려하고 위로하는 일상을 만들어간다.  


‘사건의 지평선’


살면서 미분이 안 되는 어떤 지점을 만나게 된다.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가르는 어떤 순간. 

아버지에게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를 쓴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속인 건 스스로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엄마에게는 남편의 결정에 따르지 않은 순간이었다. 스스로 내리지 않은 결정으로 인한 행동은 언젠가 후회를 낳고 그 결정의 당사자를 미워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엄마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숨어 있을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다. 

주인공 역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맞는 사건의 지평선을 만나고 넘어간다. 



“집은 잘 있지?”

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 이곳이, 이 집이, 뒷산이, 그러니까 동생이 1층 사람들과 어울리던 이 시공간이 자신에게 전하는 안부가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런 준의 마음이 말 속에 담겨 있었다. 준은 혼자 이 집에 있는 동안 집 주변을 살폈을 것이다. 어떤 나무가 어떤 계절에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지, 어느 구석에 어떤 풀이 자라고 작은 동물들이 어떤 길로 오가는지, 그리고 서백자 할머니와 장희 씨, 자작과 종려가 어떤 마음으로 이 집에 드나들었을지 헤아렸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혼자 겁먹은 채 집에 남아 있던 동생을 어루만져 주었을 것이다. 

“집은 잘 있어?”

라고 묻는 건 떠나온 시공간에 전하는 준만의 통신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p150


누군가가 살던 오래된 그곳. 누군가의 삶이 무너진 자리.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가 주는 따뜻함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할머니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불안해하는 종려와 자작에게 주인공이 들려준 말을 나에게, 옆의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속삭여주고 싶다.


“아무 걱정 하지 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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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퓨테이션: 명예 1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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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읽히는 책이었다. 

마지막까지 몇 장이 남지 않았을 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사건들이 남은 몇 장 안에 어떻게  끝이 날 수 있을까? 마지막 문장을 읽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2편이 있구나. 가제본으로 받은 책은 아직 책은 출간되지 않았고, 사건의 긴박감은 절정에 달했는데 더이상 읽을 것이 없다니!(알라딘에 2권 주문 넣어두었습니다.)


책은 2021년 12월 8일의 기록으로 시작된다.


“시체는 계단 가장 아래에 있었다.”


일단 살인(?) 혹은 사고(?)가 있었고,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2021년 9월 11일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교사를 거쳐 하원의원이 된 엠마.

아내이자 엄마

성공한 여성에게 따라 붙는 여러 일들이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다.


커피, 때때로 스티키번 빵, 과장된 감사 인사, 포스트잇 메모 속 스마일 그림, 생일과 크리스마스에 선물하는 사치스러운 화장품,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는 내 모습이, 내 직원들에게서 충성심을 얻기 위해 지불하는 화폐였다.p44


하원의원으로서 성공적으로 뉴스에 등장한 날, 


엠마는 숨이 막힐 정도로 멋졌다. 화려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전달했다. 카메라가 아닌 기자를 향해 말하는 모습은 조금 딱딱해 보였지만, 열정 넘치고 진정성 있게 보였다. 데이비드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p203


그의 남편인 데이비드는 엠마의 성공에 온전히 기뻐하지 못했다. 

결국 남편은 딸의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캐롤라인과 관계가 깊어지고 이혼에 이른다. 

이혼을 겪으면서 느끼는 엠마의 감정을 수치심과 슬픔, 실패감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슬픔과 실패감은 이혼이라는 행위와 연결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왜 이 지점에서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왜 그 감정이 이해되는지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도 여러 경우에 수치심을 느끼는 엠마의 상황이 나온다.)

여성의 사회적 성공에 따라 붙는 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함께 살 때 그가 이런 모습이었다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을까? 탄탄해진 복부와 선명하게 드러난 팔다리 근육을 의식하지 않기가 어려웠다. 과거에 운동 공포증에 시달리던 전남편은 새로운 기운을 얻었고, 어린 아내로 인해 활력이 생겼다.p48


딸의 문제로 방문한 예전 자신의 집이자, 캐롤라인에게 넘겨준 집에서 만난 남편을 보며 느낀 엠마의 미안함(?)과 함께 그의 어린 아내인 캐롤라인에 대한 위축감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캐롤라인은 어떤가? 


캐롤라인은 아기가 없어 자신이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그래서 플로라를 더욱 소중히 여기기도 했다. 이번 만남이 그리 적절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그러니까 불륜으로 얻은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해낼 기회일지 몰랐다. 유일한 기회였고, 반드시 제대로 해내야 했다. p205


그 역시 자신의 지위에 자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두 여성이 다른 위치에서 결핍을 가지고 그것을 메우기 위한 노력이 부단하게 이루어진다. 


“강압적인 통제와 여성을 향한 폭력만이 아니라 인터넷이 우리 삶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지도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에요. 단순히 파괴적일 뿐 아니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어린 여성이 첫 남자친구에게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가장 가슴 아픈 방식의 모욕을 당했으니, 무엇보다 한 인간의 비극적 사건이지만, 그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녔어요.” p77


책을 읽으면서 이런 사건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그 많은 일들이 영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도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니. 여성이라는 지위의 취약성이 크게 다가왔다.


연인으로부터 불법 촬영과 인터넷 유포라는 상황에 놓인 여성의 보호를 위해 애쓰는 엠마. 하지만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딸 플로라의 순간적인 복수심에 의한 탈의실 영상 촬영 건으로 그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야말로 모두 연결된 사슬 속 한 고리였던 것이다. 


스토리가 주는 긴장과 재미와 함께 인물들의 처지와 상황에 대한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묘사가 치밀하게 이루어져 있어 촘촘하게 밀도 높은 책을 읽을 때 느껴지는 기쁨이 컸다.(넷플릭스팀에 의해 영상화가 확정될 만하다.)

남은 2권으로 그 재미를 마저 채워야겠다. 그리고 주인공인 엠마가 명예를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를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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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울을 말할 용기 - 정신과 의사에게 찾아온 우울증, 그 우울과 함께한 나날에 관하여
린다 개스크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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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1.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날.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 시간에 맞추지 못할까 차 안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안절부절 못했던 그때으 불안감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나는 이제 이 도시에서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의 속도와 규칙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기억2. 

친밀한 관계에 있는 소중한 사람이 우울증이었다. 약을 먹는 그를 걱정하자 생물학적인 결핍에 대한 도움을 얻는 것이니 절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위로를 했다. 우울증이 심할 땐, 내내 잠만 자는 그에게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냐며 물었더니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고.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를 그대로 두라고 했다. 바닥으로 내려가는 그의 상태와 함께 나도 가라앉았다. 무력감. 내가 느낀 감정이었다. 그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기억3.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유가족과의 자리에 함께 했었다.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럼에도 거리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힘들다고 했다. 고인의 삶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사회적 죽음에 공동체가 함께 슬퍼하지도 위로받지도 못한 죽음이었다. 애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통함이 남은 죽음.


책을 읽으며 떠오른 기억이다.


강하고 굳센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통념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에 대한 차별적 시선 속에서, 더군다나 약한 사람으로 보일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 존재하는 의료계에서 저자는 자신의 우울증을 고백한다. 당사자의 이야기다. 정신치료의 주체이면서 대상이다. 이중의 당사자성. 

그래서 우울증이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왜 일어나는지,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알려준다.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이 치료한 환자의 사례와 우울증과 함께 한 자신의 치료 과정이  담백하고 인간적인 말투로 차분하게 펼쳐진다. 글을 읽으면서 예전, 혹은 지금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상황들이 정리됐고 정신치료에 대해 잘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우울은 불행한 감정과는 다르다. 우울은 불행보다 훨씬 더 깊고 큰 절망감으로, 세상을 보는 눈에 색을 덧입히고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어렵게 만든다.p31


활동 수준이나 삶에 관여하는 정도는 우리의 기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기분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행동을 개선해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다.p38


불안과 두려움을 같은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둘은 꼭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두려움은 특정 자극이 유발하는 부정적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쉽게 말해 그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뚜렷하다. 반면, 불안은 신변에 뭔가 위험이 느껴지지만 그 원인이 뚜렷하지 않다. 불쾌한 감각이 몸에 느껴지고 일상적인 일들이 걱정되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불안의 대상은 우리가 아직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어떤 것일 수도 있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지만 아직 딱 짚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p42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려면 먼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내가 아버지를 잃었을 때 하지 못한 일이다. 그것은, 상실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이다.p72


불안이 무언가가 일어나리라는 두려움의 징후라면, 우울증은 두려움이 현실이 될 때 나타난다.p100


틀어진 계획_삶이라는 열차가 탈선하여 내달리는 그 혼돈의 순간에는 때로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앞으로 무엇을 바꾸면서 살아야 할지, 그리고 자신을 옥죄는 자신과 남들의 기대는 온당한 것인지, 너무 늦기 전에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다. 그런 의문에 답할 수 있다면,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이 스스로 정한 목표는 이룰 가능성이 더 높은 법이다. p109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라는 글에서 우울증과 애통함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했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해소하지 못하면, 망자의 심상이 우리 자신의 ‘자아’와 융합되어버린다. 그리고 분노가 내면화되어 이 새롭게 변화된 ‘자아’를 향하게 되면 우울증이 찾아온다고 했다.p253


정신분석가 대리언 리더는, 애도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이지만, 우울증은 그 사람과 함께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p254


우울증은 대단히 개인적인 병이다. 벌레가 사과 속을 파고들 듯 우리 영혼 속을 파고들어 자아정체감을 좀먹고, 살아갈 이유를 빼앗아간다. 우울증의 해악을 다스릴 방법은 우리 각자가 나름대로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분명히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p290


여러 사례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도움의 손길을 청하고 받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며,  우울증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고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다며 먼저 용기를 낸 저자가 있기에 세상은 손톱만큼이라도 나아지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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