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
민선정 지음 / 마음연결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협상력은 없어도 근면성은 갖췄다며 선배들보다 더 오래 앉아 있으려 했다. 공식적인 업무시간은 한참 전에 끝났지만 마음의 무게를 더한 엉덩이로 꿋꿋하게 버텼다.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는 선배들의 말을 철석같이 따르며 빠짐없이 참석해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19-)




되짚어 보니 소문은 이전 팀 선배들에게서 출발했다. 그냥 선배가 아닌 내 고과를 C에서 C+로 구해준 너무나 믿고 따르는 선배들이었다.내가 '외근이 없어서' 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편하다' 라고만 말해도 '적성에 맞다'로 해석할 선배들이라 생각했는데, 왜 '더 잘 맞는 직무'를 두고 '더 편한 직무' 라는 말을 골라 퍼뜨렸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미었기에 느낀 대로 술술 말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였을까. 선배들과 나 사이에 쌓인 신뢰를 가족이나 친구 사이의 신뢰와 동등하게 여긴 것이 오판이었다. 일이라는 조건이 명확한 동료 사이의 신뢰일 뿐이었다. (-29-)




아이의 상처는 잘 아물었고, 흉터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옅어졌다. 아이는 그 일 이후 사고가 난 장소에서는 놀지 않는다고 했지만, 유치원에는 다른 공간도 많았기에 그러려니 했다. 자신을 밀어 다치게 한 친구도 한동안 외면했지만, 언젠가부터 다시 같이 논다고 하기에 마음의 상처도 잘 아문 줄 알았다. (-78-)




중간에 육아휴직으로 잠시 멈추지 않았더라면 여유로운 일사으이 소중함도, 엄마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아이의 안정감도, 평일 육아를 도맡았던 남편의 고마움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의 나를 아끼고 살피는 삶이 주는 평안함을 몰랐을 것이다. 잠시 멈춰서고 나서야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껏 고장난 나침반을 들고 엉뚱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음을. (-132-)




매일 자연을 눈에 담는다. 같은 꽃도 어제 피어난 정도와 오늘 피어난 정도가 다르고 같은 나무도 어제 피어난 정도와 오늘 피어난 정도가 다르고 같은 나무도 어제 흔들린 모습과 오늘 흔들리는 모습이 다르다.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는 시간을 의무처럼 여긴다. 반드시 꼭 해야 할 일의 자리에 '자연 눈에 담기'가 있다. 돈을 주거나 받는 일이 아니니 지나치기 쉬워 내가 의지를 다져야만 한다. (-196-)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10분 정도의 여유로운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고 서성거리기 일쑤였다. 여유가 두려운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지하철, 기차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여유로운 일상이 두려웠던 건, 여유로운 일상이 사치이고,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특유의 문화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회사 내에서, 일을 하다가, 10분 정도, 커피를 마시거나, 다른 사람과 수다를 떨고 있다면, 뒷담화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현대 사회는 일과 일 사이의 시간의 틈이 점점 더 촘촘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민선정의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 를 읽었다. 회사내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온 평범한 여성이자, 한 아이의 엄마이면서, 흔한 워킴맘으로 직장인이다. 일잘러로 살기 위해서,치열하게 살아왔다. 인정받기 위해서,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여유를 촘촘하게 좁혀 나가는 전략을 스스로 선택하였고,주어진 일에 대해 선택과 집중, 몰입하였다. 육아 휴직을 쓰는 것조차도, 눈치를 봐야 했고,적절한 상황에 맞게 써야 하는 현실이 불합리 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손이 많이 가는 7살 아이에게 꼭 필요한 육아휴직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일주, 좋은 엄마, 박사 공부를 위해서,육아휴직을 선택하였건만, 결국엔 퇴직하였고, 아이와 함께 제주도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남편과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는 주말부부가 된 셈이다.




육지에서 살아온 회사원에서, 섬으로 생활 반경이 바뀌면서, 여유를 얻었고, 발밑에 무엇이 지나가는지 여유로운 삶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 느린 삶을 살수 있었고,이기적인 삶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성찰과 사색,느린 삶을 얻었다.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 ,내 시간을 쏟아부었던 그 시간이 내 인생에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서울에서,전 직장에서, 전 동료의 전화가 오면, 민선정 주인, 민선정 선임으로 불리는 작가의 근황이 궁금한 이들이 많았다. 가까이 있으면서, 직장 동료로 일할 때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몰랐던 저자는 그 공간에서 벗어나게 되니, 자신이 핵심인재였고, 일잘러로서, 열심히 살아왔다는 걸 느꼈다. 내 앞에 놓여진 삶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게 되면서,여유로운 삶,이웃을 챙기는 삶을 살면서,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