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도스토예프스키, 쇼펜하우어, 니체, 사르트르, 실존주의, 모더니즘 계열들이다. 

성씨는 뺐다. 


사상 및 철학. 


칸트 쪽 계열.

근대. 

로크 - <통치론>.
다윈 -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
다윈 - <종의 기원>.
뒤르켐 - <자살론>.
뒤르켐 -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
밀 - <자유론>.
베이컨 - <학문의 진보/베이컨 에세이>. 
볼테르 - <불온한 철학사전>.
몽테뉴 - <수상록>.
비코 - <자서전>.
플라톤 - <국가>.
플라톤 - <법률>. 
파스칼 - <팡세>.
페인 - <상식론>.
페인 - <토지분배의 정의>. 
흄 - <오성에 관하여>.

현대. 

가라타니 - <나쓰메 소세키론 집성>.
가라타니 - <은유로서의 건축>. 
가라타니 -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 <트랜스크리틱>.
기든스·서튼 - <현대사회학>.
네그리 - <어셈블리>.
네그리·하트 - <공통체>.
네그리·하트 - <제국>.
들뢰즈 - <다양체>.
들뢰즈 - <대담 1972-1990>.
들뢰즈 - <의미의 논리>.
들뢰즈 - <차이와 반복>.
들뢰즈·가타리 - <앙티오이디푸스>.
데리다 - <그라마톨로지>. 
데리다 - <마르크스의 유령들>. 
데리다 - <법의 힘>.
데이비스 - <여성, 인종, 계급>.
러셀 - <불한당들의 미국사>.
루카치 - <미와 변증법>.
루카치 - <삶으로서의 사유>.
루카치 - <소설의 이론>.
루카치 - <이성의 파괴>. 
라클라우,무페 -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랑시에르 - <대화, 피곤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 
랑시에르 - <불화>.
랑시에르 - <역사의 형상들>. 
랑시에르 - <이미지의 운명>.
랑시에르 - <프롤레타리아의 밤>.
로넬 - <어리석음>. 
매클릴런 - <마르크스>.
바우만 - <사회학의 쓸모>.
바우만 -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
바우만 - <액체근대>.
바우만 -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바우만 -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바우만 -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베네딕트 - <국화와 칼>.
베네딕트 - <문화의 패턴>.
베유 - <노동일지>.
보드리야르 -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부루마 - <0년>.
부르디외 -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샌델 - <정의란 무엇인가>.
세이건 - <창백한 푸른 점>. 
아감벤 - <행간>.
아감벤 - <호모사케르 >.
아렌트 -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아렌트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렌트 - <인간의 조건>.
아렌트 - <혁명론>.
아인슈타인 - <상대성이론/나의 인생관>.
엮음 - <뉴레프트리뷰>.
요시키 - <라캉, 환자와의 대화>.
응우예 -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글턴 - <문학이론입문>.
애쉬 - <간디 평전>.
웰스 - <세계사 산책>.
월러스틴 -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
제이미슨 -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
제임슨 -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제임슨 - <정치적 무의식>.
제임슨 - <후기마르크스주의>.
칸트 - <순수이성비판>. 전2권. 
칸트 -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 
칸트 - <실천이성비판>. 
칸트 - <영원한 평화>.
칸트 - <판단력비판>.
커밍스 - <한국전쟁>. 
클라인 - <수학사상사>.
톰슨 - <노동, 성, 권력>.
파농 -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퐁티 - <지각의 현상학>.
푸코 - <감시와 처벌>.
푸코 - <말과 사물>.
프랑크 - <리오리엔트>.
플라메나츠 -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페로 - <식민주의 흑서>. 
홀 - <문화연구 1983>.
홉슨 - <빈곤의 문제>.
후설 - <사물과 공간>.
후설 -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후설·핑크 - <데카르트적 성찰>.


국내 

거일 - <비명을 찾아서>.
성우 - <비평의 매혹>.
시민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시민 - <불온한 자유주의자의 세상 읽기>.
엮음 - <별의 이상을 꿈꾸다>.
용선 -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우창 - <평론선집>.
우창 - <궁핍한 시대의 시인>.
우창 - <심미적 이성의 탐구>.
영일 - <한국문학과 그 적들>.
중권 - <미학 오디세이 전3권>.
중권 - <서양미술사 고전예술편>.
중권 - <서양미술사 모더니즘편>.
택광 -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하준 - <경제학 강의>.
호종·엠슨 - <기후위기, 불평등, 재앙>.
현우 -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헤겔 쪽 계열.

근대 

데카르트 - <방법서설>.
데카르트 - <성찰>.
스피노자 -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
스피노자 - <신학정치론·정치학논고>. 
스피노자 - <에티카/정치론>.
스미스 - <국부론>.

현대

라살레 - <노동자 강령>.
라이트 - <계급론>.
라캉 -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개념>. 
래트너·실바 외  - <비코츠키와 마르크스>. 
레비스트로스 - <야생의사고>.
소쉬르 - <일반언어학 강의>.
르포르 -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리쾨르 - <비판과 확신>. 
리쾨르 - <해석의 갈등>.
마르쿠제 - <이성과 혁명>. 
마르쿠제 - <해방론>.
만하임 - <세대 문제>.
만하임 -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만하임,맥루한 -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미디어의 이해>.
무페 - <정치적인 것의 귀환>.
미드 - <루스 베네딕트>. 
바디우 - <들뢰즈 - 존재의 함성>.
바디우 - <베케트에 대하여>.
바디우 - <변화의 주체>.
바디우 - <비미학>.
바디우 - <사랑예찬>.
바디우 - <세기>.
바디우 - <수학예찬>.
바디우 - <영화>.
바디우 - <윤리학>.
바디우 - <인민이란 무엇인가>.
바디우 - <조건들>.
바디우 - <존재와 사건>.
바디우 - <투사를 위한 철학>.
발리바르 - <역사유물론 연구>.
버틀러 - <젠더트러블>.
버틀러,라클라우,지젝 -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사르트르 - <구토>.
사르트르 - <문학이란 무엇인가>.
사르트르 - <상황Ⅴ>.
버날 - <블랙 아테나 및 반론 전3권>.
벤야민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벤야민 - <브레히트와 유물론>.
벤야민 - <일방통행로>.
벤야민 - <폭력비판을 위하여>.
보부아르 - <제2의성>.
사이드 - <오리엔탈리즘>.
살리 - <철학과 우울>.
마티니치 - <홉스 평전>.
슈미트 - <땅과 바다>.
슈미트 - <정치적인 것의 개념>.
슈미트 - <헌법과 정치>.
슘페터 -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알튀세르 - <마르크스를 위하여>.
알튀세르 - <자본론을 읽는다>.
알튀세르 -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아도르노 - <부정변증법>.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 <계몽의 변증법>.
아리스토텔레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 <수사학/시학>. 
아리스토텔레스 - <정치학>.
이폴리트 - <헤겔의 정신현상학 전2권>.
에링 - <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
에번스 - <홉스봄 평전>.
왕후이 - <단기 20세기>.
왕후이 - <죽은 불 다시 살아나>.
주판치치 - <실재의 윤리>.
지젝 -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도 알지 못하나이다>.
지젝 - <라캉 카페>.
지젝 - <시차적 관점>.
지젝 - <신체 없는 기관>.
지젝 -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젝 -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선 안 되는가>.
지젝 - <이라크>.
지젝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지젝 -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지젝 -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지젝 -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지젝 - <향락의 전이>.
지젝 - <헤겔 레스토랑>.
클리프 -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키틀러 - <축음기, 영화, 타자기>.
캘리니코스 - <사회이론의 역사>.
캘리니코스 - <우크라이나 전쟁>.
캘리니코스 -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프레이저, 호네트 - <분배냐, 인정이냐?>.
피히테·예링- <독일 국민에게 고함>.
하이데거 - <숲길>.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 <철학에의 기여>.
하이데거 - <형이상학 입문>.
함멜 - <대변혁>.
헤겔 - <미학강의 전3권>.
헤겔 - <정신현상학 전2권>.
호네트 - <사회주의 재발명>. 
호네트 - <인정투쟁>. 
호르크하이머 - <도구적 이성 비판>.
홀워드 - <알랭바디우>.
홉스봄 - <극단의 시대>. 
홉스봄 - <자본의 시대>.
홉스봄 - <제국의 시대>. 
홉스봄 - <혁명의 시대>.
히틀러 - <나의 투쟁>.
해리스 - <문화의 수수께끼>.
해리스 - <식인의 제왕>.
해리스 - <작은 인간>.

국내

명섭 - <하이데거 극장 전2권>. 
영희 대화 헌영 - <대담>.
엮음 - <해방전후사의 인식>.
백순 - <조선공산당 평전>. 
세철 - <조직행동론>.
장집 외 - <해방전후사의 인식> 4권만.
정운 - <한국인의탄생>.

한국역사연구회 - <시대사 총서> 전10권.

종교와 실존문학. 

가리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가리 - <하늘의 뿌리>.
간디 - <자서전>.
겐지 - <봄과 아수라>.
나보코프 - <롤리타>.
니진스키 - <영혼의 절규>.
니체 - <권력에의 의지>.
니체 - <숲으로 가다>.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 -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 - <분신>. 
도스토예프스키 - <죄와 벌>.
도일 - <셜록홈즈 전집> <전9권>.
디킨슨 -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런던 - <마틴 에덴 전2권>.
로르카 - <시 선집>.
루쉰 - <죽은 불>.
루이스 - <도즈워스>. 
루이스 -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마르케스 - <나는 여기에 연설하러 오지도 않았다>. 
말라르메 - <목신의 오후>.
말로 - <정복자들>.
멜빌 - <단편선>.
모스 - <증여론>.
몸 - <달과 6펜스>. 
밀러 - <모두가 나의 아들>.
밀러 - <세일즈맨의 죽음>.
밀러 - <소름>.
버로스 - <퀴어>.
베케트 - <고도를 기다리며/몰로이/첫사랑>.
보니것 - <제5도살장>.
볼드 - <SF 연대기>.
보들레르 - <파리의 우울>.
뵐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브래드쇼 - <카페 소사이어티>.
브르통 - <나자>.
브르통 - <초현실주의 선언>.
블랑쇼 - <도래할 책>.
블랑쇼 - <문학의 공간>.
블랑쇼 - <우정>.
블로크 - <역사를 위한 변명>.
비치슬라 - <벤야민과 브레히트>.
세르반테스 - <돈키호테 전2권>.
셸리 - <프랑켄슈타인>.
솔제니친 - <이바데니소비치 수용서의 하루>.
심농 - <갈레 씨, 홀로 죽다>. 
심농 - <매그레>. 
아폴리네르 -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애슈턴 - <미키7>.
야스나리 - <설국>.
오닐 - <밤으로의 긴 여로>.
오사무 - <만년>.
오사무 - <인간실격>.
엘뤼아르 - <시 선집>.
와일드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조이스 - <젊은 예술가의 초상>.
지드 - <지상의 양식>.
챈들러 - <단편선>.
카뮈 - <최초의 인간>.
카프카 - <성>.
칼비노 - <존재하지 않는 기사>.
콕토 - <앙팡 떼리블>.
크리스토프 - <문맹>.
크리스토프 <아무튼>.
크리스토프 - <어제>.
크리스토프 -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크리스티 -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크리스티 - <운명의 문>.
클라크 - <단편 전집 총 4권>.
클라크 - <라마와의 랑데부>.
클레지오 - <조서>.
케인 -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캐리 - <시의 역사>.
트라클 - <떠나간 자의 노래>.
파솔리니 - <폭력적인 삶>.
파스테르나크 - <끝까지 살아 있는 존재>.
페소아 - <불안의 책>.
페소아 -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포 - <공포편>.
포 - <모험편>.
포 - <미스터리편>.
포 - <환상편>.
포크너 - <소리와 분노>.
포크너 - <압살롬, 압살롬!>.
푸익 - <거미여인의 키스>.
푸익 - <천사의 음부>.
플라스 - <벨 자>.
플라스 - <시 전집>.
플라스 - <일기>.
피츠제랄드 - <위대한 개츠비>.
한트케 - <소망 없는 불행>. 
한트케 -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해밋 - <전집 총5권>.
헉슬리 - <원숭이와 본질>.
헤세 - <유리알 유희>.

국내. 

강 -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광수 - <무정>. 친일. 
기영 - <고향>. 친일.
성은 - <LoFi>.
신주 - <김수영을 위하여>.
형도 - <전집>.
규동 - <나는 시인이다>.
동리 외 - <한국단편문학선>. 
동인 외 - <한국단편문학선>. 친일.
동인 - <감자>.
병택 - <한국현대시인론>.
선우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수영 - <시 전집>.
수영 - <산문 전집>.
승옥 - <무진기행>.
유정 - <봄봄>.
윤식·우종 외 38인 - <한국현대문학사>.
재용 - <백석 전집>.
현 - <분석과 해석>.
수린 - <다정한 매일매일>.
창섭 - <비오는 날>. 
경동 -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훈 - <상록수>.
도현 - <검은 시의 목록>.
엮음 - <탈냉전시대의 문학 시선집 1990-1995>.
만식 - <탁류>. 친일.
만식 - <태평천하>. 친일.
명익 - <비오는 길>.
무웅 - <한국현대시>.
상섭 - <만세전>. 친일.
상섭 - <삼대>. 친일.
규원 - <현대시 작법>.
세영 - <한국현대시사>.
잡지 - <보스토크 19호>.
종국 - <친일문학론>.
지우 - <뼈아픈 후회 외>.
동순 - <조태일 전집 전4권>.
상 - <날개 및 소설 전집>.
상 - <시 전집>.
상 - <오감도·권태>.
상 - <전집4권만>.
헌영·성호 -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현우 -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현우 -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20세기>.
현우 - <로쟈의 러시아 현대문학 수업>.
효석 - <도시와 유령>. 
화 - <문학예술 전집 문학사>.
화 - <문학예술 전집 문학의 논리>.
화 - <문학예술 전집 시>.
화 - <문학예술 전집 평론 1권>.
화 - <문학예술 전집 평론 2권>.

이외 및 만화.

가드너 - <이야기 파라독스>.

나우르 -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 

무성 - <만화로 보는 록의 역사>.

르몽드 - <나쁜 장르의 B급 문화>.

부르이 - <록의 작은 역사>. 

슈피어링 - <철학의 구라들>. 

시몽 - <마르크스>.

시몽 - <프로이트>. 

시몽 - <아인슈타인>.

신 - <세계의 병기 대도해>.

스미스 - <세계영화대사전>.

안드류 - <현대영화이론>. 

준지 - <토미에>.

크로스 - <코베인 평전>.

크로스 - <핸드릭스 록스타의 삶>. 


목록에 쓴 책들은 모두 처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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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상 옮김. P. 27-30.


'코뮌'은 처음부터 곧바로 다음에 사실로 노동계급들은 일단 지배권을 획득하면,

더 이상 낡은 국가로는 관리해 나갈 순 없다는 거다. 

이러한 노동계급들에겐 싸워서 얻은 목적을, 전취해서, 지배권을 다시 상실하지 않기 위해선, 

한편으로는 현재까지도 자신들을 반대해서, 이용되어 온 모든 낡은 억압기구들을 제거해야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들에 대의원들과 관리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도,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에 안전부터 우선 확보해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전에 국가에서 특징적인 성격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사회는 자신들에 공통이 아닌 공동에 이익을 옹호하고자 처음에는 단순하게 분업화하면서 

자신들에 기관들을 창설했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정점으로 하는 기관들은 시간도 지남에

따라서 자신들에 특수한 이익에 복무함으로써 사회에 종에서, 사회에 주인으로 바뀌었다. 

이건 예컨대, 세습·군주제에서뿐만 아니라, 민주·공화국에서도 볼 수 있겠다. 그, 어디에도,

바로 북아메리카에서와 같이, '정치가'들은 국민 중에서도 분리되어서도 유력한 부분들을 

이루고 있는 곳은 없다. 거기에선, 두 쪽, 양대 정당들은, 서로 번갈아서 '지배권'을 장악하는데,

이 정당들은 다시 정치를 하나에 장사거리로 만들고서, 연방과 각 주에 입법 의회에 의석은 

투기 대상으로 삼거나, 연방과 각 주에 입법 의회에선 정작, 의석을 유지하면서도, 자신들에 

당은 승리한 이후에는, 보상으로서도 자리를 얻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참을 수 없게 된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미국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시도들을 해왔고,

또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들은 더욱 더 이렇게나 부패에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가는 보존해서 유지하고, 주지하는 바이다. 본래 사회에서도 단순한 도구로 규정되었던 국가·

권력은 어떻게 사회에 맞서 독립했는가를, 우리는 바로 미국에서도 가장 잘 볼 수 있다. 

여기에선 왕조도 귀족도 없으며, 인디언을 감시하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곤, '상비군'도 없고,

고정된 직위나 연금·청구권을 가진 '관료'도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에서도, 

국가·권력을 번갈아서 소유하거나, 가장 부패한 수단으로도 또 가장 부패한 목적을 위해서도,

그걸 또 다시 이용하는 정치적 투기자들에 의해서 양대로 떼를 지은 '불순한 도당'들을 본다.

그리고 명목 상으로는, 분명 국민에게 봉사하는 척하고 있으나, 사실 상은, 그들을 지배하고,

약탈하는 정치가들에 이러한 양대 '카르텔'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무력하다.   


국가 및 국가 기관은 사회에 종에서, 사회에 주인으로 질적으로 바뀌어서, 전화한다는 건 

이때까지 존재한 모든 국가에서도 피할 수 없이도, 불가피했다. 

이걸 반대해서 코뮌들은 확실한 두 가지 방법을 적용해봤었다.


첫째로는, 코뮌은 행정. 사법. 교육에 대한 모든 직책들을 관계자들에 보통 선거에 의거해서, 

선출해서, 임명하고, 게다가 이 관계자들에게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둘째로는, 코뮌은 직위 고하를 불문하고 모든 공무원들에게 다른 노동자들도 받는 정도에,

임금을 지불했었다. 코뮌은 일반적으로 지불한 최고 봉급은 6,000프랑이었다. 


이리해서, 대표 기관에 대표들에게 여전히 불필요하게 추가되는 제한된 위임권은 없어도, 

온갖 방법으로, 관직만 얻으려는, 엽관 운동이나, 출세주의에 대한 믿음직한 빗장은 설치됐었다. 


이제까지에 국가·권력은 이렇게도 잘게 부스러져서, 분쇄되고. 

국가 권력은 새로운 참으로 민주주의적인 국가·권력으로 교체됐다는 건, 

<내전> 제삼장.[]에서도 상세하게 서술했다. 

그러나 여기선, 또 한 번 그러한, 몇몇 특징에 대해선 단순하게 언급할 필요는 있겠는데, 

왜냐하면 바로, 독일에선, 국가에 대한 미신들은 철학사에서도 부르주아지에 일반적인 의식이나 심지어는 많은 노동자들에겐 흔하고, 일반적인 의식으로까지도 옮겨 갔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에 관념에 의하면 국가란 "이념에 실현" 또는 철학적인 말로 번역하자면, 

지상에선, 신에 왕국이고, 매우 영원한 진리와 정의들은, 

실현되고 있거나 혹은 실현되어야 할 미지에 영역도 아닌 그저 한 영역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국가'와도. 그와 관련된 모든 건 미신적인 숭배들로, 저절로도 생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사회 전체에 공공에 대한 사업이나 공공에 대한 이익들은 

이제까지도 '그것'들로는 처리되어서 다르게 생각하고서, 

즉. 국가와 높은 봉급을 받는 관리들을 남몰래 관계를 가지고, 내통하지 않고선, 

처리될 수 없다는 걸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더욱 더 쉽게 이러한 미신적인 복종이나 숭배는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일 그들에 세습·군주제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서, 적어도, 민주·공화국을 

신뢰한다면 아주 대단하게 과감한 전진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란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에 대한 억압·기구 이외에는, 무엇도 아니고, 기껏해야, 이는 민주 공화국에서도 군주제에서와 조금이라도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니, 국가는 하나에 더럽거나, 치사하고, 나쁜, 에 불과하고,

계급적인·지배를 위한 투쟁에선 승리를 쟁취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이 악도 물려받는데,


프롤레타리아들은, 코뮌이랑 마찬가지로,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 상태에서, 성장한 한 세대는,

모든 국가에 못 쓸 물건, 폐물들을 떨쳐버릴 수 있을 때까지도, 될 수 있는 한 국가에선, 

가장 못되고, 나쁜, 최악에서 측면들을 줄이거나, 감소시킬 순 있을 뿐이지, 

또한 피할 수는 없을거다.


근래에, 독일에서도 속물들은, 다시금 약효가 있던 공포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을 듣고 있겠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좋다. 신사 숙녀 여러분, 독재란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뮌을 보자. 바로, 프롤레타리아들에 독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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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 <소련, 가족 관계>. P. 241-255. 재인용. 

지금 미국에서는 소련을 승인하던 문제도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 물론 외교 관계를 승인한다고 해서 두 나라는 서로 상대방에 정치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을 승인하지도 
않은 건 주로 도덕적 이유 때문이었다. (리버티) 편집자는 나에게 던진 물음들에 이런 이유들은 담겨 있었다. - 혹여나 글을 보신다면 리버럴들에 오늘날 질문 수준을 살펴보신다면 좋다. 

1. 소련 국가는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고 있는가. 

나는 오히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톨스토이나 러스킨 같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은 기계문명이 자유로운 농민과 수공업자를 따분한 자동인형으로 바꿔 버린다며 기계문명에 반대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런 비난은 주로 미국에 산업 시스템(테일러 시스템과 포티즘)을 겨냥했다. 그런데 이젠 기계가 영혼을 파괴한다고 비난하는 격렬한 항의도 시카고와 디트로이트에서 나오는 건가. 그렇다면 돌도끼와 흙집에 시대로 돌아가는 건 어떤가. 또, 양가죽 옷으로 돌아가는 건 어떤가.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우리는 그런 퇴보를 거부한다. 기계화 분야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은 지금까지 미국에 제자였을 뿐이다. (그리고 도중에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아마 이 질문이 겨냥하는 건 기계에 작용이 아니라 사회질서에 독특한 특징일 거다. 
다시 말해서, 소비에트 국가는 기계가 사유재산이 아니라 국가 소유기 때문에 인간이 로봇이 되고 있는 거냐 아니냐고 묻고 싶은 거다. 그 질문에 뜻을 분명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 질문도 
근거는 없다는 걸 보여 주기에는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정치체제, 냉혹한 독재, 모든 세력에 초긴장 상태, 주민에 낮은 생활수준이라는 

문제도 남아 있다. 이런 사실들을 부인하는 건, 터무니 없는 짓일거다. 그러나 그건 새로운 체제에 표현이라기 보단 후진성에 끔찍한 유산만 드러난거다.


나라에 경제적 복지 수준은 높아지면 독재는 더 완화되고 부드러워져야 할 거다. 

그러면 인간을 통제하는 현재에 방식은 사물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바뀔거다. 

그건 로봇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더 수준 높은 인간으로 가는 길이다. 

- 도대체 이걸 왜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가! 


2. 소비에트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외피를 쓰고 과두 권력을 휘두르는 크렌림에 

소수 집단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가. 


결코 그렇지도 않다. 똑같은 계급은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정치 제도와 방식에 도움을 받아 통치할 수 있다. 그래서 부르주아지는 역사적으로 절대왕정, 보나파르티즘, 의회 공화국, 파시즘 독재로 자신에 지배를 실행했다. 이 모든 지배 형태에 자본주의적 성격은 국민에 가장 중요한 부, 

생산수단과 학교와 언론을 여전히 부르주아지가 관리하고 통제하는 한, 그리고 법률이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에 재산을 보호하는 한 유지된다. 

소비에트 체제는 프롤레타리아에 지배를 뜻한다. 권력을 수중에 직접 집중시킨 계층이 얼마나 광범한지는 전혀 중요하지도 않다. 


- 보나파르티즘: 계급 지배가 불안정한 시기에 들어서는 독재 체제 또는 독재 체제에 특징을 띤 정권을 가르키는 마르크스주의 용어. 의회 정당이나 대중운동보다는 

군대, 경찰, 군가 관료를 기반으로 삼는다. 


3. 소비에트는 아이들에게서 즐거움을 빼앗고 교육을 볼셰비즘에 선전 도구로 만들어 버린 건 아닌가. 


아동교육은 어디서나 항상 선전과 관련되어 있었다. 선전은 손가락보다 손수건이 낫다는 사실을 주입하는 데서 시작하고, 미국에 공화당 공약이 민주당보다 낫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종교 정신에 교육도 선전이다.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선전가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 거다. 


프랑스 혁명으로 널리 보급된 세속적 교육은 뼛속까지 선전으로 물들어 있다. 그 세속적 교육에 주요 사상은 모든 미덕은 프랑스 국민,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 지배계급에게 고유한 거라는 견해다. - 저열하다. 프랑스!


소비에트에 아동교육도 선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거다. 유일한 차이는 부르주아 나라들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낡은 제도와 사상을 존중하도록 아이들에게 주입하는 반면, 소련에서는 새로운 사상을 가르친다는 거다. 따라서 선전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나쁜 의미에서 '선전'은 사람들은 보통 원하지 않는 사상을 옹호하고 퍼뜨리는 걸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보수주의와 안정에 시대에는 일상적 선전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혁명에 시대에는 

선전은 반드시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기 마련이다. 

내가 1917년 5월 초에 우리 가족과 함께 캐나다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 우리 아들 

둘을 '김나지움'에 보냈는데, 그 김나지움은 임시정부에 장관 몇 명을 포함한 많은 정치인에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김나지움 전체에서 볼셰비키는 우리 아들 둘뿐이었고 

동조자도 한 명 더 있었다. "학교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공식 규칙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들은 겨우 12살이었는데도 볼셰비키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

내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된 뒤 우리 아들은 '의장'이라고만 불렸으며 

갑절로 두들겨 맞았다. 그건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선전이었다. 


낡은 사회에서 헌신하는 부모와 교사는 '선전'에 반대한다고 떠들어 댄다. 

그러나 국가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학교에서 시작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있겠는가.


"소비에트에 선전은 아이들에게서 즐거움을 빼앗고 있는가." 무슨 이유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다른 모든 나라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소련 아이들도 뛰어놀고 노래하고 춤추고 울음을 터뜨린다. 소비에트 체제는 아이들을 비범하게 보살핀다는 건 심지어는 악의적인 관찰자들조차 인정하는 사실이다. 구체제와 비교하면, 유아사망률은 절반으로 낮아졌다. 


소련에 아이들은 그리스도에서 흔히 말하는 원죄나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한다는 건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들은 내새에 즐거움을 빼앗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죽은 뒤에야 다시 태어나 산다는 미래에 내새 문제 전문가는 아무도 없으므로, 

나는 그런 소실은 얼마나 큰 건지를 감히 판단할 순 없다. 

그래도 현세에 고통은 내세에 즐거움보다 우선한다는 건 확실하다. 

만일 아이들이 필수 열량을 섭취한다면, 넘치는 생명력은 즐거움에 충분한 이유는 될 거다.


2년 전에 5살까지 우리 손자는 모스크바에서 여기 터키에 프린키포로 왔다. 비록 우리 손자는 신에 대해 아무거도 몰랐지만, 나는 그 녀석은 신문지 뭉치로 세면기 배수관을 꽉 막아 버렸을 때를 빼고는 그 애한테서 딱히 범죄 성향이라고 할 만한 걸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 손자는 프린키포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가톨릭 수녀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에 그 애를 보내야 했다. 훌륭한 수녀들은 이제 거의 7살이 된 우리 무신론자에 도덕을 그냥 칭찬했을 뿐이다. 바로 이 손자 덕분에 나는 지난해에 러시아에 아동 도서, 즉

러시아인 망명자들이 만든 책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에 책도 꽤 잘 알게 됐다. 

망명자들에 책에도 소비에트에 책에도 선전은 들어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에 책은 훨씬 더 

신선하고, 더 능동적이고, 더 활기차다. 아이들은 이런 책들을 읽거나, 어린들이 읽어 주는 걸

들으면 무척 즐거워한다. 그렇다, 소비에트에 선전은 아이들에게서 즐거움을 빼앗고 있지 않다.


4. 볼셰비즘은 의도적으로 가족을 파괴하고 있는가. 

5. 볼셰비즘은 성에 관한 도덕적 기준을 모조리 파괴하는가. 

6. 소련에 제도에서 중혼이나 일부다처제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건 사실인가.


- 도대체! 이걸 질문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가족'은 결혼 계약, 교회에 승인, 재산권, 단일 여권에 바탕을 둔 강제적 결합이라면, 그렇다면 볼셰비즘은 이 억압적인 가족을 그 뿌리까지도 파괴했다. 


- 1914년까지 러시아 기혼 여성은 남편에 허락을 받아야만 자신에 여권을 따로 만들 수 있었다.


또 여기서 말하는 '가족'은 부모가 자녀를 무제한으로 지배하고 아내는 법률적 권리가 없는 거라면, 그렇다면 볼셰비즘은 유감스럽게도 이 오래된 사회적 야만에 잔재를 아직 철저하게 파괴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가족'이 이상적 일부일처제(법률적 의미가 아니라 실질적 의미에서)라면, 

그렇다면 운 좋은 예외들 말고는 세상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 걸 

볼셰비키는 파괴할 수는 없을 거다.


소련에 혼인법은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를 부추긴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결혼 

관계를 조사한 통계 자료(실질적 자료)는 구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나 길게 나열된 통계 수치들은 없더라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모스크바에서 배우자 있는 사람이 배우자도 아닌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간통이나 결혼 파탄 건수는 뉴욕, 런던이나 파리에 수치와 별로 다르진 않고 어쩌면 훨씬 더 낮을 수도 있다는 거다.(누가 알겠는가.)


성매매 반대 투쟁은 줄기차게 그리고 상당히 성공적으로 전개됐다. 이것이 입증하는 바는 

소련은 성매매에서 가장 파괴적·해악적으로 나타나는 난잡한 성행위를 용납할 의도는 

전혀 없다는 거다. 


상호 애정과 협력을 바탕으로 죽을 때까지 오래 지속되는 결혼, 이것이 이상적인 기준이다. 


소비에트 학교, 문학, 여론은 흔히 그쪽으로 영향을 미친다. 남성과 여성에 관계가 경찰과 성직자에 속박에서 해방되고 나중에는 경제적 필요라는 속박에서도 해방되면 제 갈 길을 찾을 거고, 그 길은 생리학과 심리학에 의해서 그리고 인류에 복지에 대한 배려에 의해서 결정될 거다. 


소비에트 체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해결을 위한 만만찮은 전제 조건들은 

만들어 냈다. 어쨌든 결혼 문제는 이제 더는 맹목적인 상황에 압력과 무비판적 전통에 문제가 아니다. 그건 집단적 이성에 과제가 됐다.


해마다 소련에선 550만 명에 아이가 태어난다. 사망자보다 신생아가 300만 명 이상 많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인구가 그렇게 증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사실만 봐도 러시아인들에 

도덕적 붕괴나 활력 저하 운운하는 건 이치도 맞지 않고, 하나에 일관된 논의도 부족한,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7. 근친상간을 형사 범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건 사실인가. 


나는 형사 처벌에 관점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소련 법률에 

근친상간 조항에 관한 정보를 얻기 전에는(그런 조항은 있다면) 답변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그래도 내 생각에 이 문제 자체는 한편으로는 병리학,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에 영역에 속하는 거지 범죄학에 영역에 속하는 건 아니다.  근친상간은 인류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바람직한 

특성과 능력을 감소시킨다. 바로 그런 이유로 건강한 인간의 대다수는 근친상간을 정상적 기준을 위반한 걸로 여긴다. 사회주의에 목표는 경제 관계뿐 아니라 인간에 생물학적 기능에도 이성을 최대한 많이 투입하는 거다. 오늘날 이미 소련에 학교들은 인간에 육체와 정신에 현실적 필요에 대해 아이들을 계몽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내가 다른 나라들보다 러시아에서 병리학적 근친상간 사례들은 더 많을 거라고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그와 동시에 나는 바로 이 분야에서 사법적 개입은 이롭기보다는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예컨대, 영국 사법부가 바이런을 감옥에 보냈다면 인류에게 이득이 됐을지는 의심스럽다. 


8. 요청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다는 건 사실인가. 


물론 사실이다. 다르게 묻는 게 더 적절했을 거 같다. "혼인 관계에서 어느 한쪽은 요청해도 

이혼할 수 없는 나라들이 아직도 있다는 건 사실인가."라고.


- 구속시키는 남성들이 있는데, 여성들이 이혼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마저도 

  더 곤란해지므로. 이 말이구나. 


9. 소련에서는 남성과 여성에 순결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인가. 


내 생각에는 이 분야에서 감소하고 있는 건 존중이 아니라 위선이다. 

예컨대, 평생 소련을 철저히 적대시하고 엄숙한 금욕주의자로 묘사된 '성냥왕' 

이바르 크뤼게르가 소련에 콤소볼 청년 남녀는 포옹할 때 교회에 승인을 구하지 않는다며

부도덕하다고 여러 차례 비난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 않은가. 1929년에 금융 폭락이 없었다면 , 크뤼게르는 증권 시장의 의인이자 도덕의 기둥으로서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언론 보도를 보면,

 크뤼게르가 여러 대륙에서 관계를 맺은 여성의 수가 그의 성냥 공장 굴뚝 수보다 훨씬 더 많다. 


프랑스·영국·미국의 소설들은 이중 가족, 삼중 가족을 예외가 아니라 규칙으로 묘사한다. 

매우 박식한 독일의 청년 관찰자 클라우스 메네르트가 소련 청년들을 다룬 책을 최근 펴냈는데,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 청년들은 미덕에 모범은 아니라는 건 사실이지만 ··· 도덕적으로 그들은 확실히 같은 또래 독일인들보다 결코 수준이 낮지 않다." 나는 이 말이 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917년 2월 어느 날 밤 뉴욕의 전철 안에서 20여 명의 남학생과 여자 친구들을 봤다.

비록 전철 안에는 그들에 일행이 아닌 사람도 많았지만, 아주 발랄한 이 연인들의 행동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이 청년들이 비록 원칙적으로는 일부일처제를 신봉하더라도 실천적으로는 여러 우회로를 거쳐 일부일처제에 도달할 거다"라고.


미국에서 금주법이 폐지된다고 해서 새 정부가 술주정을 부추기려고 애쓴다는 듯은 결코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정생활, 순결 등을 보호한다는 많은 법률을 소련 정부가 폐지한다는 건,

가족에 영속성을 파괴하거나 난잡한 성행위를 부추기려는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건 단지 물질적·문화적 수준을 높여서, 형식적 금지나 공허한 설교로는 도무지도 

얻을 수 없는 걸 얻으려는 노력일 뿐이다. 


- 요즘에는 이런 해명도 듣기란 힘들다. 


10. 볼셰비즘에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생활에서 벌이나 개미에 단계를 재생산하려는 건 아닌가. 

11. 곤충이 세상을 지배하게 됐다면 널리 퍼졌을 문명 단계와 볼셰비즘에 이상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 두 질문은 인간뿐만 아니라 곤충에게도 불공정하다. 개미든 벌이든 인간 역사에서 

가득 찬 끔찍한 짓들에 책임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아무리 악독하더라도 곤충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가능성이 인간에게는 있는 법이다. 소련에 임무란 바로 이것, 

즉, 인간 사회에서 개미의 특성을 파괴하는 걸 입증하기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개미뿐만 아니라 벌도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일부는 일하거나 싸우고,

다른 일부는 재생산을 전담한다. 사회적 기능의 그런 전문화에서 볼셰비즘의 이상을 

볼 수 있을까. 이것들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 문명 자본주의에 특징이 극한에 이른 거다. 

특정한 종에 개미들이 다른 피부색의 형제 개미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는 거다.


- 감탄만 나온다! 여타에 생물학자들보다 트로츠키는 더 안목은 높았다!    


소비에트 체제는 이것과도 닮은 구석은 전혀 없다. 개미들은 아직 

개미판 존 브라운이나 에이브러햄 링컨을 탄생시키지 못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간이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말했다. 이 유명한 특징 묘사는 

마르크스주의 역사 해석에 기초다. 인위적 도구 덕분에 인간은 동물에 왕국에서 벗어나게 됐고 

정신노동을 위한 자극을 받았다. 인위적 도구가 노예제에서 봉건제, 자본주의 그리고 소비에트 

체제로에 변화를 불러일으킨 거다. 


질문에 의미는 분명히 보편적·포괄적 통제가 개성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따라서 소비에트 체제에 해악은 지나친 통제 있다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이련에 다른 질문들은 앞서 봤듯이 소련이 인간 생활에서 가장 친밀한 분야들, 

즉 사랑·가족·성관계 등을 국가 통제 아래 두기를 거부한다고 비난한다. 모순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소련은 결코 사람들에 정신적·도덕적 능력을 통제하는 걸 임무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생활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 개성은 시장에 지배와 시장에 맹목적인 힘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포드는 자동차 생산을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조직했고 그래서 생산량을 엄청나게 늘렸다. 

생산기술에 원칙 문제로 들어가 보면, 사회주의에 과제는 컨베이어 시스템 위에서, 즉 부분들에 정확한 조화를 바탕으로 계획을 세워서 전체 국민경제와 국제경제를 조직하는 거다. 단일 공장에서 모든 공장과 농장으로 이전된 컨베이어 시스템은 포드에 성과조차 디트로이트 곁에 있는 

아주 작은 수공업 작업장처럼 보이게 할 만큼 엄청난 생산 실적을 올릴 거다. 

일단 사람은 자연을 정복하게 되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고 더는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될 거다. 그게 바로 개성에 해방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예컨대, 하루 서너 시간에 노동만으로도 모든 물질적 필요를 대체로 충족할 수 있게 되면 

모든 남성과 여성은 일체에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 시간을 20시간씩 얻게 될 거다. 그러면

교육에 문제들, 즉 사람들에 육체적·정신적 구조를 완전하게 발전시키는 문제들은 핵심적 관심사로 될 거다. 철학과 과학 학파들, 문학·건축·예술 일반에 서로 대립하는 경향들은 처음으로 상류층 뿐만 아니라 주민 대중 전체에게도 필수적 관심사로 될 거다. 맹목적·경제적 압력에서 벗어나게 되면, 여러 집단·경향·학파 사이에 투쟁은 매우 이상적이고 이타적인 성격을 띠게 될 거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에 개성은 고갈되지 않을 거고, 오히려 처음으로 활짝 꽃을 피울거다.


12. 소련에서는 아이들에게 부모를 존경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건 사실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게 일반적인 형태에 이 주장은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말일 뿐이다. 

그래도 기술·사상 또는 방식에 영역에서 일어나는 급속한 진보는 대체로 부모를 포함해서 나이 든 세대에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건 사실이다. 교수들은 다윈에 이론을 가르치면, 이브는 아담에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믿는 부모들에 권위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소련에서는 모든 충돌은 비할 바 없이 날카롭고 고통스럽다. 콤소몰에 관습은 자녀를 결혼시킬 때 자신에 현명한 판단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부모에 권위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트랙터와 콤바인 다루는 법을 배운 적군 병사는 나무 쟁기로 일하는 아버지에 기술적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 

  

그 아버지는 자신에 위엄을 지키려고 손으로 성상을 가리키면서, 말 안 듣는 아들에 뺨을 때려 봐야 소용없다. 부모들은 종교적 무기에 의존한다. 그러나 학교에 공식적 권위에 스스로 근거한 자녀들은 자신들은 더 잘 무장돼 있음을 보여 준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부모들은 흔히 국가를 비난한다. 이게 바로 새 체제에 근본적 과제들에 적대적인 가족에서 보통 일어나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 부모에 다수는 국가는 부모 구실을 더 많이 인수함에 따라 자신들에 권위는 상실된다는 걸 더 쉽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이 집단들 안에서도 세대 갈등은 있기 마련이다. 

농민 사이에서는 세대 갈등은 특별히 더 첨예하게 나타난다. 이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보는 없을 거다.


내 경험을 짧게 이야기하고 싶다. 17살 때 나는 집과 결별해야 했다. 우리 아버지는 내 인생에 

진로를 결정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300년이 지나도 

네가 말한 목표는 실현되지 않을 거다. 그 목표라는 건 고작 왕정을 전복할 뿐이다."


나중에 아버지는 당신에 영향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셨고, 그래서 나와 우리 가족에 관계는 회복됐다. 10월 혁명 뒤에야 스스로 실수를 깨달으신 아버지는 "네가 말한 진리는 더 강력하더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례는 수천 개나 있고, 나중에는 수십만, 수백만 개라도 들 수 있을 거다. 그건 바로 '낡은 속박'은 산산조각 나는 결정적 격변기에 특징이다. 


13. 볼셰비즘은 종교를 처벌하고 종교 예배를 법으로 금지한다는 건 사실인가. 


의도적 날조인 이런 주장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증거·증언에 의해서 수없이 많이 반박당했다. 그런데도 왜 항상 새롭게 다시 나타나는가. 왜냐하면 교회는 정부 예산과 경찰력에 지원을 받지 못할 때 그리고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박해라는 교회에 보복에 굴복하지 않을 때 교회 자신은 박해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국가에서 종교 신앙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범죄로 여긴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그냥 용인한다. 소비에트 국가는 다르게 행동한다. 종교 예배를 범죄로 여기지 않고 다양한 종교에 존재를 용인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교 신앙에 반대하는 유물론적 선전을 공공연하게 지지한다. 바로 이런 상황을 교회는 종교적 박해로 해석한 거다. 


14. 볼셰비키 국가는 종교를 거대하면서도 무지한 대중에 편견을 이용한다는 건 사실인가. 

예컨대, 러시아인들은 성인이라도 사후 시체는 썩어 버리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레닌에 미라를 인위적으로 보존하는 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건 편견과 적대감이 만들어 낸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내가 훨씬 더 자유롭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처음부터 나는 레닌에 부인 N.K. 크룹스카야와 마찬가지로 

레닌에 시체를 방부 처리하고 사당(祠堂)이나 탑(塔). 영묘를 건설하는 등에 단호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만약 레닌도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자신에 사후에도 파라오처럼 미라로 만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분노해서 미리 당에 호소했을 거다. 나는 이런 색다른 의견, 이견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레닌에 시체는 레닌에 정신과도 어긋나게 사용돼서는 안 됐다.


나는 또, 레닌에 시체를 방부 처리해서 '썩지 않게' 만들면 종교적 미신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방부 처리 발상을 옹호하고 주도한 건 분명한 고참 볼셰비키 당원 중에 

대외무역 인민위원을 지낸 레오니트 크라신으로 다음과 같이 내 주장에 반대했다. "오히려, 신부들에게 기적에 문제였던 건 우리 손에서는 기술에 문제가 될 거다. 우리나라에 그토록 위대한 변화를 가져다준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를 수많은 사람은 알게 될 거다. 과학에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대중에 이런 정당한 관심을 충족시킬 거고,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시체도 썩지 않는 신비도 설명할 수 있게 될 거다.


틀림없이 영묘 건설은 정치적 목적은 있었다. 스승에 권위를 이용해서 제자들에 권위를 끊임없이 강화하는 건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종교적 미신에 활용을 볼 이유는 전혀 없다. 

영묘 방문객은 시체도 썩지 않고 보존되는 건 화학 덕분이라는 설명을 듣게 되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에 답변은 소련에 현재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려는 거도 아니었고 경제적·문화적 성과를 과소평가하려는 거도 아니었으며 소련은 이미 사회주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소련 체제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모순과 극단적 어려움으로 가득찬 이행기 체제일 거다. 그래도 우리는 사실에 발전에 비춰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소련은 로마노프 제국에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15년 동안 적대적 세계에 둘러싸인 채 살아왔다. 


포위당한 요새에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특별히 천하고, 상스러운, 

조야한 형태를 부여했다. 일본에 정책들을 보면 러시아는 결코 안전하다고 느낄 수도 없다.

그러나 소련 영토에서 소련과 전쟁을 벌였던 미국은 오늘 이때까지도 모스크바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또한 소련 내부 체제에 엄청난 영향, 물론 부정적 영향을 미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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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 <자본주의와 여성 노동>. P.44~45 재인용.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눈에도 잘 띄지 않는 무수한 빈곤이나 억압에 사례로 점철돼 있다. 

수많은 도시 빈민, 수공업자, 공장 노동자, 사무직, 하급 공무원 가족은 말할 수도 없이 

가난하며, 기껏해야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다. 그런 가족에 속하는 수많은 여성들은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필사적으로만 일하고 모든 걸 절약하면서 

'가내노예'로 살아간다(아니 겨우, 간신히, 근근하게 겨우, 목숨을 이어서, 연명한다.)


자본가들은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터무니도 없는 저임금도 마다하지 

않는 이 여성들을 가내 노동자로 기꺼이 고용한다. 

또한 모든 나라에 자본가들은 이런 여성들 속에서 (고대에 노예주나 중세에 봉건영주처럼)

가장 '적당한' 가격에 여러 명에 몰래 사통하는 정부(情婦)를 고른다. - 참으로 가혹하다.   

아무리 성매매에 '도덕적 분노' (열에 아홉은 위선에 불과한)를 터뜨려도 여성에 육체를 

사고파는 이런 일을 막을 수는 없다.


즉 임금노예는 존재하는 한에서 성매매도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인류 사회에 역사를 통틀어 모든 피억압·피착취 계급은 언제나 지배자에게 


첫째로는 자신에 무보수 노동을 내주고(착취는 주로 여기서 이뤄진다).

둘째로는 자기 계급에 여성을 '주인나리'에 정부로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는 똑같다.

단지 착취에 형태만 달라질 뿐 착취 자체는 지속된다.


'세계에 수도'이며 문명에 중심지인 파리에서도 '가내노동으로 착취당하는 여성들'이 만든 

물건을 보여 주는 '박람회'도 열렸다.


각 물건마다 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어떤 물건을 만들든 개당 1.25프랑, 즉 50코페이카 이상을 벌 수도 없고 대부분에 일은 훨신 더 보수도 적다. 예를 들어, 전등갓은 12개당 4코페이카를 받는다. 종이봉투는 1000개당 15코페이카로 시간당 6코페이카를 번다. 리본을 단 작은 장난감 같은 건 시간당 2.5코페이카고 조화는 시간당 2~3코페이카다. 남녀 속옷은 시간당 2~6페이카이며

이 외에도 무수히도 많은 예가 있다. 


- 당시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는 2코페이카였다. 


우리에 노동자협회나 노동조합도 이와 같은 '박람회'를 조직해야 한다. 

그건 '지배계급들'에 '박람회'가 벌어들이는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여성에 가난과 결핍에 대한 폭로는 이와는 다른 이익을 가져다 줄 거다. 

즉 그건 남녀 임금노예들은 자신에 상황을 깨닫고 '삶'을 되돌아고보고 어떻게 해야

가난, 결핍, 성매매, 그리고 가난 때문에 겪는 온갖 굴욕 등 

이 영원한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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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무엇도 의미란 없다. 

 신이나 인류라는 이 탁월한 사례들을 보면 이기주의자야말로. 

 최고에 존재라는 건 분명하지 않는가. 이를 교훈 삼아서, 

 나는 이제 신과 인류라는 이기주의자들을 숭배하지도 않고서도 

 내 자신은 이기주의자로 되려한다.

 신과 인류는 다른 건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   다. 

 나도 이들처럼 내 자신만 생각하려 한다. 

 따라서 완전하게 내게 아닌 건 모두 꺼져라. 

 내 자신보다도 더 내게 의미 있는 건 없다!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에 소유>(1845) 재인용.



고드윈이나 슈티르너도 현대에 아나키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는 힘들겠지만. 

체계적이지도 않고 상당히 모호한 개인주의는 아나키스트에 사고방식에서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요소이므로, 극단적 개인주의, 즉 '자유로운' 개인은 아무런 제약도 받지도 않고.

타인과 무관하게 오로지 자신에 목적만을 추구한다는 생각은 비판적으로도 검토할 가치는 있다. 


첫째로. 그렇게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순수한 이기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존재하지도 않았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존재다. 즉, 사회에 다른 구성원에 의존하면서 산다. 국가도 없고

별도에 정치적 권위도 없던 수렵·채집 사회에서 개인은 결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거나 자신만 챙길 순 없었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사냥을 해야 했고. 사냥은 집단적·협력적 활동이었다. 

집단에 구성원으로서 자신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개인은 집단에서 배제되었는데, 

당시 집단에서 오랫동안 배제된다는 건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순수한' 자유는 오로지 생산 영역을 무시할 때만 생각할 수 있는건데, 인간은 생필품을 생산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순수한' 자유란 생각은 생산품을 당연한 걸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즉, 옷이나 음식 같은 생필품은 어디선가 어떻게든 생산돼서,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가정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매우 엘리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태도다. <반대로 마르크스는 생산이라는 문제를 토대로 자신에 역사 이론으로 발전했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는 재화도 아주 풍족한 사회를 건설해서 사람들도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일하기 싫으면 안 하는 거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면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체에 문제, 즉 누가 어떻게 그런 사회를 건설할 건가 하는 문제도 해결되는 건 아니다. 


둘재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극단적 개인주의에 사회적 기원은 매우 부르주아적이었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신, 교회, 신으로 정해놓은 사회질서로 철학에선 출발점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에 격언처럼 

개인주의로 출발점이 된 건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근대 초기에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에 사상, 즉 인간에 삶은 기본적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에 투쟁'이라는 주장은 반아나키스트적 결론, 

즉 강력한 국가는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당화했다. 신고전파 부르주아 경제학도 개인적·합리적 

이기적 소비자라는 '경제인'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더군다나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개인주의적 반권위주의에 좌파적 색채를 입히려 하지만, 많은 보수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주의적 반권위주의를 토대로 매우 우파적이고 친자본주의적인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건 

결코 우연도 아니다. P.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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