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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100세 철학자의 대표산문선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평점 :

100세를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극히 일부의 사람에게만 허락된 축복일까. 올해로 99세 백수를 맞이한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님'을 꼭 붙여야 할 듯하다) 100년의 시간을 보내며 깨달은 바는 그 누구의 철학보다 깊고 살아 있다. 내 앞시대, 또 그 앞시대를 모두 겪어온 현자의 말은 나에게 큰 울림과 깨달음을 주었다.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김형석 교수가 그동안 기고한 글 중 대표작을 모은 것으로서, 저자의 생각과 철학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책이다. <백 년을 살아보니>도 생각을 많이 하게 한 책이었다. 요즘 내가 고민하는 것에 대한 답을 알려줬다고 할 수 있을 만큼.
100세 철학자는 워낙 유명한 학자라서 방송과 기사로도 많이 접했지만, 글로 만나는 게 나는 가장 좋았다. 대표산문집을 받아든 나는 자세도 고쳐 앉고 예의를 갖춰 읽었다. 글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존재에 대한 의문투성이의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듯, 저자는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연세가 들수록 하나 둘 떠나가는 주변인들에 대한 소회가 마음을 울렸다. 99세라고 하면 함께 지내온 사람들은 거의 떠나지 않았겠는가. 황망하고 슬픈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또 힘을 내서 살아가게 된다. 아내가 오랫동안 병을 앓았고, 결국 세상을 떠났을 때 배우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를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닫는 저자는 진정 이 세대의 철학자이다.
글마다 감동이었지만 내가 가장 감명 깊었던 글은 '내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없었더라면...에서 출발한 생각의 시작은 '그러나 내가 있다는 것도...'로 펼쳐진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세상을 떠난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한때 깊은 혼란에 빠진 적이 있고, 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이 글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만약 내가 없었더라면 누구도 내게 뜻을 두는 이 없었을 것이며
정을 붙인 사람조차 없을 것이니,
그것은 아무도 가본 일이 없는 어떤 산골짜기에
모래 한 알이 있었다는 것보다도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 아무리 작더라도 있다고 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보다는 위대하다.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며,
이로부터 세계와 우주는 그 자리와 의의가 있게 된다.
우주의 중심점이 내게 있으며 세계의 모든 무게가
나라는 초점 위에 머물고 있다.
나의 존재는 이렇게 귀중할 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전체 세계의
발단과 근원이 되고 있다.
아무도 '남아 있는 시간'을 모른다. 앞으로 30년이 될지, 50년이 될지, 하물며 하루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삶은 기대되고 아름다운 것이리라. 지금 당장 힘들더라도 그 힘듦이 계속되지 않을 것이고, 좋은 날도 평생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어떤 인생이든 굴곡이 있고, 환희의 순간이 있다. 이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마지막날 '그래도 좋았더라'라는 말 한 마디 남기고 떠나고 싶다. 늘 시간에 쫓기고, 눈에 보이는 이익만 바라보며 살았던 날을 반성하며, 이런 책을 통해 잠시 쉬어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