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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안 1 - 운명을 훔친 여자 ㅣ 아르미안 1
이유진 엮음, 신일숙 원작 / 2B(투비)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학교 다닐때 "아르미안의 네딸들" 해서 만화로 나온 것이 생각난다. 그때 하나 하나 나올때마다 달려가 보고 또 언제 나오나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뒤로 밀어지면 그 실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보고 또 보고 했던 "아르미안의 네딸들"이 이렇게 소설로 나오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그당시 책을 보면서 샤리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운명하나만 믿고 내쳐지는 행위는 그리 권할 만한 것이 못되는 듯 하다. 뒤를 보면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큰언니인 마누아는 자신을 운명안에 넣고 오직 운명만을 따르는 것을 보면 불쌍하게 생각되어진다. 물론 마누아만의 상처가 있기에 신하위에 군림하는 힘있는 군주가 되고 싶어 그런것이라 생각하지만 남녀간의 사랑도 형제들간의 사랑도 내치면서 오직 왕으로서만 살아간다. 모든 삶에는 여유 그러니까 약간 빈듯한 느낌이 있어야 행복해 보이는데 빈틈없는 삶은 행복보다는 삶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운명을 극복한 샤리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운명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누아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나의 책 보면서 받아들이는 글의 시야가 변했을 수도 있다. 그 당시에는 오로지 정의와 형제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어린 나이였고 지금은 어느정도 삶을 살아낸 어른의 입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삶을 살아가는데는 다른 이들에게 굳이 이야기하지 않고 해야할 일들이 많으니까. 그 일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 부터 어떠한 소리를 듣더라도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그것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어가는 것이 슬픈현실이기도 하다. 그래도 오로지 꿋꿋이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는 샤리 같은 이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가 행복으로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봤던 아르미안 과 지금의 아르미안이 같지만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생각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신일숙 작가가 대단하다는 사실이다. 80년대 여자가 운명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개척해서 삶의 주인공이 되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미래를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신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지금은 아주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도 작가처럼 미래지향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듯 하다.
만화로 보더라도 소설로 읽더라도.. 80년대의 나왔던 책이어도 진실은 변함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