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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평점 :

디지털 시대, 4차 산업혁명, 5G, 트렌드, 속도...
매일 단거리 달리기 시합을 하듯, 늘 빠름을 지향하고, 긴장하며 지내는 세월이다. 많은 사람이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멈추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시대에 '정원'이라니, '땅'이라니. 어찌 보면 '정원'을 돌보는 사람은 세상 모르는 한량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땅의 예찬>(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김영사, 2018)은 '정원으로의 여행'이라는 부제를 달고, 정원의 철학자가 전하는 땅을 향한 갈망과 사랑의 노래를 담은 책이다. 저자인 한병철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는 국내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신학을 공부했다. 그런 그가 정원사가 되어 땅에서 피어오르는 생명을 보며, 철학과 음악, 삶을 노래한 책이다.
두껍지 않고, 크지 않다. 편안하게 읽힌다.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생각을 하게 된다. 무심코 밟고 서 있는 '땅'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정원은 강렬한 시간체험을 가능케 한다.
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구든 정원에서 일하면 정원은 많은 것을 돌려준다.
내게는 존재와 시간을 준다.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이 특별한 시간감각을 불러온다.
아파트 밀집 지역에 살다가 전원주택으로 온 지 1년. 텃밭과 정원이 있는 마당을 갖게 되었는데, 사실 너무 바쁜 나머지 마당을 돌볼 틈이 없었다. 장소만 자연으로 옮겼지, 내 마음은 여전히 도시에서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새싹이 올라오고, 꽃망울을 트고, 열매를 맺는 순간의 희열을 느낀 저자의 생활방식이 무척 부러웠다. 그리고 이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이곳으로 온 이유를.
나는 자주 놀라워하며 땅을 만지고 쓰다듬는다.
땅에서 나오는 모든 싹은 진짜 기적이다.
차갑고 어두운 우주 한가운데 지구와 같은
생명의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보통은 생명이 없는 우주에서
우리는 작지만 꽃이 피어나는 행성에 산다는 것,
우리가 행성의 존재라는 것을 늘 의식해야 한다.
정원에서 보내는 매일이 내게는 행복의 날이다.
이 책은 '행복한 나날에 대한 시론'이라 불릴 수도 있으리라.
정원에서 일하고 싶다는 그리움을 자주 느낀다.
이때껏 이런 행복감을 알지 못했다.
이는 또한 매우 육체적인 것이기도 하다.
나는 육체적으로 이토록 활동적이었던 적이 없다.
이렇듯 집중적으로 땅과 접촉한 적도 없다.
땅은 행복의 원천인 듯하다.
땅의 낯섦, 다름, 그 독자적 생명에 나는 자주 놀라곤 했다.
우리는 오늘날 모두 특별한 존재이기에 할 말이 너무 많고,
소통할 것이 너무 많다.
우리는 고요함과 침묵을 잊었다.
나의 정원은 고요함의 장소, 정원에서 나는 고요함을 만든다.
나는 휘페리온처럼 귀 기울여 듣는다.
디지털화가 소통의 소음을 높인다.
그것은 고요함을 없앨뿐더러 촉각의 것, 물질적인 것,
향기, 향내 나는 색깔, 특히 땅의 무게를 없앤다.
인간(Hman)은 후무스(humus), 곧 땅으로 돌아간다.
땅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우리의 공명공간이다.
우리가 땅을 떠나면 행복도 우리를 떠난다.
인간은 흙에서 오고 결국 땅으로 돌아간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며, 늘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그게 '삶의 의미'일 것이다. 땅에서 온 생명이 땅으로 돌아가고, 또 다른 생명을 만든다는 게 참 신비로운 일이다.
<땅의 예찬>을 보며, 생명은 어디에든 있으며, 마음을 열고 보면 생명이 늘 꿈틀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지, 모든 생명체는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기억에 남는 건, 책 중간중간에 판화(에칭인가;;)로 식물의 세밀화를 볼 수 있어서 더욱 인상깊었다. <땅의 예찬>은 전원생활 2년차에 접어든 내게 땅과 생명의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해준 특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