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술을 줄이겠습니다! - 마셔볼 만큼 마셔본 자를 위한 기적의 금주·절주 비법
구라모치 조 지음, 최화연 옮김 / 보누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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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코올에 쉽게 의존하는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면,의외로 평소'성실하고 우수한 사람'이 많습니다.

타인을 과하게 배려한다.

꼼꼼하고 완벽주의 성향이다.

정의감이 강하다,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한다.

집중력이 높다.

온전한 가정을 꾸리며 산다.

성실하게 일한다.

일정 기간 금주를 할 수 있다.

금주하는 동안 음주 욕구를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알코올에 쉽게 의존하는 사람은 남에게 불만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혼자 스트레스를 쌓아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술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26-)

사망 원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간 기능 장애 등 신체 질환

급성 심부전 등 돌연사

만취 중 불의의 사고

이 밖에 자살 빈도가 높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37-)

많은 사람이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에 술을 처음 접합니다. 술은 '뭐든지 할 수 있다.' 는 만능감, '모든 사람과 마음을 열고 친해질 수 있다'는 일체감 등을 불러옵니다. (-51-)

알코올이 분해될 때 만들어지는 아세트알데히드는 몸에 해로운 물질입니다. 아세트알데히드는 혈관을 확장시키는 히스타민의 분비르 촉진시키는데, 히스타민은 피부를 붉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또한 아세트알데히드가 혈류를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면 체내 곳곳에 염증을 일으킵니다. 피부에 염증이 생기면 가렵고 피부결이 거칠어집니다. (-71-)

술을 마시면 뇌에서 베타 엔돌핀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가 증가합니다. 베타엔돌핀은 뮤 오피오이드 수용체에 결합하여 쾌감을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음주할 때 쾌감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균형을 유지하려는 뇌의 성질에 따라 음주 후에는 다이놀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량이 증가합니다. 다이놀린의 카파 오피오이드 수용체에 결합하여 도파민 분비를 억제하면서 음주 후에는 불쾌한 감정이 일어납니다.이렇게 음주는 감정 기복을 만들어냅니다. (-117-)

술에 대해서, 자제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자기 스스로 술을 마시면서,감정 폭주나 행동 폭주가 일어나며,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혹은 해르 끼칠 수 있다. 술이 주는 행복이나 쾌락에 빠지다 보면 과하게 본인의 주량은 생각하지 않고,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순간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고, 그것이 자기 스스로 후회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릴 수 있다.

술은 즐겁게 마시느 습관이 필요하다.때로는 술이 약해서,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거이고, 스스로 쓰러지거나 이상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도 있다. 매스꺼움, 구토가 발생하기 때문에, 술을 절주 혹은 금주가 필요하다.이 책에는 술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소개되고 있으며,인간의 뇌의 신경전달물질에 맞췃허, 술을 받아들이지 않도록,술에 대한 절제가 가능한 상태로 바꿀 수 있다.

내 주변에 알코올 의존증에 거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수 있다. 군대에서 폭에 시달리는 군인이 술에 빠져서, 평생 군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 농사일에 바빠서, 몸이 힘든 상황에서, 술을 마시다가 알콜 의존증에 깊이 빠질 수 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다. 대체적으로 완벽한 사회생활과 성실한 사람들이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밖에서 스트레스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는 이들이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사회생활을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가정에서 술로 인해 큰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데, 폭력이나, 무절제한 행동 혹은 암이나 종양과 같은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추운 겨울, 밖에서 회식 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해서, 그것이 돌연사로 이어지거나, 몸을 가누지 못해서, 논두렁에 빠져서 사망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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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 문명사 - 유럽 이전의 바닷길
주강현 지음 / 바다위의정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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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크는 '도시'의 대명사다.우루크는 세계 최초의 도시였고, 1000년 넘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심으로 군림했다. 인류 문명사 여명기에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도시'였다.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만들어낸 도시는 우루크 이외에도 유프라테스강과 티크라테스강이 페르시아만을 흘러드는 하구에 위치한 우르 Ur, 우르 근처에 있던 수메르 도시 에리두 Eridu, 유프라테스강 재방 위의 수메르 도시 슈루파크 Shuruppak,북부의 고대도시 아카드 Akkad, 현재의 바그다드 남동부에 위치한 니푸르 Nippur,고대 바빌로니아 도시 시파르 Sippar,고대 아시리아의 수도 가우데 하나인 아슈르 Ashur, 아시리아의 수도로 티크리스강 동쪽에 위치한 니네베 Nineveh,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비빌론 Babylon 등이 있었다. (-25-)

고대 세계에서 로마의 새로운 힘이 구체화된 것은 결국 바다에서였다. 제1,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 해군이 당대에 가장 힘 있는 세력으로 등극했음을 보여준다. 시칠리아는 속주가 생겼고, 이탈리아 이외 지역을 로마가 정복한다고 선포한 계기가 됐다. 기원전 146년 로마는 마침내 카르타고를 멸망시킴으로써 카르타고를 아프리카-로마의 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같은 해 코린토스 역시 멸망했다. 700년에 걸친 번영을 자랑하던 카르타고의 모든 영토는 로마의 새로운 속주 '아프리카'로 불리게 됐다. 이로서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바닷길은 로마로 인계됐다. (-62-)

예멘 서남부에 위치한 아덴은 홍해와 인도양의 관문이었다. 아덴에는 아주 좋은 항구가 있어서 인도, 에티오피아, 이란에서 온 배와 메카의 지디 항구로 향하는 배가 모여들었다. 카이로와 지다에서 들어온 구리와 산호 그리고 지중해에서 들어온 모직물이 이곳에서 대량으로 거래됐다. 금과 향신료, 면직물, 식량은 지중해로 운반됐고, 지다의 물건은 작은 배에 실려 수에즈와 다른 항구로 옮겨졌다가 카라반에 의해 카이로나 알렉산드리아 등지로 가서 베네치아 상인에게 팔렸다 (-136-)

시라즈는 고색창연한 건물에 땅도 넓고 명망과 위용을 두루 갖춘 고도다.화려한 화원, 넘실거리는 하천, 번화한 시장, 고급스러운 거리 등 모든 것이 시리즈에 있다. 그 많은 건물이 빈틈없이 세워져 있고 구획 정리 또한 놀라울 정도다. 직종에 따라 전문시장이 있어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순한 용모에 정갈한 옷을 입고 있다. 동방에서 시장이나 화원, 강 그리고 주민이 용모 등에서 다마스쿠스와 비견되는 곳은 오로지 시라즈 뿐이었다. 평원에 자리한 이곳은 사위四圍가 화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시내를 관류하는 하천 만도 다섯 개나 된다. (-213-)

인도양은 전 세계 바다 표면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 인도양 주변에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한다. 따라서 인도 문명권 아프리카 문명권, 동남아 문명권, 이슬람 문명권 그리고 중국 문명권이 제한적으로 개입해 온 공간이다. 아프리카,서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의 다양한 종족과 언어권이 인도양이라는 하나의 '열린 호수'에서 소통하는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278-)

불교를 받아들인 몰디브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대략 12세기로 추정한다.아랍인이 당도하면서 이슬람은 급격히 확산됐다. 이븐바투타가 왔을 때 이미 이곳 주민은 청렴하고 알라에 대한 신앙심이 돈독하며 진실성을 지닌 이들이었고,식생활도 율법대로 하고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목조 전물이고, 섬마다 좋은 사원이 하나씩 있었다. 물고기와 야자나무가 그들의 중요한 식량원이었고, 야자열매로 즙과 식용유, 당밀을 만들어 먹었다. (-355-)

기원전 시기에도 인도 선원은 몬순과 해류를 잘 활용했다. 그들은 인도양 남쪽으로 바다를 바로 가로질러 인도네시아 섬으로 연결되는 항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오디샤의 칠리카 호수에서 세 노선이 선택됐을 것이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끄라지협을 통해 말레이반도를 관통하는 노선이다. 다른 하나는 후대에 개발된 믈라카 해협을 통한 노선이었다. 나머지는 수마트라 남쪽을 돌아서 순다 해협으로 접어드는 노선이었다. (-433-)

정화는 무슬림으로서 페르시아어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식민지 시대 건물을 이용한 해양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금화 1000개와 은화 5000개, 다양한 색의 자수 비단 50롤,다양한 색의 비단 태피터 taffeta 50롤, 금색 자수와 여러가지 색 비단으로 만든 보석 기치 네 쌍,빨간색의 같은 것 두 쌍, 노란색의 같은 것 한 쌍, 검은색 한 쌍, 다섯 개의 골동품 황동 향로,옻칠에 금장한 골동품 황동 꽃병 다섯 쌍과 금 스탠드,옻칠에 금으로 채색한 다섯 개의 노란색 황동 램프와 금 스탠드, 주홍색 향 그릇 다섯개, 금 옻칠 , 금 받침대, 여섯 쌍의 황금 연꽃, 향유 2500통, 왁스 양초 열 쌍, 향기로운 향 열개.

각각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내역이다. (-503-)

동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중국의 비단 공급원으로 통하는 직접 해로를 찾던 상인이 해양실크로드 지협 노선을 개척했다. 비단 공급를 찾던 인도상인은 적어도 기원 전후에 동남아시아 바다를 통해 중국으로의 긴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같은 시기, 동남아시아에서는 유례없던 규모와 명성을 뽐낸 국가인 푸난이 성립됐다. 현재의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을 이루는 메콩강 하구 주변에 위치한 푸난에 선원들이 모여들었고, 이곳에서 다양한 특산품을 사고 팔았다. 푸난의 역사적 부상은 당시 무역의 '큰손'인 인도와 중국 중심의 국제무역에서 중간 거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563-)

성명왕은 백제 성왕이다. 백제와 푸난과 일본의 관계가 엿보인다. 푸난의 물자와 인간을 백제가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알수 없다. 6세기 중엽 이미 백제와 푸난이 교섭했고, 그 결과 일본에도 푸난에 대한 정보가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백제와 푸난이 직접 교섭했는지,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를 매개로 했는지는 밝혀야 할 과제다.

푸난은 초기부터 오나라와 국교를 맺고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를 했다. (-636-)

스리위자야와 중앙 자바가 나란히 발전하는 동안 동부 자바는 상대적으로 변경이었다. 동부 자바의 항구는 믈라카 해협에서 남쪽으로 1290킬로미터나 떨어져 먼 거리였고, 외국 상인에게도 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말레이 해양세계의 가장 강력한 지역으로 부상해 11세기에 이르면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11~15세기 해양교역의 다이내믹한 중심지가 브란타스강 삼각주에 들어선다. 320킬로미터에 달하는 동부자바에서 가장 긴 브란타스강 유역이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부각되기 시작한다., (-707-)

육두구는 한반도에서 어김없이 사육해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監)》에 뚜렷하게 그 족적을 남겼다. "육두구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매운데 쓰고 독이 없다. 소화기를 조화롭게 해주고 기를 내려보내며 설사와 이질을 멎게 해준다." 라고 했다. 약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적도의 바다에 펼쳐진 향료루트가 한반도까지 이어진 결과다. 탐식하듯 향을 찾아 나선 인류는 향료를 중심으로 글로벌적 자본 운동을 추동하며 세계 무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해양실크로드의 족적이 짙게 적도의 바다에 드리웟고, 유럽까지 이어지던 수탈의 길은 오늘날까지 포트 로테르담과 그 성체에 잘 남아 있다. (-750-)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의 관점에서는 무역이 중요하며, 특히 무역품이 중요하다. 짬파의 산지에서 산출되는 수풀품 중에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이 침향 沈香이었다. 산스크리트어 아가루 Agaru 는 모두 동남아시아 원산의 침향속 수목을 가리킨다. 당나라 때 중국인은 최고 품질의 것을 특별히 침향이라고 했다.'침'이라는 말은 물보다 비중이 크기 때문에 붙었다. 나무를 잘라서 몇 년이고 쌓아두면 썩어서 마디만 남으며, 이를 물에 담그기 때문에 침향이라고 했다. 《본초강목》 에서는 물에 뜨는 향을 전향 煎香이라고 해서 구별했으며 의료 효능이 없는 싸구려라고 했다. 《양서》 에 이르길, 임읍에서 침목향이 난다고 했다. (-814-)

한 무제가 즉위하고서 기원전 111년, 한은 번국에서 이탈하여 독자 행보를 걷는 남월국을 강하게 응징한다. 많은 병사와 전함이 동원됐다. 원정대를 보낼 정도로 한의 해양력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원정군은 선루 船樓 가 있는 화남 華南의 함대였으며, 함대 지휘관을 제독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아 이미 조종술을 탁월하게 다루는 해군 병법과 지휘체계가 갖춰졌음을 알수 있다. 《후한서》 에 따르면 , 마원 馬援이 2000척의 누선을 포함한 함대를 거느리고 교지 交趾,베트남 북부 하노이 로 원정을 갔다. 당시에 누선은 대형 전선을 뜻했다. 대규모 선단을 동원해 남중국해 원정을 감행할 정도로 한의 해양력은 수준이 높았다. (-857-)

사산인은 비잔틴제국과 인도양 해상무역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하여 아라비아해와 페르시만에 다양한 항구를 경영했다. 예를 들면 오만 무스카트 같은 곳이다. 오만해의 패르시만 어귀에 있는 소하르 Sohar 등에 사산조 요새를 세워 통제했다. 사산-이슬람 제품이 대규모로 생산되어 시라프에서 수출됐다.이슬람의 부상으로 페르시아의 정치 권력은 아바스 칼리프에게 넘어갔지만, 페르시아만 연안 항구의 경제구조에 대한 영향은 미미했다. (-926-)

몽골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더 많은 땅을 찾아서 이동을 계속하는 유목민 특유의 열망이었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자면 대륙만 가지고는 불가능했으며, 바다로 나아가야 했다. 몽골의 남송 재패에서 수전 水戰이 특별히 두드러졌다. 송을 진압하기 위해 강이나 해안에서 전투가 필요했다. 세계를 모두 정복하고 마지막으로 남송을 전복한 다음, 몽골은 숙련된 선장과 승무원을 보유한 남송 함대를 앞세워 해외로 원정군을 파견했다. 남송을 수중에 넣고 나니 습윤한 아시아의 열대해가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능동적이고 해양지향적 세계관을 가진 원의 시조 쿠빌라이에게는 당연했다. 몽골제국을 하나의 큰 순환체게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초원로 이외에 유라시아를 꿰뚫는 해상교통 거점과 해로 확보가 선결과제였다. (-1006-)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부터 남중국해에서는 이미 세계경제가 활성화됐다,. 뒤늦게 이곳에 합류한 유럽인은 남중국해 권역무역에 슬쩍 편승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마침내 1557년 마카오의 작은 반도에 정착했다. 스페인 사람은 태평양을 건너와서 1570년에 마닐라에서 최적의 항구를 발견했다. 그들은 마닐라에서 중국인 300명이 넘는 무역공동체와 이슬람 족장의 작은 궁궐을 폐위시킨 일도 있다. 1590년대에 유럽의 세 번째 주자 네덜란드가 자카르타에 본거지 바타비아를 세우고, 남중국해에 당도하면서 남중국해 경제권에 참여했다. (-1082-)

이처럼 동아시아 바다에서는 몽, 고려, 일본 사이에 거친 풍랑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침내 1274년 10월 3일 여원연합국이 합포 合浦에서 출진했다. 10월 5~29일 쓰시마 서안으로 선단 450척에 3만 여 명이 들어왔다. 1280년 여원연합군이 합포에서 다시 출진해 병사 370만 명, 병선 7만 척으로 쳐들어오자 규슈 사람이 모두 도망쳤다. 1281년 몽골과 고려 병사가 7만 3000척의 큰 배를 타고 왔다. 그들은 거주하기 위해 각종 살림도구와 경작을 위한 호미와 가래 등도 가지고 왔다. 고려선 500척이 이키, 쓰시마로부터 오면서 보이는 자를 전부 죽이니 인민들이 감당을 못해 처자를 데리고 깊은 산으로 숨어들었다. 몽골 병사가 하카타로 몰려왔다. 그러나 그해 7월 30일 태풍이 불어 적선이 거의 푬몰하고 죽은 자가 수천 , 수만 명에 이르렀다. (-1141-)

1467년에는 조선왕이 류큐 왕에게 국서를 보낸다. 류큐에서 앵무새와 공작새 등 각종 선물을 보내준 것에 감사하며 이에 대한 사례로서 국서와 선물을 보냈다. 류큐 왕은 조선 왕에게 국서를 보내어 조선에서 보낸 물품이 화재로 인해 류큐에 전당되지 못함을 알리고,사례로서 국서와 선물를 보낸다. 선물 중에 목향, 육두구, 정향, 소목, 후추,앵무새 등 남방 특산이 눈에 띈다. 해양실크로드의 박래품이 조선에 당도한 것이다. (-1210-)

도자기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의 도자 기술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특히 임진왜란으로 많은 조선의 도공이 규슈로 끌려가 일본 땅에서 가히 '도자 혁명'을 일으킨다. 대항해 시대 이래로 아리타 등의 도자기 수출과는 차원이 다른 '도자의 길'이 완성된다. 유럽으로 건너간 도자 기술은 독일의 마이센 자기처럼 독창적으로 개발되기에 이른다. 일직부터 중국긔 차가 유럽으로 수출됐는데, 특히 명청 시기를지나면서 스웨덴 같은 북유럽까지 차가 수출되면서 '차의 길'이 완성된다. 영국의 스리랑카 플랜테이션으로 '홍차의 길'이 런던과 콜롬보 사이에 놓이게 된다. (-1250-)

일산 정발학연 鼎鉢學硏)과 제주도 애월바다르 오가면서, 역사민속학 인류학, 역사학을 아우르며, 해양사, 선박사, 교역사, 해양생테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해양 문명에 대한 융복합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필자 주강현의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는 1300 페이지에 달하며, 상당한 양의 해양 문명을 통섭하고 있었다.

책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을 읽게 되면, 그가 쓴 전작을 확인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도 방대하지만, 필자의 전작도 만만치 않다.그의 전작은 책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을 쓰기 위한 워밍업에 부과하다.책『해양실크로드 문명사』 은 『관해기1,2,3』, 『제주기행』,『조기 평전』,『등대의 세계사』,『독도강치 멸종사』,『환동해 문명사』,『조선 사람 표류기』,『적도의 침묵』,『등대』,『 등대여행』를 아우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의 방대한 지적 수준을 간파하였으며 , 상대적으로 책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을 소화하기 위한 해양문명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독서츷 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후회의 순간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10만년 인류의 역사는 선사시대와 고대,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전쟁의 역사이며, 정복의 역사를 포함한다. 대체적으로 「해양실크로드 문명」의 반대의 의미를 가지는 「육상실크로드 문명」을 주로 초증고 역사 교과서에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며, 우리가 역사에 접근하는 익숙한 방식이다. 육지는 바다와 달리 국경이 있고,그 국경을 넘어올 때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대비가 항상 존재한다. 통상적으로 이민이란, 육지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이지,바다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건 아니다.

육지 문명은 정복을 위한 문명을 운선하며, 바다 문명은 교류, 무역을 위한 문명을 우선한다. 지금처럼 철도, 비행기, 자동차가 없었던 16세기 이전에 바다를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누릴 수 있으며, 유럽서구 열강이 인도양윽 거쳐 인도와 중국의 향신료와 향료, 도자기를 얻기 위한 긴 바닷길 여정을 거쳤으며,거대한 배 건조기술,항해술이 발달하게 된 이유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 의 지리학은 해양실크로드의 문을 열게 된 첫 발자국이다.

그들은 해양을 정복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바다의 이치를 알기 위해 애르 쓰게 된다. 아라비아 상인, 비잔틴 상인, 페르시아, 유대인, 곤륜, 송나라 상인, 남인도 상인까지, 천문과 역법을 활용한 항해기술이 발달하였고, 별이나 암초, 돌을 이용하여, 남들이 따라하지 못하는 항해술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해상왕국 신라의 상인들, 고려의 개성상인들이 한반도를 서역에 알리게 된 이유, 백제와 푸난, 일본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일보에 편입되어 버린 사라진 왕국 류큐국까지 그들이 추구하였던 해양 문명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해얌 실크로드 문명사에서 빠질 수 없는 역사, 명나라 환관 출신 정화 제국이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의 명에 의해 7차에 걸친 정화 대원정이다.18만 km의 바닷길을 개척하였고, 그 배에 승선한 중국인도 2만여 명에 달한다. 1405년에 떠나, 1433년까지 4차에 걸친 정화대원정은 중국의 해상무역에 대해서, 항해술과 배건조술이 서구를 뛰어넘었다는 증거였으며, 콜롬비아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온 기록이 현존하고 있으며, 점점 사라지는 해양 실크로드 문명을 주도했던 이들의 발자국을 찾아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책에는 어떤 것을 교역하였는지에 따라서, 비단길, 향료길, 도자길,인삼 길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고려가 주로 인삼과 도자기, 무역을 주로 하였으며, 백제의 도공이 일본을 거쳐 해외로 배를 타면서까지 그들의 기술이 해양실크로드 길을 따라 전파된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바닷길은 지리를 모르면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6세기~11세기 활약했던 노르만족이 이끄는 바이킹Viking이 극한 환경 바다에서 추위와 음식, 질병을 이겨내며 생존하는 법을 찾았던 것처럼, 포르투갈, 스페인이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자신의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해양, 깊은 심연의 먼바다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중국해,동남아시아 스리랑카, 미얀마, 베트남은 동아시아로 거쳐가는 주요 해양거점이었고,배들이 무역 통로로 이욛되고 있었다.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확보하는 게 시급하였고, 좋은 항구를 가진 나라가 경제적으로 번성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릴 적 보았던 『신밧드의 모험 』 도 페르시아 상인에 영감을 얻은 대중적인 문화로 발전한 것이며, 현존하는 천일야화를 즐겨 읽었다.

교역과 무역으로 , 물건만 교류가 괸 것이 아니었다. 정치, 문화, 종교도 바닷길을 따라 교류가 되었으며,그들만의 언어를 익히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고대 인도 · 아리아 어 계통 산스크리트어가 해양 실크로드의 중요한 언어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며, 말레이 상인과 말레이 반도가 추구하였던 경제적 이득과 그들이 상인으로서 보여주었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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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기를 부탁해! - 미래의 내가 보낸 일기장
김희정 지음 / 두드림미디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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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격은 누가 강제로 시키면 안하는 스타일이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일기쓰기 숙제를 할 때, 한 했던 기억이 있다. 즉 숙제조차도 시키지 않아서 안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하지만 일기쓰기의 장점을 알고 난 이후, 일기를 조금씩 쓰는 습관을 만들고 있다. 일기장 이나 다이어리 대신 페이스북에 올리는 방법을 쓰고 있으며,공개 일기와 비공개 닐기를 병행한다. 대체적으로 감사 일기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 놓치고 있었던 것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있으며, 나중에 다시 되세김하거나, 회상할 수 있도록 나만의 일기쓰기 패턴을 만들고 있다. 페이스북에 일기를 쓰게 되면, 작년과 올해를 비교하게 되고, 해마다 같은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있다.특히 작년 이맘 때 상당히 추웠고, 눈이 많이 왔다. 하지만 올해는 포근한 날씨가 반복되고, 봄이 찾아온느 기분이 들 정도다.,시간을 비교하고, 장소르 비교하고, 날씨르 비교하게 된다. 글쓰기 능력, 생각의 깊이는 자연스럽게 만들어 진다. 어릴 때 모랐던 일기쓰기의 장점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다.

책 『일기 쓰기를 부탁해!』은 일기 쓰기의 방법과 목적이 나온다. 일기는 하루하루 겪은 일들이나 감정, 느낌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대체로 날짜, 날씨, 하루의 주제를 맨 앞에 쓰는 경우가 많다.일기의 대표적인 경우가 『안네의 일기』 와 『난중일기』가 있다. 개인의 일기가 그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역사적 사료로 가치가 있다는 걸,일기의 효용가치를 알수 있다.일기 쓰기에는 일상적인 기옥 뿐만 아니라, 나의 작문, 글쓰기르 일기에 남길 수 있다. 습작, 시, 소설, 에세이를 일기에 채워 나가거나,그림, 동영상도 추가할 수 있다.

일기는 기록이 목적이다. 맞춤법에 맞춰서 쓰고, 생각이나 느낌 표현하기 뿐만 아니라,동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하루하루 순간 스처 지나가는 일상을 기록하지 않면,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억하기 힘들다. 일기는 과거와 나를 현재와 비교할 수 있고, 현재의 나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다. 즉, 하루의 일상과 겪은 일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하루 나의 실수나 잘잘못을 느낌과 감정을 살려서 기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기 쓰기의 가장 큰 목적은 여기에 있으며, 나의 개인적인 일기가 앞으로 나마의 소소한 역사가 될 수 있고, 어린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나,미래의 나를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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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박람회 1851~2012
주강현 지음 / 블루&노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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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1892~1940)의 표현대로,박람회는 산업계몽에서 벗어나 차츰 상업적 물신의 순례지가 되어갔다. 만국박람회와 동시대에 탄생한 백화점에서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박람회는 백화점처럼 분류,비교의 시선을 가르치는 장소, 시대적 주류가 된 상품소비의 훈육자으로 번성해 나갔다. 초기 박람회에서 상업성은 기업자본주의에서 극대화되었으며, 이는 자동차와 전기 등을 전시한 자본의 꽃인 기업관에서 잘 드러났다. 특히 기업적 자본주의의 극대화는 뉴욕박람회에서 최고치를 보여주었다. (-10-)

발터벤야민은 만국박람회의 주기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만국박람회는 분명히 다양한 나라들에서 생산된 똑같은 제품의 가격과 품질을 가장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완전한 자유 교역을 제창하는 학파여 즐거워할지니! 만국박람회는 관세의 철폐까지는 몰라도 가격 인하는 지향하고 있다." (-62-)

프랑스의 만국박람회는 영국과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첫째, 영국이 식민지를 고려하면서 세계적으로 분산개최, 혹은 순회개최를 하였다면, 프랑스는 집중적으로 파리에서만 박람회를 열었다. 파리가 박람회도시가 된 반면,영국은 박랍회도시라고는 호칭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 1902~3년에 프랑스가 식민지 하노이에서 박람회를 개최한 사례가 확인된다. (-109-)

반면에 일본은 세인트루이스박람회에서도 놀라운 준비와 추진력을 바탕으로 미국인의 존경을 얻는데 성공했다. 단기간에 이룬 일본의 발전과 서구화에 개한 긍정적 인식, 서양의 기준과 가치가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증명했다는 믿음으로 미국은 '동양의 양키' , 혹은 '아시아의 서양 파트너' 로 일본을 인식하였다. 그럴수록 중국은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남루하고 조잡한 이미지로 간주되었다. (-147-)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만국박람회의 많은 건축은 보자르(Beaux-Arts)스타일로 지어졌다. 당시 유럽건축은 급격히 전환되고 있었으며 새로운 공식적 언어를 배우려던 시기였다. 압도적이고도 일상적인 엑조틱(Exotic) 스타일 중에서도 아르누보(ART Nouveau) 는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작지만 강력한 존재였다. (-197-)

상하이세계박람회는 중국관이 상징하는 중화주의적 정체성과 더불어 서양의 모더니티가 은밀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준 박람회이기도 하다. 미래적 모더니티를 강렬하게 드러낸 전시관 중에서 영국관을 대표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도시 이야기(A Tale of New City)'를 주제로 내건 영국관은 6만 개에 이르는 20m 길이의 투명 아크릴 촉수가 건물 외부를 덮었다. (-235-)

해양문명도시관

'바다를 통한 인류의 도전과 성취'를 주제로 내걸었다. 인류의 정신문화 유산과 해양에서 살아온 사람의 생활사를 비교해 볼 수 있는 해양문명존, 바다와 도시의 만남을 주제로 새로운 바다공간의 이용을 보여주는 해양도시존으로 나뉜다. 해양문명존에서는 카누를 비롯한 선박의 발전과정을 보면서 바다를 향한 인류의 도전과 개척정신을 느낀다. 1천 년 전 침몰한 거대한 무역선 모형에 직접 들어가 당대 항해술과 교역품 등을 본다. 수중터널에 들어서면 에너지, 식량 등의 문제를 해결한 '미래 해양도시'모습을 모형으로 만날 수 있다. (-294-)

첫째, 핵에너지가 뉴욕박람회의 핵심을 이루었다. 미국핵에너지위원회(aaec) 는 핵의 평화적 이용과 핵기술의 친밀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에너지 연구, 농업과 의료, 인간에게 요구되는 핵에너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특히 어린이 교육에 비중을 두었다. 흡사 동물원의 동물처럼 미국 원자력촌(Atomville USA)에서 아이들은 동물을 바라보듯 친근하게 핵을 접하였다. 초등학생들에게 핵에너지에 대한 원초적 친근감을 부여했다. 아이들에게 과학기술의 묘미를 심어주고 교육의 진보를 제시하고가 하였다. (-354-)

대항해 시대에 출현한 '세계의 발견'은 단순히 지리상의 대륙이나 항로의 발견이 아니라 어떤 '시선의 발견' 이기도 했다.이 시선은 '발견'된 세계에 객체로서 '자연' 의 지위를 강요하고,이를 기록 분류 배치했다. 17세기 이후 발전하여 18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박물학은 대항해 시대가 '발견'한 세계를 대항해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목하고 분류하며 배치하였다. (-407-)

1889년의 박람회 책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모두 탑승하자, 라 투렌호가 르 아브르 항을 떠난다.배가 지나는 무대 배경장치는 증기선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배 앞으로 펼처진 바다, 모여드는 여러 종류의 군함들,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우아한 모습의 고깃배들,그리고 수평선이 보였다. 좀 더 나아가 호텔이 보이는 멋진 해변에서부터 돌출한 에베 곶까지 프랑스 해안가 전체를르 선회한다. 라 투렌 호의 갑판에서 즐거운 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관람객은 이 경험을 운항 중에 출렁거림이나 앞뒤 흔들림, 배멀미 등을 걱정할 필요도 없느 안전하고 멋진 여름 유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445-)

1851년 최초의 세계박람회가 열린지 어느덧 160여 년이 된 세계박람회의 역사에서 중국이 세계박람회를 주최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1929년 저장성 항저우에서 개최된 서호엑스포 따위의 국내용 박람회는 다수 있었지만,세계적 규모의 BIE 본격 박람회는 처음이었다. 중국은 그 최초의 만남을 최대의 크기로 선보였다. (-519-)

사실 전후 일본인에게 세계박람회란 고도성장을 달성한 자신들의 사회적 자화상으로서, 전후 일본의 졍제적 부활과 고도성장의 성과를 1억 명이 자기 확신하는 장대한 기념비로서의 집합적인 이미지였다. 1970년대 이후 언론에서 오사카박람회 개막식과 이벤트 광장, 태양의 탑 이미지는 엄청난 수의 관객 동원은 이 행사가 단순한 세계박람히 이상으로 전후 일본 대중사회 내부에 자리한 그 무엇이자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563-)

세계박람회는 국가주의와 국제주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만들어진 국제적으로 상징적인 경제적인 도구였다. 주강현 작가는 세계박람횔르 박물관과 박물학,미술관의 교호라고 말한다.여기서 교호란'서로 어긋나게 맞춤;을 뜻하여, 이세가지를 서로 어긋나게 맞춰 나감으로서, 만국박람회를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1789~1794) 과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제1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공장이 들어서고, 증기기관차가 운행되면서, BIE 세계박람회 사무국에 의해 ,만국박람회가 영국 런던에서, 처음 개최된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만국박람회개최에 열을 올렸으며, 에펠탑이 있는 프랑스 파리를 문화의 도시, 만구박람회의 도시로 긍정하게 된다.유럽에서 시작되었던 만국박람회는 미국 뉴욕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세계 평화와 기술진보를 추구하였던 촞창기 만국박람회의 취지가 이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자본주의적 색체가 짙어질 수 있었다. 만국박람회는 미국으로 건너감으로서, 자본과 결합하게 되었고, 핵무기, 핵에너지를 긍정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쓰여지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지금과 다른 이질적인 만국 박람회의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상품 소기와 생산을 위한 만국 박람회가 아닌 ,인간과 인종을 전시하는 박람회가 있었으며,인간의 형상을 가진 막기가 존재하였고, 여성의 누드를 전시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만국박람회는 자본의 이동을 부채질하게 된다. 유럽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시아로 옮겨가게 되는데, 1970년 개최된 오사카 만국박람회는 일본의 근대화를 서구 유럽 열강이 긍정하게 되었으며, 일본 경제가 급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손꼽는다. 일본에 대해 서구 열강 제국주의 국가들이 긍정하는 동시에 중국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1993년 대전 엑스포가 첫 시작이었다. 물론 2012년 여수 엑스포는 해양도시 여수 이미지르 긍정하게 되었고, 바다 생태계에 대한 보전과 보호를 강조하게 된다. 여수 엑스포가 내세운 슬로건은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이었다.

엑스포에 포스트모더니즘 적인 요소가 접목되고 있었다. 1967년 몬트리올 박람회는 인간과 그 환경(캐나다 건국 100 주년 기념) 를, 1970년 오사카 박람회는 인류의 진보와 조화9종합박람회)를, 1974년 스포케인 박람회는 공해없는 전진을, 1982년 녹스빌 박람회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1985년 쓰쿠바 박람회는 인간,주거, 환경과 과학기술을, 1986년 벤쿠버박람회는 교통과 통신을, 1988년 브리즈번 박람회는 기술시대의 레저를(유럽인 호주정착 200주년 기념), 1992년 세비야박람회는 발견의 시대를, 1992년 제노바 박람회는 배와 바다를, 1993년 대전 박람회는 새로운 도약의 길을, 1998년 리스본 박람회는 해양-미래의 유산을, 2000년 하노버 박람회는 인간과 자연과 기술을, , 2005년 아이치 박람회는 자연과 지혜 재발견을, 2008년 사라고사박람회는 물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2010년 상하이 박람회는 더 좋은 도시, 행복한 삶을, 2012년 여수박람회는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을 강조하였고,엑스포 슬로건으로 채택하게 된다.

물론 엑스포 유치 성공 이후, 대전은 과학연구의 도시로, 여수는 친환경 해양도시로 긍정하게 되었으며, 이후 그 지역 인프라를 하나의 고정된 인프라로 확립될 수 있게 해주었다.2012년 여수 엑스포 개최이후, 2015년 이탈리아 밀라노 ,2017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중앙아시아 최초 개최·이슬람권 최초 개최), 2020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아랍권 최초 개최), 에서 시작되었으며, 2025년 일본 오사카 ,2027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030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작가 주경철은 만국박람회는 초자본이 모인 국가가 개최가 가능하며, 초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잇도록 도와주는 도구이자 국제적 축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자본을 모으는 목적에서 시작된 만국박람회는 이제, 환경과 자연을 우선하는 만국박람회로 그 성격이 바뀌고 있다. 기술과 자본의 만국박람회가 이젠 , 가술과 자본, 친환경의 만국박람회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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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
이천우 지음 / 북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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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장난감을 고를 때도, 잘못을 저지른 뒤 변명을 할 때도, 대학을 선택할 때도, 직장에 들어갈 때도. 아버지는 늘 그렇게 물었다. 더 노력해라, 게으름 피우지 말아라, 도망치지 말고 맞서라, 그런 말들 대신에 늘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물었다. 그 말은 집안의 가훈이나 마찬가지였다. (-15-)

어린 시절부터 진태가 받은 평가는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성실하다, 꾸준하다, 깔끔하다, 반듯하다. 분명 나쁜 말들은 아니었지만 그런 얘기를 듣고 있을 때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자신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어도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56-)

첫 페이지는 1965년 10월 6일, 다짐으로 시작했다.

금주 금연을 하면서!

이 금주 금연은 영원한 금주 금연이 아니며 나의 자립 시기까지이다. 그리고 타인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나 이것엔 약간의 예외가 따른다. (-71-)

두번째 명상록은 회상으로 시작했다.

대구에서 상고로 다니던 아버지는 무척이나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을 이유로 만류하는 형님들 때문에 한이 맺혀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때 환갑을 넘긴 나이였고 집안 문제에서는 이미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네 형님들이랑 잘 상의해 봐라, 하는 식으로 달랠 뿐이었다. (-135-)

자신을 '옥남'이라고 소개한 오십 대 초반의 여자는 아버지한테 한글을 배웠다고 했다. 자기에겐 아버지가 선생님 같은 분이었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짝사랑했었다고 했다. 그녀를 단념시키려고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를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버리느 바람에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다는 일화를 말할 때는 십대 소녀처럼 배시시 웃기도 했다. (-216-)

아버지가 실은 그러지 못했음을 진태는 알고 있었다. 그 여섯 번째 명상록 뒤표지에 붙은 종이 포켓에는, 언제든 내놓을 것처럼 곱게 적은 사직서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한 동안 ,그 꿈이 좀 더 흐릿해질 때까지 후회하지 말자는 다짐을 되뇌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그 말이 입버릇처럼 남아서 뜻하지 않게 자식들을 괴롭혔을 것이다. (-259-)

소설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 은 1940년~50년대 에 태어난 아버지가, 1960년대에 쓰다 남겨 놓은 일기장을 세 남매,. 진태,진수, 해민, 세남매가 보게 되는 이후의 변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이 세 남매는 아버지가 남긴 말 한마디가 ,그들의 가치관이자, 신념이었고, 집안 가훈이 되었다. 남매에게, 어떤 선택을 할 때, 항상 존중하지만, 마지막 말 한마디는 후회라는 단어였다. 자신이 걸아온 인생에서, 수많은 선택에 대한 후회를 채험하였고, 실패를 받아들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피난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피처였다. 첫째 진태, 막애인 해민, 그리고 둘 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는 진수까지, 장남과 차남,막내라는 역할 분담이 그들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었으며,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내와 이혼하게 된 진태, 언니를 사랑하는 성 정체성 혼란에 시달리는 해민,그리고 ,진수가 느낀 좌절, 이 세사람은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오직 자신만 그런 고통을 겪고 있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2010년 33명의 칠레광부가 매물된 것을 모티브 삼아서, 그 실화에, 소설가 이찬우 의 실화를 바탕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고민과 걱정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존재할 것이며,미래에도 나타날 거라는 걸, 세 남매가 아버지의 유품 중 하나인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난 이후 벌어지는 여러가지 상황 들이다. 일기장을 보기 전에는 오직 불행만 생각했던 그들이 일기장 하나로 불행이 아닌 새출발, 긍정의 씨앗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을 알아가는 삶의 여정이 나타나고 있다.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어떤 이들은 재도약의 기회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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