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듣고 위로를 연주합니다 - 악기로 마음을 두드리는 음악치료사의 기록 일하는 사람 12
구수정 지음 / 문학수첩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단지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 발버둥쳤을 뿐이다. 경주마처럼 목표 이외의 일들은 모두 지운 채 정면만 주시했다. 다리가 부러진 줄도 모르고 , 발톱이 바지고 살이 곪은 줄도 모르고 질질 끌면서 결승선을 향해 질주했다. 등산을 100미터 단거리 선수처럼 매 순간 힘을 다해 달렸다. 경주마의 최후가 어떤지 그땐 몰랐다. (-8-)

음악치료는 '계획-세션- 일지 기록' 이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사람들과 만나서 음악을 듣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했다면 아마도 그 모습은 음악 치료의 여러 단계 중 겉으로 보이는 면일 것이다. 그러나 한 시간 남짓한 세션을 준비하기 위해 음악치료사들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다. 우선 내담자의 나이, 성별, 직업군, 거주 지역 등을 고려해서 그에 맞는 곡목을 선택하고, 신체 조건에 맞게 악기를 고르는 '계획' 단계가 있다. 필요하다면 반주 연습도 해야 한다. 또 '세션' 이 이루어진 뒤 그 안에서 있었던 의미 있는 대화, 연주 모습, 내담자의 태도를 기억해서 일지를 '기록' 하는 단계가 있다. 일지는 다음 세션을 계획하는 데 근거가 된다. (-33-)

온종일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할머니는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무슨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무슨 노래를 알려드릴까 고민하던 나는 찬송가가 생각이 났고, 마침 가정 예배를 앞두고 있었다. 찬송가 책을 뒤적이다 배우기 쉽고 가사가 적당한 노래를 찾았다. 이 노래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101-)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이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다. 음악치료를 공부하러 온 사람들은 다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 자기 상처가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아픔을 알아채고 공감하기란 쉽지 않지. 교수님은 치료사 스스로가 음악치료로 인한 정화 단계가 없다면 진정한 치유가 되기 어렵다고 했다. 맞다. 내가 경험해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건 썩 내키지 않는다. 의도치 않은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다. 음악치료의 근본은 기술이나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또 자격증이 주어진다고 모두 좋은 치유자도 아니다. (-143-)

'모아 음악치료'는 만 3세 정도의 아이가 엄마와 함께 음악치료 세션에 참여한다. 아이가 어려 혼자서 세션에 참여하기 어렵고, 엄마와의 애착이 부족한 아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 여섯, 엄마 여섯으로 구성되어 20분간 세션이 진행된다. (-191-)

언젠가 특수 학교에서 음악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교문 밖에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인다. 지친 표정의 부모님은 아이가 나오자 해처럼 밝은 얼굴로 아이를 맞이한다. 아이는 부모님을 보고 천사처럼 달려가 안긴다. 몸은 고되지만 찰나의 기분들이 삶을 계속하게 한다. 장애 아동의 가정은 아이의 뒷바라지를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온 삶을 바치는 고래 같은 부모들이 많다. 특히 성장하면서 또래보다 덩치가 더 커지는 아이들은 엄마나 할머니가 감당하기 어려워 아빠가 돌보기로 한다. 일부 가정은 그런 상황이 힘들어 이혼을 한다. (-233-)

위로, 치유,치료, 이 세가지는 비슷한 듯하면서 다른 의미를 지닐때가 있다.감정과 생각이 이 세가지와 연결되며, 행복, 치유,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 내 안에 무언가 빠뜨린 것 같은 기분이들 때,불안하고, 우울하고, 허기짐을 채우고 싶어진다.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치유가 필요한 순간이다.

삶, 그리고 죽음, 음악치료가 가장 필요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족이 사망했을 때, 무언가 해결되지 않을 때, 나의 의지와 무관한 일이 나타나ㅓ 나르 불행하게 할 때, 그 상황에 맞는 음악을 듣게 되면, 심리적인 안전과 평화가 나타날 수 있다. 결국 나에게 이로운 삶이 나에게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 상처를 입은 경험은 음악치료사가 되었고, 자신이 겪은 상처를 타인의 상처를 통해, 기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즉. 이 책은 음악 치료가 필요한 내담자와 음악치료사가 서로 만나서, 행복과 기쁨을 얻어가는 과정을 에세이에 녹여내고 있었다. 우리 삶 속에 여러가지 문제들이 , 상처와 사연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받고 싶은데 공감받지 못할 때다. 음악치료사느 상철르 입은 사람들이며, 그 상처로 인해 내담자의 상처에 공감하여 전화시키는 음악치료 작업을 시작한다. 음악치유 과정을 통해서 일상으로 회복과 평화로운 일상을 내 것으로 바꿔 나갈 수가 있다. 누군가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회복 과정을 한 권의 책에 담아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회사원 서소 씨의 일일
서소 지음, 박현주 그림 / SISO / 2023년 2월
평점 :
절판











서소 씨는 빌라 계단에 묶어두었던 자전거를 꺼내 낑낑대며 짊어지고 내려왔다. 오랜만에 꺼내는 자전거였다. 그 자전거는 서소 씨가 이혼을 하자마자 구입한 첫 번째 물건이다.

이혼에 관한 모든 절차를 마치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던 그날, 서소 씨는 여러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잘 좀 살아보려 했던 인생인 쫄딱 망해버린 것만 같은 자괴에 속이 울렁거렸다. (-43-)

나이를 배제하기 위한 노력들을 열심히 했다. 어린사람들이 나에게 불만을 말할 수 있도록 몹시 공을 들였다. 공감의 제스처를 취하며 열심히 듣기만 했다. 머뭇거리던 아이들은 점점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불만을 말했기에 나도 말했다. 어린 사람에게 내가 나이로 밀어붙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 같은 걸 하지 않고 당당하게 필요한 것을, 섭섭한 것들을 말했다. (-142-)

아버지는 1950년 1월에 태어났습니다. 1951년 1.4 후퇴가 있었고 아버지는 당시에 두 살이었어요. 국사책 같은 데서 보셨듯이 원래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보이던 전쟁이었는데 중공군이 투입되면서 뒤집혔죠. 할머니께서는 자식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러던 중 할머니가 아버지를 리어카에 싣고 가다가 떨어뜨렸는데 알지 못한 채 그대로 가버렸고, 뒤에 가던 피난민이 아줌마, 애 떨어졌어요, 라고 말해줘서 아버지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211-)

"아니, 내년 크리스마스. 그때까지만 기다려주면 안돼? 나 아마도 그때까지 5억은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머지 5억원도 곧 갚을 테니 감시만 풀어달라고 할게. 그렇게만 된다면 나머지 5억 갚을 때까지 자주는 아니더라도 , 우리 가끔은 만날 수 있을 거야. 믿기지 않고 당황스럽겠지만, 나도 오빠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나를 믿고 내년 겨울까지 기다랴주면 안 될까?" (-295-)

노트북을 들고 나와 카페에 갔다. 커피를 주문하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었다. 그녀의 계정을 찾아가서 사진, 그녀의 친구목록, 그녀의 게시물과 댓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다시 보니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게시물에 달린 댓글 중에는 그녀를 실제로, 그러니까 오프라인에서도 알고 지내는 사람이 달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댓글은 하나도 없었다.'소통해요','페친해요' 따위의 메시지와 서로를 누구님 하고 부르는 사람들의 댓글만 있었다. (-341-)

내 앞에 놓여진 인생 이야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일상에서,지혜를 배우고, 삶과 경험을 얻게 된다. 결국 우리 스스로 지식과 지혜를 얻는 궁극적인 목적은 삶을 견디기 위함이었다. 언젠가 세상과 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오늘 봤던 사람이 내일 볼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하는 가운데,우리는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한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책 『회사원 서소 씨의 일일』 은 독특했다. 에세이,산문집으로서, 10년간 일을 해온 회사원 서소 씨의 평범한 일상을 들어다 볼 수 있었다. 책을 쓰려고 책을 쓴 건 아니었다. 회사에서 억울하게 정직 4개월을 당했기 때문이다.여기에 휴직 1개월을 더해 5개월동안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50일간의 여유시간을 그는 알뜰하게 쓰고 싶었다. 10년 동안 회사원으로 일했기에 , 해보지 못한 것을 한다는 것, 서른 후반에 자기의 삶과 경험을 바꾼다는 것은 똑같은 상황에 놓여지는 이들이라면, 이렇게 하긴 쉽지 않을 듯 하다. 준비되어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다는 걸, 회사원 서소씨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비어 있으면, 불쑥 불쑥 걱정,근심이 쓰나미처럼 몰려 오기 시작한다. 일이 없다는 불안도 그러하지만 ,10년동안 내 몸에 맞춰질 일상이 갑자기 엉키기 때문이었다. 그는 워커홀릭이었으며, 항상 나만의 시도와 실험을 하게 된다. 내 몸에전립선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호르몬 검사를 하게 되었으며, 간호사가 자신의 치부를 보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항우울제 약을 복용할 수 밖에 없었다. 주어진 시간, 채워지는 삶에서, 눈앞의 삶을 영위하는데 급급하지 않는다. 삶의 여백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소소한 일상 속에 여백, 틈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조건이 내 앞에 놓여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결정을 할지 스스로 고민하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슬기로운 디지털 시민입니까? - 건강한 디지털 세상을 여는 미디어 리터러시 행동하는 어린이 시민
루차 소토마요르 지음, 이트사 마투라나 그림, 남진희 옮김 / 다봄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기로운 디지털 시민이 되려면, 슬기롭지 않은 디지털 시민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1990년대, 인터넷이 등장하고, PC 통신으로 ,전화를 이용하여, 느리지만, 인터넷을 쓰는 것이 신기했다. ADSL이 등장하고, 대한민국은 초고속 인터넷 세상이 되었다.

이제 컴퓨터와 인터넷 속도 가 빨라지면서, 디지털 문맹은 거의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지속적인 디지털 교육, 인터넷 교육이 시행되고 있다. 전통 세대,베이비붐 세대, 586 세대, 다음이 X 세대이며, 그 다음이 MZ 세대이다. MZ 세대 다음이 알파 세대다. 특히 Z 세대는 태어나자마자 디지털 미디어에 익숙한 세대로서, 손에는 항상 스마트폰이 쥐어졌다. 이런 모습은 인터넷 ,SNS 를 활용한 커뮤니티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초창기 탱크 폰처럼 생긴, 상당히 무거운 핸드폰은 이제 손 안에 들 수 있는 스마트폰이 되었다. 손에 쥘 수 있는 컴퓨터 시대가 열리게 된다.

작가는 왜 디지털 시민이라고 말하였는가, 이제 스마트폰으로 위키디피아, 페이스북, 넷플릭스 유튜브, 구글, 네이버, 다음 브라우저를 이용하면서, 검색으로 내가 원하는 콘텐츠와 정보를 얻는다. 우리가 SNS에서, 상대방에게 익명을 이용하여, 악플을 달고, 공격적인 언사를 내밷기 때문이다. 디지털 문명, 디지털 기기가 처음 등장한 본질에서 벗어나면서 인간의 추악한 속성이 인터넷,스마트폰 공간에 숨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슬기로운 디지털 시민이 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인터넷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책임감 있는 디지털 시민이 되어야 하며, 걸어다니면서 검색을 하고, 길을 찾으면서, 온라인 공간에서, 공손히 부탁하고, 감사하기,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존중하기,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고, 폭력을 부추기지 않는 것, 내가 원치 않는 짓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기, 친구들을 도와주기, 힘든 친구를 위로해 주는 것, 사랑을 표현하기, 부당한 것을 보고 이야기 하기 가 있다.사이버 범죄, 사이버 폭력에서 스스로 벗어나 현명한 디지털 리터러시를 학습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량치차오 평전
셰시장 지음, 김영문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량쓰순 (1893~1966) : 맏딸 ,시사 연구 전문가

량쓰청(1901~1972) : 맏아들,저명 건축학자. 1948년 3월 중앙연구원 .인문학 분야 제1기 원사로 뽑힘.아내가 바로 문학가 린후이인 임.

량쓰융(1904~1954) : 둘째 아들. 저명한 고고학자. 1948년 3월 중앙연구원 인문학 분야 제1기 원사로 뽑힘.

량쓰중(1907~1932) : 셋째 아들. 국민당 제19로군 포병장교 역임. 병으로 죽음.

량쓰좡 (1908~1986): 둘째 딸. 저명한 도서관학자.

량쓰다(1912~2001) :넷째 아들. 장기간 경제학 연구에 종사.

량쓰이(1914~1988) :셋째 딸. 사회활동에 종사.

량쓰닝(1916~2006) :넷째 딸. 신사군에 투신해 중국 혁ㅁ여에 참가.

량쓰리(1924~):다섯 째 아들. 로켓 통제 시스템 전문가. 1993년 중국과 학원 원사로 선임, (-51-)

물론 이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당시 캉유웨이가 관직사회 및 사대부 사이에서 엄청난 명성을 누리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캉유웨이는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오만했다. 다른 사람의 스승 노릇 하기를 좋아하고 고집이 세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를 경원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캉유웨이는 또 사상 측면에서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그에게 호응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세속 사람들과 전통을 옹호하는 수구파 인사들은 더더욱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162-)

큰 형님[캉유웨이] 께서는 일의 규모를 지나치게 크게 벌이고, 기상이 지나치게 예리하고, 담당하는 일이 지나치게 많고, 동지는 지나치게 적은 데 비해 거사 추진은 지나치게 관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형님을 배척하는 자, 시기하는 자, 밀어내는 자, 비방하는 자가 거리에 가득한 상황에서 황상께서는 실권이 없으시니 어찌 일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229-)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캉유웨이는 줄곧 청 황제를 복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다만 군벌들의 신의를 지나치리만치 쉽게 믿었을 뿐이다. 그는 쉬저우회의 결과 이미 위안스카이를 타도했으므로 북양군벌을 수습하려는 목적을 이루었다고 보았다.그러나 황제 복위가 어찌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캉유웨이는 이 북양 군인들이 일찍부터 조변석개하는 정치적 술수에 익숙한 자들임을 전혀 몰랐다. 이처럼 목적이 서로 판이한 회의에서 결정한 약속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캉유웨이는 오히려 그들이 파놓은 함정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326-)

쩡롄은 심지어 황제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를 참수하여 사특한 언론의 길을 막으십시오., 그런 연후에야 천하 인심이 저절로 고요해 지고 국가도 저절로 평안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술변법 2) (-446-)

량치차오는 신문을 일인 신문, 일당 신문, 일국 신문, 세계 신문으로 나눈 뒤 이렇게 설명했다. "일인 혹은 한 회사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 신문은 일인 신문이다. 일당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 신문은 일당 신문이다. 국민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은 신문은 일국 신문이다. 전 세계 인류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 신문은 세계 신문이다.중국에는 옛날 일인 신문은 있었지만 일당 신문, 일국 신문, 세계 신문은 없었다. 일본에는 오늘날 일인 신문, 일당 신문, 일국 신문은 있지만 세계 신문은 없다. 이전의 『시무보 』 와 『지신보 』를 예로 들자면 아마도 일인 신문의 범위를 벗어나 일당 신문의 범위로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540-)

쑨 선생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가. 이는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그에게 탄복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의지가 굳건해 수많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좌절한 적이 없다. 둘째, 일처리가 기민해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난 데다 특히 군중 심리를 가장 정확하게 관찰하고 가장 적절하게 운용했다. 셋째, 몸가짐이 청렴결백하여 최소한 -혹은 적어도- 자기 자신은 돈을 함부로 벌려 하지 않았고, 돈을 벌 때도 절대 개인 목적을 내세우지 않았다. (-602-)

"첫째, 국민이 정치를 경시하지 않고 항상 자기 임무로 삼도록 해야 한다. 둘째, 국민에게 정치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하는 상식을 갖게 해야 한다. 셋째, 국민에게 정치적 능력을 갖게 하여 항상 스스로 떨쳐 일어나 그 요충을 지키게 해야 한다. 대저 국민이 이 세가지 자격을 갖춘 연후에야 입헌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또 반드시 입헌정치를 건립한 연후에야 국민의 이 세가지 자격이 발전할 수 있다. 국민의 수준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앉아서 그 수준이 높아지길 기다린 연후에 입헌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망령된 생각이다. 그러나 입헌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국민의 수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는 일 또한 망령된 짓이다." 그럼 국민의 정치 소양은 어떻게 하면 높아지고, 또 이일은 누가 담당해야 하는가? (-716-)

량치차오는 마음을 모두 터어놓는다는 어투로 위안스카이에게 권유하고 있다."저는 진실로 우리 대총통께서 자기 한 몸을 바쳐 미래 중국의 새로운 영웅으로 신기원을 여시길 바라지, 과거 중국의 구태의연한 간웅처럼 낡은 파국을 보여주시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또 우리 대총통의 영예가 중국과 더불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지, 중국의 역사가 우리 대총통을 따라 함께 끊어지길 바라지 않습니다. 가슴을 두드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이 최후의 충언을 올립니다." (-837-)

당시 량치차오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서 량치차오는 한동안 공중 여론의 비난 표적이 되었으며 오랜 친구조차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좡이 량치차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당시 분위기를 대표하고 있다."형님께서 수십 년 애국심을 간절하게 유지해오셨는데 결과적으로 이제 중국이 형님의 손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형님께서는 본인의 명예가 실추되는 건 애석하세 여기지 않으셔도 되지만 국가가 망하는 것조차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시 이런 시각으로 량치차오를 바라보는 사람이 소수가 아니었다. (-960-)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정치"란 "결국 군벌 타파와 사회개선을 목표로 삼는 정치를 가리킨다." 량치차오는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친구와 인재를 더 많이 사귄 뒤 자신의 주위에서 그들을 단결시켜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했다.그는 "늘 생각에 담아두고 한시도 잊지 않았던 건 바로 동지를 규합하는 일이었다" 라고 회고했다. (-1066-)

이어서 벌어진 일도 후스의 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1922년 3월 4일 량치차오는 베이징대학 철학사의 초청으로 싼위안 대강당에서 「후스의 『철학사 대강 』을 비평함」 이란 강연을 했다. 후스의 『중국 철학사 대강』은 1919년 2월 출간되었다. 사상사적 의의로 말하자면 이 책은 철학사와 경학사의 한계를 돌파한 획기적 저작이었다. 후스 개인의 입장에서 이 책은 사상 문학계에서 그의 입지를 확고하게 마련해줬다. (-1139-)

1928년 6월 10일 량치차오는 아직도 유럽여행 중이던 량쓰청에게 편지를 보내 "베이징의 정세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 라고 알렸다. 이 때문에 이전에 말한 적이 있는 "칭화대학 교직 임용은 무산되었다""이 학교는 정당 사람들이 주도권을 다투는 장소라 오래지 않아 전체 구조를 모두 바꿔야 할 것이다. 그럼 네가 어지 발붙일 여지가 있겠느냐?" 그리고 그는 쓰청에게 둥베이[만주]로 갈 것을 권했다. (-1224-)

량치차오, 그는 1873년에 태어나 1929년 사망하였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량치차오와 쑨원을 핵심 역사적 인물로 보고 있는 이유, 량치차오가 추구하였던 중화민국의 미래를 , 『량치차오 평전』 에서 엿볼 수 있다. 그에게는 스승 망유웨이가 있었으며, 스승의 사상적 기반에 자신의 사상을 쌓아올리게 된다. 프로이트가 제자 구스타프 융을 두었지만, 구스타프 융은 프로이트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량치차오도 스승 캉유웨이와 다른 길을 걸어갔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존경심과 적대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의 근현대사,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새시대에 이끌 사상적 철학의 기반을 나름대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량치차오는 순자 사상을 비판, 성토하였고, 맹자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기에 이루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피에 의한 군벌 정치가 아닌 맹자가 꿈꾸는 세상, 인민이 원하는 민국 정치를 만들어 나간다. 그는 꾸준히 저술하였으며, 신문을 세개 창간하면서, 주필로서 글을 쓰면서, 세상에 이바지하였다.두 아내와 아홉 자녀를 두었던 량치차오는 쑨원과 연합하고자 하였지만, 그 시대적 상황이 둘을 갈라놓게 된다. 『시무보』 주필이었던 량치차오는 웅변가였으며, 달변가이기도 했다.그런 와중에 세상은 그의 앞서가는 미래의 비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비판받았고, 비난을 몸으로 견디면서 중국에서 살아가게 된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사상, 금문경학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중국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무술변법이라 부르는 변법 자강운동,의화단 운동의 실패는 그가 생각한 철학이 그 시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태후가 집권하였던 청나라 말기의 망국의 나라는 결국 량치차오의 사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읽을 수 없었으며,그의 친구조차도 량치차오가 어떠한 중국을 원하는지 읽어내지 못하였다. 서태후의 권력에 밀리기 시작한 광시제는 량치차오를 중요하여 쓰고자하였다. 돌이켜 보면 이런 일은 량치차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또한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였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것처럼, 난세엔 그 시대에 맞는 변화와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캉유웨이는 스스로 문필에 의존하는 백면서생이라 할 정도로, 학문에 매진하였지만, 그 시대가 원하는 사회적 실무에 능하지 못하였고, 주류였던 군벌 정치에 의해서 사회적 불이익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국의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명의 주역이 되면서, 량치차오가 추구하였던 사상적 배경은 어디에서 기인하였으며,그가 추하였던 맹자사상과 춘추에 근거한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 중국이 현재 노출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과 부작용에 재해서, 량치차오의 식견이 옳았음을 검증하고 있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까지 책을 놓지 않았으며, 항상 저술에 힘써왔었다. 칼이 아닌 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의 끈을 끝까지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피는 피를 부른다는 그의 사상적 배경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퇴 없이 농촌 출근 - 워라밸 귀농귀촌 4.0
김규남 지음 / 라온북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은퇴 후 내가 인생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 가장 큰 장애물은 욕심이었다. 일복 하나는 타고 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스스로 일을 만들어가며 해왔다. 일에서 해방되려면 방햐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으 깨닫고 욕심을 내려놓자 일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56-)

대략 농촌에서 직접할 수 있는 일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변기 물이 계속 빠지는 상황

갑자기 전기가 차단된 상황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는 상항

세탁기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

전기밥솥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

전구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 등(-88-)

귀농귀촌인들이 생활엣허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현지인의 텃세다. 때로는 이 문제로 인해 역귀농을 선택하기도 한다. 물론 역귀농 이유에는 주민 텃세보다 더 복잡한 여러 요인이 작용하지만 인간관계가 그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137-)

영농과 관련된 공사대금과 자재, 농약과 비료 씨앗, 묘목 등 각종 영수증은 반드시 보관해야 한다. 다연히 농협 조합원이 되면 발급 가능한 신용카드로 결제하지만, 영수증의 용도는 따로 있다. 구매르 취소하거나 농업경영체 등록, 천재지변에 의한 피해 보상 등에 반드시 필요하므로 사진을 찍어 보관하는 습관을 들이자.

농촌에서 건축이나 공사를 한다면 스스로 초보임을 자인하고 공부해가면서 진행해야 한다. 돈만 주면 알아서 해주겠지 한다거나 추진 과정에서 달콤하고 그럴듯한 말에 귀가 솔깃해지면 안 된다. 그 일과 그 분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 나중에 비싼 수업료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195-)

농업 경영체도 있고, 농협 조합원이다. 농민 수당도 받고 있다. 다만 직불금을 아직 수령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아직 귀농 귀촌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에 살면서,귀농귀촌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시골에서 태어나 경제적 이유로 도시에서 살다가,은퇴 이후 다시 농촌으로 가는 케이스가 아니라면 말이다. 태어나면서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으로 귀촌한다는 것은 농촌의 정서를 모른 채 멘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다. 지역마다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다양한 귀농귀촌 정책을 도입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온적인 이유는 귀촌 귀농하면서,여러가지 어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농촌 공동체의 터줏대감의 텃세가 바로 그런 예이며, 더 나은 선택권을 얻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다.과거와 달리, 농촌에도 1인 1가구 1자동차가 익숙하며, 트렉터,관리기 사용은 필수다. 예전엔 농촌지도소라 불리었고,지금은 농업기술센터로 불리는 곳에서는 귀농귀촌을 위한 다양한 지원책이 있으며, 농기계 임대, 농기구 수리 교육, 농사를 지을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안전문제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특히 대한민국은 농업에 다양한 특혜를 주고 있다. 금융 정책 도 여기에 해당되며, 보험이나 농지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법적인 보조가 진행되는 것도 그러하다.하지만 그러한 정책에 독이 될 때도 있다.농사를 짓기 위해서, 대출을 무분멸하게 이용하다 보면 ,금융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날 수 있다.그리고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고 말할 정도로, 환경,기후,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농사를 지을 때, 실제 농사지을 때 사용한 모든 돈의 출체를 영수즈으로 확보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그 영수증이 보상 문제에 꼭 첨부되기 때문이다.추가적으로 농사지을 때, 울타리를 치거나, 측량을 하는 것,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유의해야 한다.도시민에겐 당연한 권리가, 귀농귀촌인에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