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탈을 다 내려온 곳에서 아까는 보지 못했던 안내판을 보았다. 맹금류 축사라고 적힌 안내판이 화살표 모양으로 비탈 위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뒤처진 채로 그 앞에한동안 서 있다가 일행에게 돌아갔다.위쪽에 맹금류 축사가 있더라고 나는 말했다. 똥물이에요.저물이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
나는 그날의 나들이에 관해서는 할말이 많다고 생각해왔다.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이다.
믿음은 필연적으로 의심이라는 조작을 거쳐야 한다.의심도 해보지 않고 믿었다는 건 엄밀히 말해 행위로서의 성립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일탈이며, 그런 점에서비난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타인의 오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우리가 오해받을 만한 행동을 보여줄 때도 많다. 무책임한짓을 저지르고는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며 억울해할 때도 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평가는 언제나 다르다. 그래서 신이 필요하다. 인간이 나를 오해해도 신은 나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다는 위로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신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 진실을 알고 있다. 세상에서 그 진실을 알고있는 이는 나와 내가 믿고 있는 신뿐이다. 그러므로 가장두려운 것은 나를 억압하는 세상이 아닌 내 안의 진실을알고 있는 그분뿐이다.
세상 사람 중에는 ‘나쁜 인간을 왜 변호해줘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있다. 현재의 재판 제도를 부정하는 분위기도 있다. 언론에서는 ‘그의 나쁜 행위가 확인된 후에 심판해도 늦지 않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죄‘ 의 가능성도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문제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 또한 나쁜 인간이더라도‘ 일단은 변호해주고 싶다.왜냐하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나쁜 인간이 될 수밖에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살기 어렵다지만 매년 조금씩이나마 좋아지는 모습도 있다. 나는 그 작은 변화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어려서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겪었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고마움을 느끼는 현재의 내 모습이야말로 그 시절 나를 괴롭혔던 쓰라린 운명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