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응 열사 평전 - 4·1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
전해주 지음, 김구응열사기념사업회 외 기획 / 틈새의시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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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응 선생은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청신의숙을 운영했습니다.이후 기독교계김리교회에서 운영하던 장명학교에서 1915년부터 1918년까지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조병옥 박사의 당질이며 아우내독립만세운동으로 8개월 형을 받은 조만형 선생과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 등을 가르쳤습니다. (-12-)

7,678명의 희생자와 4만 6천 명에 이르는 부상자, 그리고 체포 구금된 인원도 5만 여 명에 이를 정도로 격렬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18-)

첫 번째로 이 지역이 장터였다는 접을 들 수 있다. 병천의 향토 역사서인 『대록지(大麓誌)』 를 보면 아내장(병천장)은 1일과 6일에 개장된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병천장은 조선 중기인 1800년 이전에 이미 생겼음을 알 수 있다. (-49-)

1919년 기미년의 한국 사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해 우리 국민은 깊은 시름과 우울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시기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토지조사사업과 집회 금지 법률을 공포하고, 종교 탄압 조치 등을 전격적으로 단행하여 십여년 동안 우리 민족을 들들 볶았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을 터다.

그러던 중 그해 1월 22일 고종황제의 돌연한 승하 소식은 가뜩이나 일본 통치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격이다. (-82-)

이화여자고등학교 발행 『이화백년사』에 다르면 유관순은 1916년 보통과에 교비생(장학생)으로 편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유관순 열사 어록'에 "나는 학교에서 청솔르 하더라도 도움을 받은 것을 갚겠다"는 마이 적혀 있을 정도로 올곧고 반듯한 학생이었다. 그녀는 정동교회의 손정도와 이필주 몫사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115-)

독립운동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으로 안창호 의사, 윤봉길열사, 그리고 유관순 열사를 손꼽는다. 특히 3.1 천안 아우내 운동을 주도하였던 유관순 열사의 업적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사 교과서에서 소개하고 있으며, 위인전 단골 주인공이기도 하다.

실제로 천안 아우내 만세독립운동은 고종황제 승하에 대해,죽음에 대한 의심을 촉발시킨 민중운동으로서, 조선 전역 인구가 1800만여명이었던 당시, 전국에서 불이 붙었던 3.1 운동에 참여한 숫자는 200만명에 이르며,그 중심에 유관순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그 당시 한양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병천에서, 아우내 만세운동이 1919년 음력 3월 1일에 계획되었다. 그것을 주도한 이는 유관순이 아닌 김구응(1887~1919) 이라고 말한다. 그 당시 면 서기관이었고, 글을 알고 있었던 김구응 열사는 유관순 열사를 포함하여, 60명의 애국지사 중 하나라고 보고 있다. 아우내 4.1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김구응열사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을 주도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12대손이며 , 조선시대 뛰어난 시인 백곡 김득신 선생의 10대손이다. 그가 애국지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그가 자신 의 목숨을 민족 독립을 위해 바쳤던 이유가 책에 적혀 있다.

한편 유관순 열사의 업적에 대한 모순도 나오고 있다. 3.1만세운동은 1919년에 일어났고, 1947년 전까지 유관순에 대해 아는 이들은 소수였다. 유관순 업적에 대해서 영웅화를 주도하였던 이들이 이화여고 가 학교의 역사를 정리하던 와중에 나타난 유관순의 삶을 부각시키기 시작하기 시작하였다.미군정하에 제작된 국정교과서에 3.1혁명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수록하였으며, 친일인사와 이화여대 및 기독교 중심으로 기념사업을 하면서, 유관순 영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조선의 잔다르크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유관순열사기념관에 대해서, 60명의 애국지사의 삶까지 독립운동에 대해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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