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역사서>에 개조에 대한 소견.


역사 재료에 대해선, 그 없어진 걸 채우고, 빠진 걸 기우고, 거짓을 지우고, 헐뜯던 걸, 밝혀서, 

완전하게 하는 방법을 대략이나마 이미 말했거니와, 편찬하고, 정리하는 절차에 있어서도, 

옛날 역사에 투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거다. 


이즈음, 근일에, 때때로, 새로운 체제에 역사를 지었다는 한 두 가지 새 저서는 없진 아니했으나. 

그건, 다만 <신라사>. <고려사>.라 하던, 왕조 독립에 식을 고쳐서, 상세. 중세. 근세로 했고, 

1권, 2권이라 하던, <통감>. <분편>에 이름도 고쳐서, 제 1편, 제 2편이라 했으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재주, 재기. 사이비, 이단이라 하던 걸, 예술이라, 학술이라 해서, 그 귀천에 위치만 바뀌었을 분이고, 임금에게 충실하거나, 외적을 막는, 근왕, 한외라 하던 걸, 애국이라고, 민족적 자각이라 해서,

새롭거나 헐거나, 신구에 이름, 명사만 다를 뿐이니, 전부 털어놓고 말하자면, 우리나라, <한장책>을 서양, <양장책>으로 고쳤음에 지나지 않는거다. 이에 내 어리석은 소견으론, 우리 역사에 개조 방법을 대강, 말해보자면 


1). '계통'을 찾을거다. 


옛 역사, <구사>에는, '갑'대왕은 '을'대왕에 아버지고, '정'대왕은 '병'대왕에 아우이니, 

해서, 왕실에 계통을 찾는 외에 다른 곳에서는 거의 계통을 찾진 않았으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공중에서 거인은 내려오고, 평지에서 참혹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에 넋은 살던, 

신산은 솟아오른 듯해서, 한 편에 <신괴록>을 읽는 거 같다. 


역사는 '인과'에 관계를 밝히자는건데, 만일 이와 같은 '인'이나 이외에 일이 있다 하면, 역사는 무엇하랴. 그건, 지은 사람에 부주의에 의한거고, 본질은 그러한게 아니다. 그러므로, 

<구사>에는 그 계통을 설령,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를 찾을 수 있으니, 

<삼국사기>, <신라사>에 적힌 신라에 화랑, 국선은 진흥대황 때부터, 문무대황 때까지, 전성해서, 신라에, 사다함 같은 이는 겨우 열 대여섯 살에 소년이므로, 그 제자에 수는 대륙에 '대성'인, 공구와 겨루게 되었고, 


이밖에, <삼국사기>에 금대문에 설에 따르면, 현상. 양장. 충신. 용사들은 모두 이 가운데서 났다고도 했으나, 그 동안은 수십 년에 지나지 않았고, 먼 곳에 전한, 성식은 아주 끊어져서, 국선 이전에, 구선에 원인, 개조도 볼 수 없었고, 국선 이후 국선에 후계자도 볼 수 없이도,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갔으니, 이게 어찌 신라에 <신괴록>이라 부르지 않지 아니하고, 없겠는가. 


옛 기록, <고기>에선, 왕검은 국선에 개조임을 찾으매, <고구려사>에선, 조의나 선인 등을 알거고, <고려사>에선, 이지백은 "선랑을 중흥시키자."고 한 쟁론이나, 예종은, "'사선'에 유적을 영광스럽게 하라."하고, 의종은, "국선에 복로를 다시 열라."고 했던, <조서>를 보면, 고려에까지도, 

오히려, 국선에 유통은 있었음을 볼지니, 이걸 계통으로 찾는 방법을 한 예시로 든다. 


2). '회통'을 구할거다.        


'회통'이란 먼저냐, 나중이란, 전후나, 이거냐, 저거냐, 피차에, 관계에 딸리던 걸, 유취해서 모은다는 말이니, <구사>에도 회통이란 명칭은 있었으나, 오직 <예지>(禮志). <과목지>(科目志). , 회통에 방법은 충분하게, 완미하진 못했지만, 이 밖에는 이 명칭을 응용한 곳은 없었다. 그러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홀연하게 모였다가, 홀연하게, 흩어지는 구름으로 같고

돌연하게 불다가도, 그치던 돌개바람, 선풍으로 같아서

도저히도 붙잡을 순 없었다.

 

<고려사>, <묘청전>에 보면, 묘청은 일개, 평양, 서경에, 한 중, 스님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을 치자." 해서, 일시에 군왕 이하에 많은 시민에 동의를 얻어서 기세를 매우 빛내서,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해서, 나라 이름을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고, 인종더러, 대위국 황제에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에, 상소를 올렸는데, 반대 당에 수령인 한낱 유생이던, 김부식은, 임금에 군사를 거느린 스승, 왕사로서 와서, 죄를 묻고자, 문죄하니, 묘청은 어지간하게, 변변하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역사비평, 사평도 있지만. 당시에,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고, 

묘청은 하루차임에도 그렇게 패한 건 무슨 까닭이던가. 


<고려사>에 <세기>와 <열전>을 참고해서 보면 태조 왕건은 거란이랑, 국교를 끊고, 북방에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다가, 거사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 후예 되는 임금, 광종. 숙종. 같은 이는 다 태조에 유지를 성취하려했었고, 신하에도 이지백. 곽원. 왕가도. 같은 이들은 열렬하게 북벌을 주장했으나, 다 실행하지 못하고. 윤관은, 군신에 한마음으로, 두만강 이북을 경영하려는 창끝을 약간이나마, 시험하다, 너무 많아서, 그, 이미 얻은 땅에 구성까지도, '금'나라에, 태조에게 다시 돌려주니, 이는 당시에, 무사들은 천고에 한되는 일로 여겼다. 


그 뒤론, 금에 태조는 '요'나라를 토벌하고, 대륙 북방을 차지해서, 황제를 일컫고, 천하를 노려보았다. 금은 원래 백두산 동북에 여진족, 촌동네, 부락으로서, 우리에게 복종하던, 종이자 노예던, 

노민에, "여진은 종으로 고려를 섬긴다."고 했고, <고려사>에 실린, '김경(영)조'에 <국서>에도,

"여진은 고려를 부모에 나라로 삼았다."고 했다는데, 갑자기도, 강성해져서, 형제에 위치로 바뀌었다. 

<고려사>에 실린 <김경(영)조에 <국서>에도, 형, 금황제(왕)는 글을 아우 고려왕에게 보낸다."고 했다. 이에 나라 사람들 가운데서, 좀 혈기 있던 사람이라면, 모두 국가에 치욕이던, 

국치에 눈물을 뿌렸다. 


묘청은 이러한 틈을 타서, 고려 초기부터 전해오던. "평양에 도읍을 정하면, 36개국, 나라에선, 조공온다고."하던 길흉을 예언하던, <도참>을 가지고서, 부르짖으니, 사대주의에 치우친, 편벽된, 소견을 가지던, 김부식 등 몇몇 사람 이외에는, 모두 묘청에게 호응해서, 대문호던, 정지상이며, 

무술에 뛰어나, 무장이던, 최봉심이며, 여러, 문무를 갖추고, 겸전하던, 윤언이 등은 모두 북벌론을 주창함으로써, 묘청에 세력은 일시에 전성했다. 


오래되진 않아서, 묘청에 하는 짓은 미치고, 어그러지고, 망령되어서, 평양에서 왕명도 없이, 나라 이름을 고치고, 온 조정을 협박했으니, 이에 정지상은 묘청에 행동을 반대했고, 윤언이는 도리어 주의에 다른 김부식이랑 함께, 묘청 토벌에 선봉은 되었다. 이건 묘청은 실패한 원인이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을 죽이고, 묘청을 토벌한 후에도, 또, 윤언이를 내쫓아서, 북벌론자에 뿌리를 소탕해버렸다. 


김부식은 비록 성공했으나, 이로 해서, 조선은 쇠약해질 터전은 잡혔다고 할 순 있을거다. 

이렇게, 참고해서 보면, 묘청에 성패한 원인이나, 그 패한 뒤로, 생긴 결과는 분명, 본명하지 않던가. 이로써 회통을 구한 한 예시를 보인거다.


3). '심습'을 제거할거다.


영국 해군성에, "세계 철갑선에 시초, 비조는 1592년 경에, 조선 해군 대장이던, 이순신이다."라고 한 보고는 <영국사>에 실려 있는데, 당시에,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 배는 철갑이고, 이순신에 건, 철갑은 아니라면서, 그 보고는 틀린 거라고 반박했고, 조선에 집필자들은 이걸 과장하기 위해서, 그 보고를, 그대로 인용해서, 조선이냐, 일본이냐, 어느 나라에서 먼저 철갑선을 처음으로, 만들었는가를를, 창조했는가를 두고서, 논쟁하게 됐다. 


일본인에 말은 아무런 뚜렷한 증거도 없는, 거짓말, 위안인지라, 족히 따질 건 없거니와, 이순신 유고집인, <이충무공전서>에서 설명한, 거북선, 귀선에 제도를 보건대, 배는 널빤지로 꾸몄고,

철판으로 꾸민 건 아닌 듯 하니, 이순신을 장갑선에 비조라고 함은, 옳으나, 철갑선에 비조라 함은 옳진 않을거다. 철갑선에 창조자라고 하면, 보다 더 명예롭지만은, 창조하지도 않은 걸 창조했다고 하면, 이건 보다 더 진보된, '진화계급'을 어지럽힐 뿐이다.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선, 부여에 어떤 학자는 물리학을 발명했다든가, 고려에 어떤 명장은 증기선을 창조했다는 문구를 발견했다하더라도, 우리는 신용하지 못한 건 속일 순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거도 옳진 않기 때문이다. 


4). '본색'을 보존할거다.            


당시, 백과사전이던, <대동운부군옥>에선, "화랑, 국선. 구산, 승려. 등은, 사냥을 나가서, 

어린 짐승이나, 새끼를 가진 짐승을 함부로 어지럽게, 낭자하게, 죽였는데, 주막에 주인은 저녁 밥상에 자신에 다리살을 베어놓곤, 당신, 그대, 공은 어진 이는 아니니, 사람에 고기도 먹어보라고 했다."고 한말도 있었다. 이는 대체로, 당시에 신라에선, 영량. 술랑. 등에 학설은 사회에 침투해서, 국선.오계에 한 가지인, '살상은 골라서 하라.'라고 한 걸, 사람들은 다 실제로 행하던, 실행하던 때이므로, 이를 위반한 자는, 사람에 고기도 먹으리라는 반감으로, 주막에 주인들은 이렇게, 볼 면목 없이, 참혹하게 무안을 준 거다. 그건, 수십자에 지나지 않는 기록이지만, 

신라에 <화랑사>에 일부라 할 순 있겠다.


<고구려사>, <미천왕기>에는, "봉상왕은 그 아우던 돌고는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서, 죽였으니, 돌고에 아들이던, 고구려 미천왕, 을불은 겁이나서, 달아나 수실촌 사람이던, 음모에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음모는 밤마다 기와와 돌을 집옆에 늪에 던져서, 개구리도 울지 못하게 하라 했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해서,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결국, 을불은 견디다 못해서, 일년 만에, 달아나서, 동쪽 마을, 동촌, 동네 사람이던 다시, 재모와 소금장수로 되어서, 압록강에 이르러선, 소금짐을 강동, 사수촌 사람, 집에다 부렸다, 뿌렸다. 한 노파는 외상으로 소금을 달라고하므로, 한 말 쯤 줬더니만, 그 후에는 또 달라고 하므로, 이를 거절했는데, 노파는 원한으로 벼르던 마음에, 앙심을 품고선, 몰래, 짚신 한 켤레를 소금 짐 속에다, 묻었다가, 을불은 길을 떠난 뒤에 쫓아와선, 도둑으로 몰아서, 압록, 벼슬아치, 우두머리던, 압록제에게 고발해서, 짚신 한 켤레에 값으로 소금 한 짐을 빼앗고는, 매질까지 한 뒤에 놓아 보냈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불과 몇 줄 안 되는 기록이지만, 또한, 봉상왕 시대에 재산은 넉넉하거나, 세력있던, 부잣집, 부호에 횡포하고, 잔악한 포학이나, 시민이나 우두머리, 수령들에 사악한 행위를 그린 줄인 

그림(이)자 도면이고, 지도(이)자 약도니, 그 시대에 <풍속사>에선 일반이라 할거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고려사>는 아무 맛도 없는, '어느 임금은 즉위했다.', '어느 대신은 죽었다.' 하는 등에 특정 연도나 월을(일), 연월이나 적고선, 보기만 좋게 '어느 나라, 어느 나라에 사신을 보내왔다.' 하는 등에 적은 사실들 뿐이고, 위에 3). 4). 두 절에서와 같은, 시대에 본색을 그린 글은 보기란 참 어렵다. 이는 유교도에 대의명분만 세운 춘추필법이나, 치우친, 외교주의에 따른 그런 치우친 편견을 낳아서, 

전해내려오던 옛기록, <고기>를 제멋대로 고쳐놓고선, 

그 시대에 사상을 흐리게 한 거다. 


옛날 서양에 어느 역사가는 이웃집에서 두 사람들, 다투던 말을 다 알 수 있도록, 

역력하게 다 들었다. 그런데도, 그 이튿날 자신은 들은 바와 남들은 말하던, 

그 두 사람에 시비는, 도무지도 달랐다. 이에, '옛날부터에 역사는 모두 이 두 사람에 

시비와 같이 잘못 전해진 건 아닌가.'하고선, 자신에 저술한 역사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엿보던, 탐보원은 들어다 보고선, 편집원은 다시 교정하고, 그러고도 잘못은 생기는 예시도 있는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들도 오히려 그 진상이나 큰 차이는 있는 건 허다할 뿐은 아닌지라, 갑에 신문은 이렇다 하면, 을에 신문은 저렇다 해서, 어느 걸 믿을 수 없는 일은 많아졌으니, 하물며, 고대에 한두 사학가는 자신에 좋아하고 싫어하는대로, 아무 책임감도 없이 지은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성계는 고려에 마지막, 말기에, 왕이던 우왕에 목을 베고 그 자리를 빼앗을  때, 후세 사람은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죄를 나무랄까 해서, 죄를 놓아준, 백방으로 우왕은 원래

왕씨에 왕통을 잇지 못할 요망한 중이던, 삼라만상에, 신돈은 거듭, 천첩이자, 우왕에 어머니던 반야에 다시 살아난, 소생이라 하고, 공민왕이던, 경효왕은 신돈에게 집에 어떻게 데려왔냐느니 물어서, 반야는 우왕을 궁인이던 한씨에 소생으로 정한 걸 보고선, 매우 분하고, 통한해서 

울부짖어 우니, 대궐문, 궁문도 그 원통함을 알고 무너졌다느니 해서, 아무쪼록, 

우왕은 신씨임을 교묘하게 증명했다.


그러나 우왕은 오히려 개성 상인이던, 송도 유신들에게 있어 굴 속에 숨어서까지 우왕에 어려운 지경에 놓인, 무함당함을 절규했으므로, 오늘날 사학가들은 비록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오히려 우왕은 왕씨요. 신씨는 아님을 믿는 이도 있다. 또 왕건은 궁예에 장군으로서 궁예에 은총을 받아서 큰 군대, 대병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서 객지에서 죽게, 객사하게 하고, 또한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죄를 싫어하는데 온통, 전력을 집중해서 궁예를 죽여서 마땅한 죄를 구했으니, '궁예는 신라 헌안왕에 아들인데, 왕은 그를 5월 5일에 났음을 미워해서 버렸더니, 궁예는 이를 원망해서 군사를 일으켜서 도둑을 치고선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고 어느 절에선 벽에 그려진 헌안왕에 상까지 칼로 쳤다.'고 했고, 


다시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자, '궁예는 나자 헌안왕은 엄명을 내려서 궁예를 죽이라고 해서 궁녀는 다락처럼 높은 한옥집, 누각 위에서 아래로 내던졌는데, 유모는 누락 아래에서 받다가 손가락으 잘못 아이에 눈을 찔러서 한쪽 눈은 멀었다, 그 유모는 데려다가 비밀리에 길렀는데, 10살은 되자 장난은 몹시 심하므로 유모는 울면서 말하기를 "왕은 너를 버리신 건 내도 차마 버려둘 순 없어서 데려다 길렀는데, 이제 네는 이렇듯 미치광이 짓을 하니 만일 남도 알면 너와 내는 다 죽을거다." 하였다. 궁예는 이 말을 듣고선 울며 머리를 깍고 중으로 됐다. '그 후에는 신라에 정치는 문란함을 보고선 군사를 모아서 큰 뜻을 성취하리라 하고선 도둑 무리에 우두머리 괴수 양길에게로 가서 후한 대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서 동으로 나아가서 땅을 차지했다.'고 했다.


가령 위에 말은 다 참말이라면 이는 궁예와 유모에 평생 비밀일건데, 그걸 듣고 전한 자는 누구이고, 가령 궁예는 왕이 되어서 신라에 범죄와 처벌을 맡던, 형법 밖, 바깥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한다면, 그 말한 날짜나 곳은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해서 데리고 말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에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나를 낳은 은혜를 위함인데, 만일 나를 낳음은 없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만 있는 부모는 무슨 부모겠는가. 


궁예는 헌안왕에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일 역사, 사관에 말은 같이 그는 세상에 나오던 날, 죽으라고 누각 위에서 내던진 날로부터 아버지라는 명분이나 의리, 명의는 끊어졌으니, 궁예는 헌안왕에 몸에 칼질을 해도 아비를 죽인 죄는 될게 없고 신라에 서울이나 왕릉, 능을 남에 권리나 인권을 짓밟고, 유린한다 할지라도, 조상을 모욕한 논란은 될게 없거늘 하물며 왕에 그림을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은 무슨 큰 죄나 논란은 되리만은 고대에 좁은 논리관만으로는 그 두 가지 일, 헌안왕에 초상이나 신라에 대한 겸손하거나 공손하지 아니한, 불공만 해도 궁예는 죽어도 죄는 남을거니, 죽여도 죄는 남아 궁예를 죽이는 데에 무엇은 안 되었으리라.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지고서 죽어서도 고구려, 태조문성에 의식(儀式)이나 존경, 존시를 받아도 추호에 부끄러움은 없을거니, 이건 고려 사관은 감히, 구태여서, 세달사에 한 거지, 비렁댕이 중이던, 궁에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왕궁에 왕자로 만듦인가 한다. 


임금, 제왕이라 반역, 역적이라 함은 승리와 패배, 성패에 별명일 뿐이고, 정론이라, 사론이라 함은 많고 적은 차이일 뿐인데, 게다가 보고 들은 데 잘못은 있고, 쓰는 사람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은 섞이지 않았는가. 


사실도 흘러가는 물도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진 못한다. 이미 간 사실을 그리는 역사를 저술하는 이도 어리석은 사람이거니와, 그 써놓은 걸 가지고 앉아서 옳고 그르고, 굳고 곧은, 

시비곡직을 가리려는 역사를 읽는 이는 더욱 어리석은 사람은 아닌가. 

아니다. 역사는 개인을 표준으로 하는게 아니고, 사회를 표준으로 하는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왕에 성은 왕씨인가. 신씨인가를 조사해서 바로잡느니보다 다만 당시에도, 대륙에 대해서 전쟁을 개시했다고 선전하고, 대륙, 요동 옛 땅을 회복하려 함은 이루어질 일인가. 실패할 일인가. 승리와 패배, 성패 간에 그 결과는 이로울까 해로울까부터 정한 후에 이를 주장한 우왕이랑 반대한 이성계에 시비를 말함은 옳고, 궁예에 성은 궁인가, 김인가, 하는 변론보다, 

신라 이래로, 숭상하던 불교를 개혁해서 조선에 새 불교를 성립시키려 함은 궁예 패망에 도화선이니, 만일 왕건은 아니더라면 궁예에 그 계획은 성취됐을까. 성취됐다면, 그 결과를 확인한 뒤에야 이를 계획하던 궁예와 대적하던 왕건에 옳고 그름을 말함은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로부터 개인을 만드느냐. 이는 고대로부터 역사학자들에 논쟁하는 문제이다. 이조 전반기에 사상계는 세종대왕에 사상으로 지배되고, 후반기에 사상계는 

퇴계 이황, 산인에 사상으로 지배됐다. 


그러면 이조 오백 년 동안에 사회는 세종, 퇴계로 만든게 아닌가. 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중기까지에 육백 년 동안은 영랑, 원효는 각기 당시에 사상계에 한 방면을 차지해서 영랑에 사상은 성해지는 때에는 원효에 사상은 물러나고 원효에 사상은 성해지는 때에는 영랑에 사상은 물러나서, 한번 나아갔다 물러서고, 왔다갔다, 머뭇거리다, 갈라들어서, 사상계에 패왕은 되었으니, 육백 년 동안에 사회는 그 두 사람은 만든 건 아닌가.           


백제에 정치 제도는 온조대왕은 마련해서, 고이대왕으로 마무리했고, 발해에 정치제도는 대조영, 고왕, 고제로 마련해서 선제로 마무리했으니, 만일 온조왕이나 고이왕은 아니었더라면, 백제에 정치는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지, 고제와 선제는 아니었더라면, 발해에 정치는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지 또한 모를 일이다. 


삼경. 오도에 제도는 왕검이나 해부루로부터 수천 년 동안 정치에 모형은 되었으니, 이로써 보면 한 사람에 위대한 인격자에 손끝에서 사회라는 건 되어지는 거고, 사회에 자주성은 없는 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편으로 살펴보자. 고려 말기에 불교에 부패는 극도에 이르러서, 법성종, 원효종은 이미 형세는 기울어서, 쇠미해지고, 대륙에, 임제종에도 또한 뛰어난 이는 없고, 다만 십만 명에 승려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반승회와 제사를 지내고 온갖 놀이도 즐기던, 백만 명에 팔관회로 제물이나 곡식을 낭비해서 국민은 머리를 앓을 뿐만 아니라, 사회는 이미 불교 밖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에 매우, 급급했다. 이에 안유. 우탁이며, 정몽주는 유교에 목탁을 들었고, 그 밑에서 세종은 나고 퇴계는 났으니, 그러면 세종에 세종됨은 퇴계에 퇴계됨은 세종이나 퇴계 그 자신은 스스로 된 건 아니고, 사회는 그렇게 만들었다고 함은 옳지 않을까. 


삼국 말기에, 그 수백 년 동안에 찬란하게 발달한 문학이나 미술에 영향을 받아서 삼한에, 소도천군 미신이나, 불교, 율종소승에 질 나쁜, 하품 불교로는 영혼이나 정신에 세계, 영계에 위안을 줄 순 없어서 사회는 그 새로운 생명을 찾은 지는 또한 오래이므로 신라에 진흥대왕이나 고구려에 연개소문은 다 여러 교종 통일에 새로운 안(案)을 내놓으려 한 일은 있었다. 그 때에 영랑은 도령에 노래를 부르고, 원효는 화엄에 자리를 베풀었으며, 최치원은 유교, 유도에서 불교, 불도로 불도에서 화랑에, 선도로 바꾸는 헤아릴 수도 없는 신통한 재주를 보이니, 이에 사회에 각 방면으로, 각계는 갈채, 환영해서, 이 세 사람을 맞았다. 그러니 영랑이나 원효나 최치원이나 다 본인 자신은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사회는 그렇게 만든 게 아닌가.   



이에 따라서 하나에 의문은 생긴다. 원효는 신라 그때에 났기에 원효로 된 거고, 퇴계는 이조 그때에 났기에 퇴계로 된 거다. 만일 그들은 그리스, 희랍 철학 강단에 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되지는 않았을까. 구라파, 현대에 프랑스나 독일에 났더라면 베르그송이나 발터 오이켄말고, 루돌프 오이켄 정도는 되진 않았을까. 나파륜, 나폴레옹에 뛰어난 재주와 큰 꾀나 계략만으로도, 두루마기를 입고 <대학>을 읽던 시절에 안동, 도산서원 부근에서 태어났더라면, 물러나선 송시열은 되거나, 나아가선 홍경래는 되었을 뿐은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분량으로도 그와 같이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에 면목은 아주 달라졌을 건 주저 말고 딱 잘라서, 단언할 순 있겠다. 논조는 여기에까지 미쳤으나, 개인은 사회라는 불무에서 이뤄질 뿐이니, 개인에 자주성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도 자주성은 없고, 사회도 자주성은 없으면 역사에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걸 볼 때면 개인이나 사회에 자주성은 없으나 환경이나 시대를 따라서도 자주성은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며, 만주며, 터키, 토이기며, 헝가리는, 삼천 년 전에는 다 뚜렷한 한 혈족이었다. 그러나 혹은 아시아에선 그래로 있고 혹은 유럽으로 옮겨가선 대륙에 동서는 달라지고, 

혹은 반도, 혹은 대륙으로, 혹은 사막, 혹은 비옥한 땅으로, 혹은 뜨신 온대, 혹은 찬 한대로 분포해서, 땅에 멀고 가까움은 다르고, 목축이나 농업, 침략이나 낡은 걸, 보수하는 등으로, 생활이나 풍속은 해와 달을 지내는 대로 더욱 사이, 간격은 생겨서, 각자에 자주성을 가졌다. 이건 곧 환경을 따라 성립한 민족성이라 하는거다.


같은 조선으로도 이조 시대와 고려 시대와는 다르고, 고려 시대는 또 동북국들로는 다르고, 동북시대는 삼국와는 같지 아니하고, 왕검. 해부루 시대와도 같진 아니하다. 멀면 일천년에 전후는 다르고, 가까우면 일백 년에 전후는 다르니, 현재부터 이후로는 문명에 진보는 더욱 빨라서, 십년 이전에 거친 원기로, 오랜 옛날에, 홍황은 되고, 일년 이전에 먼 옛날은 될는지는 잘 모르는 일이니, 이건 이른바 시대를 따라 성립하는 사회성이다. 


원효와 퇴계는 시대와 경우를 바꾸어 났다 하면, 원효는 유학을 공부해서, 유자는 되고, 퇴계는 

불경을 공부해서, 불자는 됐을지는 모르는 일이거니와, 뛰고 날던, 도양, 발달한 원효더러 주자에 생활에 법도, 규구만 삼가 지키는 퇴계로 되라 한다면 이는 할 순 없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하고 용렬, 용졸한 퇴계더러 불가에 따로, 별종을 수립한 원효로 되라 한다면, 이는 또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일 거다. 왜냐하면 시대와 경우는 인물을 낳는 원료 됨은 같으나, 인물은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도 다르기 때문이다.


민족도 개인으로 같이 어느 곳, 어느 때에 갑이라는 민족으로 가서, 그 성적은 어떠했든지, 을이라는 민족은 갔더라도, 마찬가지로 결과, 성적을 이루었을 거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대체로, 대개, 개인이나 민족은 두 가지 개성은 있으니, 하나는 한결같은 성질, 항성이고, 다른 하나는 변하거나, 바꾸는 성질, 변성이다. 항성은 첫번째, 제일에 자주성이고, 변성은 둘째로, 버금가는 자주성이니 항성은 많고 변성은 적으면 환경에 순응하지 못해서 모조리 절멸할거고, 변성은 많고 항성은 적으면 보다 나은 자에게 정복 당해서 패할거니, 늘 역사를 회고해서, 두 가지 자주성에 많고 적음을 조절하고 무겁고 가벼움을 균일하게 나누고, 평균하게 해서, 그 생명은 천지와 한 가지로 장차, 장구하게 하려면, 

오직 민족적 반성에 돕고, 따르고, 의지할 수 밖에는 없겠다.  


2). 역사에 개조에 대한 두 가지 결론. 


역사에 개조에 대한 내 어리석은, 우견으론 이상에 의해서 개인이나 사회에 관계에 대해서 두 가지 결론을 지었으니. 


1. 사회에 이미 정해진 국면에서는 한 개인들은 힘쓰기 매우 곤란하고. 

2. 사회에 아직 정해지지 않는 국면에서는 한 개인들은 힘쓰기란 아주 쉽다는 거다. 


정여립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진 아니하고. 모범,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하는 

유교에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 "인민에게 해되는 임금은 죽이는거도 옳고, 가하고. 바른 일, 행의는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거도 가하다."고 하고. "하늘에 뜻, 사람에 마음은 이미 으뜸, 주실을 떠났는데. 주나라를 존중, 존주해선 무엇이고, 군중이나 땅은 벌써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와 사마의에게로 돌아갔는데, 긺, 구구하게, 한 구석에서 바른, 정통은 다 무엇하던거냐."하며, 공자. 주자에 역사 글씨, 필법을 반대하니.


그에 제자던, 신극성 등은. "이는 참으로 전에 성인은 아직 말하지 못한 말씀이다."하고 벼슬, 재상이나 학자들도 그에 재주와 기량, 재기와 학식에 마음에 기울이는 이는 많았으나, 세종대왕에 삼강오륜<三綱五倫>에 얕거나, 썩은, 부식은 벌써 터를 잡고, 퇴계 선생에, 임금을 높이고, 성인에 뒤만 따르던, '존군모성'<尊君慕聖>에 주의는 이미 깊이 박혀서 모든, 먼저, 전 사회는 잘 정돈,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같은 엉뚱한 혁명적 학자를 어찌해서 용납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한 자에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은 폐허도 됐으며, 평생에 저술은 모두 불 속에 들어갔다. 이는 곳. 사회에 이미 정해진 국면, 즉, 1.에 속하는 거다.


최치원은 대륙 유학생으로 떠나갈 때, 그에 아버지는 "10년은 되어도 과거를 하지 못하면 내 아들도 아니다."라고 해서, 하나에 한자 문장, 한문 졸업생은 되는 걸 바랬을 뿐이었고, 최치원은 돌아와서, 휘파람곡으로 쌓는, 무협첩첩한 봉우리를 헤치고서, 절이나, 지위로, 중원에 들어가서 급제해서, 벼슬에서 놀기 3년, 비단옷, 금의로, 동쪽, 내 나라, 동국으로 돌아왔다." 하고 노래해서, 또한 스스로 하나에 한문 졸업생으로 되었음을 자랑했다. 


그 사상은 한나라나 당나라에만 있는 줄로 알고서 신라에 있는 줄은 몰랐으며, 학식은 <유서>나 

<불전>을 뚫고, 관통했으나, 정작, 본국에 대한 옛기록,<고기>는 한 편도 보지도 못했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좇거나, 따르고서, 순 대륙화하려는 거뿐이고, 그 예술은 푸른 하늘, 청천을 대낮, 백일을 대하며, 한 식물은 빛은 부족해서, 누런 물질로 화합해, 황화로나, 푸른 풀, 

녹초만 대하던 대륙에 육조, 당나라, 사륙문체에만 능할 뿐이었다. 


당시에, 영랑이나 원효는 두 파는 다 노후해서, 사회에서 중심도 되는 힘을 잃고, 새 인물에 대한 기대는 마치 굶주린 사람은 밥을 구함이나 같았으니, 그래서 대선생에 칭호는 한낱 한문 졸업생에게로 돌아가고, 다음에는 썩 오랜 시절, 나라에서, 피 묻은 산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던, 

천추에까지 그에게 바쳐선, 고려에 들어와서는 영량이나 원효나 두 파에 자리를 마주 대하게 됐다. '때를 만나면 더벅머리도 이루고, 성공한다.'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니, 2.에 속하는 거다.


어찌 학계뿐일까. 모든 사업은 그러했으니, 재산도 많고, 세력이나 집안도 좋아서, 반란을 일으킨, 기휜이나, 양길도 한때에 크게 펼쳐짐은 신라 말기에, 안정되지도 않던, 판국에서 일어남이고, 이징옥이나 조선에 난, 반란을 일으킨, 이징옥이나, 홍경래도, 슬그머니, 쉽사리, 거연하게,

패망함은 이조에 안정되어 있던 판국에서 그리 된거다. 


백호, 임제는 말하기를. "나도 대륙에 왕조던, 육조나 오계를 만났더라면, 돌아가면서 임금이나 하던, 돌림천자는 얻었겠다."고 했다. 


임백호, 임제. 같은 시인에게 육조. 오계에 송나라, 초대 임금, 유유. 오대, 후량에, 주전충. 같은 도둑에 괴수와 같이 되어선, 돌림천자나마 돌아오게 할 위력만큼은 있었다고는 할 순 없겠으나, 그러나 대륙에 천자를 규모를 세우고 기초를 다져 나가는, 경영하려면, 한나라. 당나라에 잘 다스려진, 치세보단, 육조. 오계에 어지러운, 난세는 더 쉽다는 건 자명한 도리에 맞는 취지, 

이치일거다.


이미 안정된 사회에 인물은 늘 전에 사람에 필법만을 배워놓고선, 이걸 또 덧붙여선, 부연하고, 이걸 넓혀선, 확장할 뿐이니, 인물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는 크진 못해서, 혁명에 대한 성질, 혁명성을 가진 인물, 정여립 같은, 사람은, 매번, 실패로 미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해서, 한 말이나, 한 일에 자취나, 종적까지 없애버리므로, 후세에 끼치는 작용이나, 영향은 거의, 대부분 첫값, 영도로 되고, 오직 삼백 년이나, 오백 년 뒤에야, 한 두 사람, 마음이나 뜻은 맞던, 통하는 이는 있어서, 

그에게 남긴 들리던 소문, 유언, 유음을 감상할 뿐이고, 

안정되지도 않는 사회에선 인물은 반드시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사내다운 남아면 좋을 듯하지만. 


어떤 때에는 꼭 그렇지만도 아니해서, 최치원 같은, 작은 칼로도 잔재주를 부리는 하품에 재주꾼으로서, 

외국인(들)에 입만을 흉내내선, 말하고, 웃고, 노래함은, 그럴듯해서 사람들을 움직일만하면, 슬그머니, 쉽사리, 거연하게, 인물에 지위를 얻기도 하나, 사람됨에, 인격적 자주성에 대한 표현은 없고, 정작, 자유를 구속 당하고, 남에게 부림을 받는, 노예적 습성만 발휘해선, 

모든, 앞선, 전 민족에 한결같던, 항성은 파묻어버리고선, 

변하거나, 바뀌는, 변성만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나쁜 기계만 되고 마니, 

이는 사회를 위해선 두려워하는 바이고, 

어쩌면. 뛰어난 사람, 즉, 인물되기를 뜻하는 사람(들)은 잘못에도 마음을 쓰고, 

조심해서, 경계하고, 삼가야만 할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3. 각종 명사, 이름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곧 후에니키인은 이집트에 상형문자를 가져다, 알파벳을 만들었듯이, 한자를 가져다, 구개음으로 전해서,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그 초창기에는, 한자에 음을 딴 거도 있었고, 혹은 그 뜻을 딴 거도 있으니, <삼국사기>에 보인 사람에 이름으로는, 마립간을 지칭하던, '소지'. 일명 비처라 하면, 빛에 뜻은 소지로 된거고, 음은 비처로 된거, '소나', 일명, 금천이라 함은 뜻은 금천, 음은 소나로 된거고, 거칠부, 일명 황종이라 함은, 거칠위에 음은 거칠부, 뜻은 황종으로 된거고, '개소문', 일명, '개금'은 '신'에 음은 소문, 뜻은 금으로 된거고, 


'이사부', 일명, 태종은 '잇위'에 음은 이사부, 뜻은 '태종'으로 된거다. 

지명으론, '밀성', '추화'라고도 함은, '밀무'란 음에, 밀성, 뜻은 추화로 된거고, 

'웅산'. '공목달'로함은, '곰대'에 뜻은 웅산, 즉, 공목달로 된거고, '계립령', 일명, 마목령이라 함은 '저름<겨릅>'에 음은 계립, 뜻은 마목으로 된거고, '모성', '막성'이라고도 함은, '어미'에 뜻은 모나 음은 막으로 된거고, '흑양', '금물노'라고도 함은, '거물라'에 '거물'에 뜻은 흑이나, 음은 금물로 된거고, '양'이나 '노'는, 다, '하'에 음을 취한거다. 


관명으로는, '각간을 혹은 발한이라함'은 '불'에 뜻은, 각, 음으로 '발'로 된거고, '간'이나 '한'은 

다 '한'에 음을 취한거나, 부한은 군왕을 일컬었고, '누살'을 혹은 '도사'라 함은, '라'에 뜻은 도나 음에서 누로 된거고, '살'에 뜻은 '사', '음'으로, '사'로 된거니, '라살'은 지방장관을 일컬었고, '말한', '불한', '신한'은 삼신에서 근원한건데, 뜻으론, 천일. 지일. 태일로 되고. 음으론, 마한. 변한. 진한으로 된거고. '도가'. '개가'. '크가'. '소가'. '말가'. 는 다섯 대신에 칭호인데, '도.개.크.소.말' 등은 뜻으론, '가'는 음으론, '저가'. '구가'. '대가'. '우가'. '마가'로 된거다. 


이같은 자질구레한, 고증은 무슨 역사상에 큰 일은 되는가. 이건 자질구레한듯하나. 지지에 잘못도 이로써 바로잡을 수도 있고, 사료에 의혹도 이로써, 보충할 수도 있으며, 고대에 문학에서부터, 모든 생활 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로 된다. 이를테면, 해모수와 유화왕후는, 만난 압록강은 어디던가. 현재에 압록강 때라 하면, 당시에, 부여에 서울이던 '합이빈'에선 너무 멀리 떨어져있고, 다른 곳이라면, 달리 또 압록은 없어, 그 의문을 깨뜨리진 못했더니, 첫 걸음에, <광개토호태왕>에 '비'에, 현재에, 압록강을 아리수라 하였음을 보고선, 압록에 이름은 '아리'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두번째론, <요사>에, '요흥종은 압자하를 혼돈강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 걸 보고선, ''압자'는 곧 '아리'여서, 즉, 대륙, 혼돈강 곧 송화강에 고대에 북압록강인가.'하는 가설을 얻었고, 다음에 <동사강목>, '고이'에, '<삼국유사>에, '요화', 일명, 압록이나 주희에 여진은 일어나, 압록강에 웅거했다.'고 한 걸, 들어서, '세 압록은 있다.'고 했음을 보고선, 송화강은 고대에 한 압록강이었음을 알았고, 따라서, 해모수 부부는 만난 압록강은 곧 송화강임을 굳혔다. 


<마한전>에는, '비리'를, 건륭제에 <삼한정류>에는, 만주에 패륵이나, 같은 관명으로 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삼한에 '비리'는 <삼국지리지>. 백제에 '부리'이니, '비리'나, '부리'는 다 '울'에 취음이고, 도회란 뜻이다. 마한에 비리와 백제에, 부리를 참조해보면, 마한에 '벽비리'는 백제에 '파부리'고, '초산도비리'는 '미동부'리고, '고랍비리'는, '고막부리'니, 비록 이 음은, 저 뜻도, 이역, 다른 해석은 있기는 하지만, 그 대략으론, 얻을 순 있을거고, 따라서, 조선, 관중은 싸우던 때에, 대륙, 산서성이나, 영평부에, '비이'에 '계'를 뒀으니, '비이'는 '비리', 곧, '울'에 대한 번역이다. 이에서 조선 고대에 '울'은 곧 

'산해관', '서족'까지에 이르렀음을 알 순 있겠다. 


그러므로, 자질구레한 고증은, 역사상에, 큰 일은 아니지만, 도리어 역사상에, 큰 일을 발견한 연장이란 하겠다.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선, <훈몽자회>. <처용가>. <훈민정음>. 등에선, 옛 말을 연구하고, <삼국유사>에 씌어있던, <향가>에선, 이두문에 용법을 연구해보면, 역사상 허다한 발견이라도, 있긴 할거다. 필자는 일찍, 이에 유의한 바 있었는데, 해외에 나간 후론, 한 권에 책을 얻기란, 도저히, 심히 어려워서,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했으나, 또한 얻어볼 순 없었다.                                   


4. <위조서>에 판별, 선택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태종에 <분서>와 같은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에는 있었으나. <위조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선 <천부경>. <삼일신고>. 등은 처음 출현했으나, 누구에 시비를 가리는 변박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책은 각 씨족에 족보, 가운데서도, 그 조상에 일을 혹은 위조한게 있던 일,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에 변별에는 애쓸 필요는 없었거니와, 우리와 이웃해 있는 대륙, 니폰, 두 나라는 전통에 대한 예로부터, 교제는 빈번했으니,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책은 적지 않지만, <위조서> 많기론, 대륙 같은 나라도 드물거니, <위조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까지, 우리 역사에선,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란 쉽다.


그렇지만, 그 거짓에는 구별은 있다. 하나는 거짓 중에 거짓이니, 이를테면, <죽서기년>은 진본은 없어지고, '위조작'은 나왔음을 앞에서 이미 말했거니와, 옛날 사학가들은, 늘 <고기>에, '단군은 요임금이랑, 함께, 무진년에 섰다.'고 한 글에 의해서, 단군에 '연대'(年代)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 임금에, 연대에 비교하고자하며, 요 임금에, 연대를 찾는 이는, <속강목>에 고준한다. 대륙, 주소에 공화, 이전에 연대는, 대륙 역사가에, 대조라 할 만한, 사마천도 알지 못해서, 그에 <사기>연표에 쓰지 못했거늘, 하물며, 그보다도, 더 아득히 멂, 요 이금에 연대라.. 그러므로, <속강목>은 다만, 거짓된, <죽서기년>에 의거해서 적은 연대이니, 이제 <속강목>에 의거해서, 고대에 연대를 찾으려 함은, 도리어, 연대를 흐리게 한다.     


공안국에 <상서전>에는, '고구려 '한맥'이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고구려와, 삼한은 대륙에, 주무왕이랑, 교통했음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사기>, <공자세가>에는, "'안국'은 현재, 황제에, 박사로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으니, '현재에 황제'는 대륙에, '무제'이다. 무제를 '현재에 황제'라 한 건, 사마천은 무제는 죽어서, 무제라는 시호를 받은 걸 못 봤기 때문이고, 안국을 일찍 죽었다.'고 한 건, 사마천은 생전에 안국에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거다. 


그렇다면, 공안국은 사마천보다 먼저 죽고, 사마천은, 무제보단, 먼저 죽었음은 명백한데, <상서전>에선, 무제에 아들인 '소제'시대에 창설한 '금성군'이란 이름은 있으니, 공안국, 그는 죽은 뒤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만한, 점쟁이라면, 모를까, 만일 그렇지도 않는다고 하면, <위조서>임은 또 분명하고, 거기에, 기록된, 고'구려'. '한맥'. 등도 자연스럽게도, 명백해질거다.  


다음은 참 중에 참인데, 이걸 다시 둘로 나누면, 


1>. 하나는 본서에 위증이니, <초학집>. <유학집>. 등은, 전겸익은 실제로 저술했던게 있지만, 

그에 글 가운데서 씌어진, 우리나라에 대한 일은, 대체로, 전겸익에 위조고, 실제로는 없는게 더 많았으니, 그건 바로, 이런 따위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에 역사에선 그걸 반박할 확고한 증거들은 있거니와, 만일 우리 역사에 

반박할 재료는 없어지고, 지네들에, 거짓된 기록만을 떠돌면서, 유전된다고만 한다면, 다만 가설에 부인만으로는 안 될거니, 어찌하면 좋고, 옳을까. 옛날에 장유는 <사기>에, "무왕은 대륙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 걸 바로잡고자, 변정하는데, 


첫째로는, <상서>에, "나는 남에 신하는 되진 않겠다고."한 말을 들어서, 기자는 이미 남에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으니, 무왕에 봉작에, "기자는 조선으로 몸을 피하였다."고 한 걸 들어서, 대륙에, 반고는 <사기>를 지은 사마천보다 성실하고, 정밀한, 역사가로서, 사마천에 <사기>에 기록된 기자에 봉작설을 빼버리고선, 봉작은 사실은 아니라고 단언을 내렸으니, 


이건, 사람에 대한 까닭, '인증'(人證)이다.


삼국 이후론, 몽골 침입 이전에, 고려 말기, 우리나라 형세는 강성해서, 대륙에 대해서, 전쟁으로,

맞설 때에도, 내게 보낸 <국서>에, 저에게로, 우리를 낮추어 한 말은 많이 있었거니와, 그들은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내조'라고 썼음은, 대륙인에 병적인 자존에 대한 성질인거니, 

이는 대륙에, 근세즈음, 청조는 처음 서양에 마주했을 때, '영'. '로'. 등 여러나라에 와서 알려진 사실을 죄다 "모국은 신하를 일컫고, 공물을 바쳤다."고 썼음을 보아도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니, 무리들이나, 그네에 기록은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


또 대륙인들도 만든, <열조시집>. <양조평양록>. 등은 '시화' 가운데서도, 조선사람에 시를 가져다, 게재할 때에는 대담하게 한 구절 한 줄을 고쳤음을 볼 순 있으니, 우리에 역사를 적을 때에도, 자구를 고쳤었음은 알거다. 그리고 몽골에 위력은, 우리나라를 뒤흔들 때, 우리에 '악부'. '사책'을 가져다, '황도'. '제경'. '해동천자'. 등에 자구를 모두 고친 사실은, <고려사>에도 보였으니, 그 고친 기록을 바로잡지 못한 <삼국사>. <고려사>. 등도, 대륙이랑 관계된 문제는 실제에 기록은 아님을 알거다. 


이건, 일에 대한 까닭, '사증'(事證)이다.   


연전에, 김택영, <역사집략>. 장지연, <대한강역고>. 일본에 '신공여주' 18년에, 신라를 정복했고, '수인주', 2년에 '임나부'를 설치했다는 건, 모두 <일본서기>에서 그대로 따다가, 적고, 그 박식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신공' 18년은 신라 '내해왕' 4년, 서기론 199년이고, 내해왕 당년에는, 신라는 압록강을 구경한 이도 별로 없었을텐데, 이제 내해왕은 압록강(아리나례)를 가리키면서, 맹세했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이고, 수인주는 백제와 만나서, 교통하기 전에도, 일본에 임금이니, 백제에 봉직도 수입은 안됐을 때인데, 수인주 2년인데 '임나국' 사람에게, 붉은 비단, 이백 필을 주었다 함은 어쩌잔말인가.


이 두 가지 의문에 대답하기 전에도, 그 두 사건에, 기사는 스스로 부정하고 있으니, 


이건, 다른 까닭, '이증'(異證)이다. 


이렇게, 고인에 위증을 '사람'(人)으로 '일'(事)로 '이치'(理)로, 증명해서, 

부합하지 않으면, 그건 거짓임을 알거다.


2>. 후세 사람에 위증이니, 원서에는 본래 거짓은 없었는데, 후세 사람은 문구를 보태어서, 

위증한거다. 마치 당태종은, 고구려를 치려해서, 그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남사>. <북사>. 등에 보인 조선에 대한 사실을 가져다,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대륙에, 안사고, 등으로 하여금, 왜곡한 사실로, 곡필을 잡아 고치고선, 보태고, 바꾸고, 

억지로, 주를 달아서, 사군에 연혁은 거짓 중에 거짓으로 되고, 역대 두 나라에 <국서>는

더욱 본래대로 전해진 건 없게 됐다. 


이러한 증거론, 본편 제2장 <지리연혁>에서도 볼 순 있을거다. 다음은 거짓, 가운데서도, 참된건데, 마치 대륙에, <관자>같은 건, 대륙, 관중에 저작도 아니고, 대륙에, 육국 시대에, 저작인 <위서>나, 조선이나, '제'나라에 전쟁은, 도리어 그 실상을 전한 자이니, 위서로서도, 진서 중에 <진서>, 

이상에 가치를 가진거라 할거다.          


5. 만주(滿). 몽고(). 오스만/토후국().


김부식은 김춘추. 최치원. 이래로 모화주의에 결정이니,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엔 "고주몽은 고신씨에 후예다.", "김수로는 금천씨에 후예다.", "진한은 중국 진인이랑 동래한거다."해서,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은 한가지도 같은게 없는, 대륙족을 동종으로 보아서, 말살에다, 쇠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후론, 그 편벽된 소견을 간파한 이는 아직 없었으므로, 우리 부여에 계는 분명하지 못해서, 드디어는 <조선사>에 위치를 어두운 구석에 둔 지는 오래였다. 


언제인가 필자는 <사기>, <흉노전>을 보니, 삼성에 귀족 있음은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 있음은, 

고려나 백제와 같고, 5월에 '제천'은 마한이랑 같고, '무기일'을 숭상함은 고려와 같고, '왕공'을 

'한'이라 함은, 삼국에 '간'이랑 같고, 벼슬 이름 끝 글자에 '치'라는 음도 있음은, 삼한 때, 

'신지'에 '지'와 신라에 벼슬 이름인 '한지'에 '지'와 같고, 황제나, 임금에 아내를 뜻하던, 

'''알씨'라 함은 곧 '아씨'에 번역은 아닌가 하는 가설도 생겼다.


사람이랑 동물이나 짐승, 가축을 뜻하던, 인축. 물건값을 치르고, 회계하던 곳을, '담림' 혹은 '대림'이라 함은 '살임'에 뜻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나고, 삼한 때, '휴도'는 '소도'와도 음은 같을 뿐 아니라, 나라 안에선, '대휴도'를 둔 휴도국은 있고, 각처에 또 작은, 소, 휴도도 있어서, 더욱 삼한에 소도와 틀림은 없었다. 


이에 조선이나 노예신분이던, 이민족, 흉노는, 삼천 년 전에는 한방 안에 형제였다는 의문스러운, 의안을 가져서, 그 해결을 구하다가, 그 후론, 청나라, '건륭제'도 지은 <만주원류고>와, 요. 금. 원. 세 역사에선, <국어해>를 가지고서도 비교해보았더니, 비록 그 가운데선, 부여에 대신에 대한 칭호로 우두머리를 뜻하던, '가'로, 음을 풀이해서, 조선말 김이나, 이나, 하던, '가'와 같은 뜻이라 하진 않고, 뜻으로 풀이하고, 주석해서, 집을 뜻하던, '가'에 잘못이라 했으며, '금사'. '발극렬'을 음으로 맞는 신라에 '불구래'에 상당한거라 하지 않고서, 청나라, '청조'에 '패륵'에 동류라한 건 등에 대해선, 잘못은 없지 아니했으나, 주몽은 만주어론, '주림물', 곧, '삼림'에 뜻이라하고, 삼한에 벼슬 이름은, 가르다라는 뜻으로, '지'로, 곧 '동몽고'에 중을 만나서, '동몽고'에 말을, 동.서.남.북으로 물으니, 연나. 준나. 우진나. 회차라고 해서, <고려사>에, "도부를 '순나라'라 하고, 서부를 '연나라'라 하고, 남부를 '관나라하고, 북부를 '절나라'라하고" 라고 부르던, 같음을 알았다.


또 그 후론, 일본인, 도리이 류조, '조거용장'은 조사 발표한,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 종족에 현행하는 말로, 내 떠올린, 기억으론, 오직 '귀자'를 '아기'라, '마른장', '건장', '메주'라 하는 한두 가지 뿐이지만, 같은 걸, 수십 종도 있음이란, 억단을 내렸고, 대륙 역사, 24사에, 선비. 이민족. 몽고. 등에 대한 기록만을 가지고서, 그 종교와 풍속에 같고 다름을 참조했고, 서양사로써, 이민족에 유종은 토이기. 흉아리. 등지로 옮겨간 사실을 고열해서,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종족은 같은 혈족이라는 또 하나에 억단을 내리게된거다.


이 억단에, 옳고 그름은 고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조선에 고어뿐만 아니라, 만주어. 몽어. 등도 연구해서, 고대에 지명. 벼슬 이름에 뜻을 깨닫는 동시에, 이주하거나, 교통한 자취며,

싸우거나, 빼앗은, 자리며, 풍속에 같고 다른 차이며, 문명이나 야만이란, 문야에, 높고 낮은 원인을 구명하고, 그 밖에 허다한 서적에 탐구와 잘못된 문헌에 교정 등에도, 힘을 기울여야겠다.


이상에 다섯 가지는, 재료에 수집이나, 그 선택 등에선, 수고로움에 대해서 내 자신에, 경력을 말한거다. 조선. 대륙. 니폰. 등 동양 문헌에 대한 대, 도서관은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란 정말로 어려울거다. 일본에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도 십분 만족하다할 도서관은 마땅하겐, 없으나, 그러나 동양으론, 제일이고, 또 현재에 들어선, 또, 조선에 소유는 그 외부에 창고나 옥사던, 곳집은 되고, 또, 서적에 구독이나 각종 자료에 수집은 우리같이 떠돌아다니고, 표랑생활 중에 있던 가난한 선비던, '한사'보단 월등하겐 나을거고, 게다가, 새 사학에 상당한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기에 이르렀으나, 현재까지도 '동양학'에 훌륭한 사람으로, '위걸'도 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저들 중에선, 가장 명성은 높던 자는 시라도리 구라키치, '백조고길'이라 하지만은, 

그도 저술했던 <신라사>를 보자면, 배열. 정리에 새로운 형식은 볼 수도 없고, 한 두 가지 발명도 없음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던가. 좁은 천성은, 조선을 헐뜯기에만 급급해서, 공평을 결함으로, 

인하거나, 여긴건가조선사람으로선, 어찌해서, 조선사학은, 일본인으로부터 열리고, 

'개단'하기를 바라리요, 바라지마는, 보배창고를, 보장마저, 

남김없이 가져다가, 어리석고, 어두워서, 암매 중에선, 

썩임을 못마땅해서, 개탄하고, 안타까워서도, 아까워하진 않을 순 없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에 역사를 연구해야하겠느냐하면, 

그 대답은 매우 곤란하나, 우선 내 경과부터 말해보고자 한다. 이제부터 16년 전에, 

'한일합방'이란 국치에 발분해서, 비로소 <동국통감>을 읽으면서 역사비평으로, 사평체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어서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표하고, 이어서, 수십 학생들에 청구에 의해서,

대륙식에 연례에 대한 의식인 연의를 본받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년사>란 걸 짓다가, 두 가지 다 사고로 인해서 중지하고 말았었다. 그 논평에 독단과 행동에 대담하였음을 

현재까지도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니와, 그 이후로도 얼마만큼 분발해서 힘쓴 적도 없진 아니하나, 

나아간게 고작 몇 발자국 걸음으로, 촌보 쯤도 못 된 원인을 오늘에 와서야 국내 일반 역사를 읽는, 

독사계에 호소하고자 한다.


1. 옛 비석에 참조에 대해서. 


일찍 <사곽잡록>을 보다가, "신립은 선춘령, 아래에서 옛 비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몰래 사람을 보내서, 두만강을 건너서 종이에다, 탁본을 떠왔는데, 알아볼 만한 글자가 삼백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 글에 황제라고 한 건 고구려왕은 스스로를 일컬은거고, 그 '상가'라 칭한 건, 고구려에 대신들을 일컬은거다."고 한 일절이 있음을 보고, 크게 기뻐서, 만주 깊은 산중에 천고, 고사에 이빠진 걸 보충할만한 비석쪽은 하나뿐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해외에 나간 날부터 고구려, 발해에 옛 비석을 답사하리라는 회포도 몹시 깊었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던 선객들에게 그 항로 중에서 전설로 내려온 석혁산악에 우뚝 서 있는 윤관에 가공비를 보았다는 말도 있고, 봉천성성에서 간접으로 이통주를 유람했다는 사람은 그 고을 동쪽 70리에 남아 있는 해부루에 송덕비를 보았노라는 이야기하며, 발해에 옛 서울에서 온 친구는 폭이 30리인 경박호에 앞쪽<북쪽>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겨룰만한 일만 길 세찬 폭포인, 비폭을 구경했다고 하는 말도 있었고, 해롱현에서 나온 나그네는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에 세 섬을 가라앉히겠노라고, 한 신라 문무대왕에 유묘를 예배했다는 이야기 등이 나에게는 귀로 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직접 볼 기회는 없었다. 


한번 네댓 벗으로 동행해서, 압록강 위에 집안현, 곧 고구려, 제 2에 '환도성'을 얼씬 얼씬 보았음이 내 인생에 기념할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가 모두 몇인지 세어볼 여가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고, 묘가 일만 내외라는 억단만 했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주는 댓잎에 그린 금척이나 그곳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박아서 판 광개토왕 비문을 값만 물어보았고, 수백에 왕릉 가운데 천행으로 남아 잇는 팔층 석탑, 사면으로 네모진 광개토왕릉이나 그 오른편에 '제천단'을 붓으로 대강 그려서 사진으로 대신했고, 그 왕릉에 넓이와 높이를 발로 재고, 몸으로 견주어서 자로 재는 걸 대신했을 뿐이었다. 


높이는 10길 가량이고, 아래층에 둘레는 80발인데, 다른 왕릉들은 위층이 파괴되어서, 높이는 알 수도 없고, 그 아래층에 둘레는 대체로 광개토왕과 같다. 왕릉에 위층에 올라서 돌기둥이 섰던 자취와 덮은 기와에 남은 조각이나 드문드문 서있던 소나무, 잣나무를 보고서 <후한서>에,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이나 재백을 다해서,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고 한 아주 단순한 문구에 뜻을 비로소 충분하게 해석하고, '수백 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파볼 수 있을거고,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파볼 수도 있을거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에 활사진이라도 볼 수 있을텐데.' 하는 꿈 같은 생각만 했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에 보고를 만나서도 내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와 물력이 없으면 재료가 있을지라도, 내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하룻동안 그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만 있었지만은, 고구려에 종교. 예술. 경제력 등에 어떠함은 눈앞에 살아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번 보는게 김부식에 <고구려사>를 만번 읽기보단 훨 낫다."는 단안을 내렸다.


그 뒤론, 항주 도서관에서 우리나라 금석학자 김정희는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대륙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을 보니, 신라말, 고려초기에 사조와 속상에 참고가 될만한게 많았고, 한성에 한벗이 보내준 총독부 발행에 <조선고적도보>도 그 조사한 동기에 어떠함이나 주해에 억지로 끌어다 붙인 몇몇 부분만을 제외하면, 우리들에 옛역사, 고사 연구에도 도움될 건 많았다.

이거냐, 저거냐, 다 우리 한미한 서생에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2. 각 서적에 대한 개별적인 증거들에 대해서. 


1). 일찍 고려 <최영전>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길. "당나라는 삼십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해서, 고구려는 승군으로 삼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고 했으나, <삼국사기> 50권 중에선 이 사실이 보이진 아니한다.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대륙, 서긍에 <고려도경>에 "집에 머물면서, 재가한 화상으론 큰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딱히 계율도 행하진 아니했고, 조백으로만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거나, 어쩌다 아내도 생기고, 자식도 길렀고, 물건에 운반이나, 도로를 닦으며 소제하거나, 도랑을 파서 개척하거나, 성에 거처를 수축하는 등 공사로나, 복역해서, 국경에 적이 침입하거나하면, 스스로 단결해서 싸움에도 나서봤는데, 중간에 거란도 이들에게 패했으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죄다 깍았으므로, 이인, 이민족들은 오히려 그들을 보고선 화상이라 했다." 하였으니, 이것에서 승군에 면목을 대강 알 순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은 어디에서 비롯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없진 않다. 


<통전>. <신당서>. 등 이름있는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이라는 관명도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관저에 명림답부를 '연나조의'라 했었고, <후주서>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이라고도 했으니, 

선인(先人, 仙人)이라는 말은 죄다 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으로만 번역한거고, 조의 혹은 백의란 

<고의도경>에 이른바 조백으로만 허리를 동이므로, 지은 이름함이다.

 

여기서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에 화랑, 국선과 같은 종교적이던 무사단에 대한 단장이고,

승군은 국선 아래 딸린 단병들이고, 승군은 재가한 화상이라 함은 후세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다.

 

서긍은 외국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선 이걸 보고서, 그 단체에 행동을 서술함에 있어서, 그 근원을 물었으니, 복역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억측의, 명사로 말해준거다. 이에 <고려사>로 인해서,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으로 인해서 <고려사>에 자세하지 않던 승군에 성질을 알게 되고, <통전>. <신당서>. <후주서>. 신라에 <고서>. 등으로 인해서 승군이나 선인<先人)과 재가에 화상은 같은 단체에 무리임을 알게됐으니, 다시 말해서, 당나라에 삼십만 침입군은 고구려에 종겨적 무사단인 선인군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몇십 자에 간략한 역사를 여섯, 일곱가지 수천 권을 뒤진 결과로 비로소 알아낸거다.

 

2). 당나라 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이 상했다는 전설도 있어서, 후세 사람은 매번 이걸 역사에 올렸는데, 이색에 <정관음>에도, "어찌 눈에 화살을 맞아, 소나기라도 떨어질 줄 알았으리라."라고 해서, 그게 사실임을 증명했으나, 김부식에 <삼국사기>와 대륙인에 <신구당서>에선 보이지 않음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만일 사실에 진위를 묻지도 않고,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버렸다간 역사상에 위증죄를 범한게 된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에 눈 상한 사실을 대륙에 역사를 기록한, 사관은 의도적으로, 일부로, 뺀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서 그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

 

송나라 태종은 거란을 치다가, 흐른 화살에 상해서, 달아나 돌아가서, 몇 해 후에야 필경 그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했는데, 이건 <송사>, <요사>에는 보이진 아니하고, 사건은 여러 백 년 지난 뒤에야, 진정은 고증해서 발견했다. 이에 내가 보기엔, 대륙인은 그 임금이나 신하나, 다른 민족에게 패해서, 상하거나, 죽거나하면, 그걸 당대에, 나라에선 수치라 여겨서, 숨기고, 역사에 또, 기록하지 않은 실증을 얻어서, 내 앞에 가설을 성립했다.


그러나 대륙인에게 국가에 대한 치욕, 국치를 숨기는 버릇이 있다해서, 당나라 태종은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상했다는 실증은 되지 못하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에, 태종은 당시, 정관, 19년,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했다했고, <유박전>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에 병세는 위급했으므로, 유박은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했다고 하며, <본기>에는 정관 20년에 임금에 병은 낫지 아니해서, 태자에게 정사를 급히 맡기고, 정관23년 5월에 죽었다고 했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복>에는, 창자에 곱이 섞여나오는, 이질로 다시 악화된거라했고, <자치통감>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은 있었다고했다.


대개 높은 이와 친한 이에 욕봄을 꺼리거나, 숨겨서, 주천자는 종후에 화살에 상했음이나, 노나라에 은공. 송공. 등은 살해당하고, 쫓겨났음을 <춘추>에 쓰지 아니했는데, 공구에 이런 편견은 대륙 역사가에 버릇이 되어서, 당나라 태종은 이미 빠진 눈을 유리쪽으로 가려놓고, 그에 <임상병록에 기록을 모두 딴 말로 바꾸어놓았다. 


화살에 상처는 몸에서 곪아서, 내종으로 되고, 눈병은 항문병으로 되어서, 전쟁에 부상으로 인해,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은 걸로 기록해놓았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해서, 실제대로 적지도 않았던가. 이는 신라는.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미워해서, 그 명예로운 역사를 소탕해서, 위병을 격파한 삼국 시대 때, 사법명이나, 수군을 물리친, 을지문덕을 도리어, 대륙에 역사로 인해서, 그 이름은 전해졌으니, 당태종은 눈을 잃고, 달아났음은, 고구려에 <전쟁사>에선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인지라, 신라인은 이걸 또 빼버렸음은,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태종에 눈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이나 <목은집>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서,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걸 기재하지 않은 의문을 깨침에 있어서, 진정에 <야산묵담>에서 같은 종류에, 사항을 발견하거나, 공구에 <춘추>에서 그 전통에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 <통감강목>. 등을 가져다, 그 모호하거나, 은미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는, 당태종 병록이나 이질. 등에 대한 보고는 사실은 아님을 갈파하고. 


둘째로는, 목은. <정관음>에 신용할 만함을 실증하고,


셋재로는, 신라 사람은 고구려 승리에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당태종에 패전이나 부상한 사실은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단순한 결론을 얻었으니, 이른바, '당태종은 보장왕. 3년. 서기론 644년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해서, 돌아가, 당시에 외과 의사에 불완전으로, 대략, 30달을 앓다가, 보장왕 5년에 이르러 죽었다.'라는거다. 이 수십자를 얻기에도, 5,6 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해서 읽어보거나, 들며, 나며, 혹은 무의식 중에서, 얻거나 혹은, 무의식 중에서 찾아내서,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은 또한 적지 아니했다. 


승군에 내력을 모르면 무엇은 해롭고, 당태종은 부상한 사실을 안들, 무엇은 이롭기에 이런 사실을 애써, 탐색하느냐 할 이도 있겠지마는, 그러나 사학은 하나, 하나를 모으고, 잘못 전해진 걸, 바로 잡고, 과거 인류에 행동을 여실하게 그려내서, 후세 사람들에게, 깨쳐주는거니, 승군, 곧 선인군에 내력을 모르면, 다만 고구려는 당나라 군사만을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뒤따른 명림답부에 혁명군에 중심이나 강감찬에 거란을 격파한 군대에 주력은 다 무엇이었던지도 몰랐을거고, 따라서 삼국에서부터, 고려까지에 일천여 년 군제상에선 중요한 점도 몰랐을거고, 당태종은 눈을 잃고 죽은 줄을 모른다면, 안시성 전국은 속히 결말났던 원인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걸 또, 신라와 당나라는 연맹하게 된 배경이나, 당나라, 고종은, 그 신하나 모든 희생을 돌아보지도 않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룬 전제로나,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손을 맞잡게 된 동기던 걸 몰랐을거다. 그러나 위에 든 건 그저 한 두 가지, 예시일 뿐이고, 이 밖에도, 이 같은 일은 얼마인지를 모를거니, 그러므로, <조선사>에 황무지를 개척하자면, 도저히 한 두 사람에 힘만으론, 단시일에 완결하는게 아님을 깨달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에 역사에 대한 서류를 찾는다면 신지 때부터 비롯되겠는데. 신지는 권벽에 <응제시>에서 단군 때 사관이라고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로서 보건대 단군은 곧 제사를 지내던 임금이요. 신지는 사람에 이름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던 임금에 우두머리를 돕는 벼슬 이름이 신치였으니. 역대에 신치들은 해마다 10월제사를 지내던 '대제'에서 우주에 창조와 조선에 건설과 산천지리에 명승과 후세 사람에 거울 삼을 일을 노래했는데. 후세에 문사들은 그 노래를 혹은 구전문이던 이두문으로 편집하고. 혹은 한자에 오언시로 번역해서 왕궁에 비장했으므로. <신지비사> 또는 <해동비록> 등에 이름이 있었다.


고려에 들어선. 저작자에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 <해동고기>. <삼국사>. 등과 김부식에 <삼국사기>와 일연에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에서야 전해진 건 <삼국사기>와 <일연유사> 뿐인데, 그 전하고 전하지 아니한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두 사람만에 저작만이 우수해서 전해진게 아니라. 대개 고려 초기부터 평양에 도읍을 정해서. 북쪽으로 나아가서 옛땅을 회복하자는 화랑에 무사가 한 파를 이루었고. 강한 국가만 섬기던 '사대'로 국시를 삼아서. 압록강 안에서 구차하게 편안하게 있을 것만을 주장하던 유교도들이 한 파를 이루었다.


두 파가 대치해서 논전을 벌이기 수백 년만에 불교도 묘청은 화랑에 사상에다가 <음양가>에 미신까지 보태어서 굳이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은 이에 그에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삼아서 <삼국사기>를 지은거다.


그러므로 동.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 속에 쳐묻고 발해를 버리고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지푸라기. 초래 속에 던지고선 이두문과 한영에 구분에도 어두워서. 

한 사람은 몇 사람이 되고 한 곳이 몇 군데가 된 것도 많았으며, 궁궐 안에서 벌어진 <내사>나 외적에 침략에 대한 <외적>에 취사에만 홀려서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도 많아서 대부분은 사적인 가치는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도 그 뒤론 얼마 안 가서 고려가 몽고에 패해서 흘필렬이라 불리던 쿠벨라이 칸에 위풍이 전국을 놀라게 했고 황제궁이니 왕궁이니 하는 명사들은 죄다 철폐되고, 풍악을 올리던, 해동천자에 팔관악부마저 금지되고, 이때부터 만일 문헌에 독립자존에 대한 것이라도 있으면 일체 꺼려 피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에 허다한 역사 저서 중에선 유일한 사대사상에 고취자던 김부식에 <삼국사기>와 그에 딸린 <삼국유사>만이 전해질 수밖에 없던거다.   


고려 당대에 <사승>에 대해 말해본다면. 고려 말기엔 임금과 신하들은 고정 이전에 나라도 형세하고 강성하던 때에 기록으론 더욱 몽골을 꺼리거나 싫어함에 걸리거나 그저 두려워서 깍아버리거나, 고치고, 말을 오직 낮추고, 후하게 친 사례에 대한 예페로 북쪽 강대국들에게 복종해서 섬기던 사실만을. 부연하거나, 혹은, 지어내서 민간에다 퍼뜨렸다. 이러한 기록들은 곧 이조 때 정인지가 찬술했던 <고려사>에 원전이 되었고, 이조 세종은 비상하게도 사책에 유의했으나. 다만, 그에 할아버지인 태조와 아버지인 태종은 우두머리 장군이던 호두재상 최영에 북벌군 중에서 배신으로 모반해서, 사대에 기치를 들고 혁명에 기초를 세웠으므로, 권근. 정인지. 등에게 명해서 <조선사략>.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게 함에 있어 몽골에 압박을 받던 고려 말기 이전에 조선에 각종 실기에 의거해서 역사를 짓지도 못하고 몽골에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한 글과 위조한 고사에만 의거해서 역사를 지어내서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치고. 정작 고려 때 전대에 실록들은 민간에 전해짐도 허락하지 않았고, 규장각 안에 비장해두었었는데, 임진왜란에 전쟁으로 인한 병화에 죄다 타버렸다. 그 뒤론. 세조가 단종에 자리를 빼앗고, 만주에 침략에 대한 꿈을 품고서 강계에다 둔병을 경영하다가.


1. 자기네 태조에 존명건국에 대한 주의로 충돌되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는 일만 분분했고. 


2. 대륙에 용맹하고, 억센 명나라 성조가 있어 조선에 대한 감시가 엄중했고. 


3. 마침내 명나라 사신 장영은 엄중히 둔병에 대한 이유를 힐문하므로. 


세조는 그에 무(武)를 숭상하고, 공을 좋아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조선 문헌에 정리를 자임해서, 불경을 간행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외에 사료에 수집에도 전력해서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과 조선 풍토사인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해서, 그 밖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했으니, 비록 큰 공헌은 없었으나, 다만 얼마간 공적은 있었다 할거다. 선조. 인조.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 문학에 큰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사학계도 천천히 진보되어서, 허목에 <단군>. <신라> 등 각 세기가 너무 간략하기는 하지만, 대체론 독특한 견해는 있으며, 유형원은 비록 역사에 대한 전문 저서가 없었으나, 한백겸에 <동국지리설>은 비록 수십 줄 에 지나지 않은 단순한 논문이지만, 일반 사학계에선 큰 광명을 열어젖혀서, 후론, 정약용에 <강역고>며, 한진서에 <지리>며, 안정복에 <동사강목>에 실린 강역론이며, 그 밖에도 조선 역사 지리를 설하던 사람은 모두 한 선행들에 단순한 지리설을 부연했을 뿐이었다.  


나로서 보건대, 그 지리설 중에 삼한과 조선을 분리함은 범엽이 전한 <동이열전>에 지리를 설명함에는 족했으나, 이로써 조선 고대 삼천 년 동안에 지리를 단정해서, "동국은 옛날부터 한강 이남을 삼한이라 하고, 한강 이북을 조선이라 했다." 너무도 그런 결론을 내렸던 건 맹목적이기만 하고, 무단적이라고도 생각한다.


이건 선생은 삼신. 삼경. 삼한. 삼조선에 연락적 관계와 발조선. 발숙신. 부여조선. 예맥조선. 진국. 진번조선. 진한. 마립간. 마한. 모한. 등에 '동음이역'임을 몰랐으므로, 이 같은 큰 착오가 있게 된거다. 


그러나 <동이열전>에 보인 선생은 삼한에 위치를 비로소 단순명료하게 분석해서 밝혀 기왕에, 

역사에 대한 기록만 있고 역사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고 할 만한 조선사학계에서 선생은 처음으로 사학에 실마리를 열었다해도 좋을거다.


안정복은 평생을 <열사> 한 가지에만 노력한, 오백 년 이래에 유일한 빈한했던 선비로서 서적에 열람은 부족해서 <삼국사기> 같은 것도, 늘그막에서야 겨우 남이 베낀 틀린 글자가 많은 것을 얻어보았으므로, 그가 저술했던 <동사강목>에 궁예에 국호를 '마진기'라 한 웃음거리를 제법 남겼으며, 대륙에 서적 중에서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이나 <남제서> 같은 것이 있음을 몰라서 

고루한 구절도 적지 아니하다.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던 공구에 <춘추>며, 주희에 강목에 웅덩이에 빠져서 <기자본기> 아래로 단군과 부여를 덧붙이로 했으며, 신라. 마지막 판에 궁예와 왕건을 참주로 한 망발도 있었고, 너무 황실 중심에 대한 주의를 고수해서 정작 민족 자체에 대한 활동을 무시함도 많았었다. 


그러나 연구 정밀하기론 선생 이상 가는 이가 없었으므로, 지리에 대한 지지에, 잘못에 교정이나 사실이나 모순에 대한 변증에는 가장 공이 많다해도 좋을거다. 


유혜풍에 <발해고>는 대씨와 무공에 사업을 수록해서, 일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은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했고, 이종휘에 <수산집>은 단군 이래에 조선 고유에 독립문화를 노래해서 김부식 이후 사학가에 노예 사상을 갈파했는데, 특별한 발명이나 채집은 없었다고하더라도, 다만 이 한 가지만으로도 또한 영원히, 오래 남을 일이다.    


한치윤에 <해동역사>는 오직 대륙. 일본. 등에 서적 가운데서 보이는 우리 역사에선 빠진 부여. 발해. 가락. 숙신. 등도 모두 한 편에 세기를 구성했으며, <동국통감>엔 없던 가족사에 대한 저근. 사법명. 혜자. 왕인. 등도 각기 별로 몇 줄씩에 <전기>가 있었고, 궁중어. 문자. 풍속. 등에 부문은 있었다. 


게다가 그에 조카던 한진서에 <지리쏙>도 있어서 뒷사람들에 고증에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또한 역사학에 대한 머리도 뛰어났다고할거다. 다만, 


1. 너무 글자 사이에선 조선에 대한 사실만을 찾다가 민족 대세에 관계를 잃었으니, 곧, 부루국과 대륙 하우국에 대 국제교제로 볼 <오월춘추>에 있던 주신에 대한 창수사자와 이천 년 동안 이민족 흉노와 연국과 삼조선이 화의하거나 혹은 싸운 전후에 대한 큰 일들은 다 빠뜨렸으며.


2. 유교에 위력에만 눌려서 고죽국이 조선족에 갈래임을 발견하지 못하는 동시에, 백이. 숙이에 대한 성명도 빠뜨렸고.


3. 서적에 선택이 정확하지 못했으니, 진서에 <속석전>에 의하면, "우임금은 백익을 죽이고, 태갑은 이윤을 죽였다."는 등에 기록이 있던게 <죽서기년>에 진본이고, 현존한 <죽서기년>은 거짓인데,  거짓을 그대로다 이걸 기재했으며, 사마상여에 <무릉서>는 당나라 사람에 위조인데, 그대로 신용해서 인용했고, 이 밖에도 대륙인이나 일본인도 없던 사실을 만들어내서 우리나라를 속이고 모욕한 걸 많이 그래도 수입했으니, 이게 그에 책에서 결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일대에 일을 적은 역사로 말하자면, 내가 일찍 정종조 한때에 기록을 엮은 <수서>라는 아주 잔글자로 쓴 이백 권에 거질을 보았었고, 만일 <관서>인 <국조보감>, <조야첨재>. 등을 비롯해서, 허다한 개인 저술에 역사서까지 친다면 몇 백에 수레엔 찰 것이다. 


이 태조 이하에 사실을 적은 역사로는 <조야집요>. <연려실기술> 등 몇몇 책을 대강 훑어본 이외에는 자세히 다 읽어본 건 없었으므로, 아직 그 낫고 못함을 말하진 못하거니와, 대개 열에 일고여덟은 사색에 <당쟁사>임은 단언할 수 있을거니, 아. 이조. 이래로 수백 년 동안에 조선인에 문화사업은 이에 끊어졌도다. 


이상에 열거한 역사서를 다시 말한다면, 


첫째로는, 대개는 정치사요. 문화사에 해당하는 건 몇이 됨은 유감이요.


둘째로는, 정치사 중에선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현재에 답할 저서가 없고, 몯, 한 왕조에 흥하고, 망한 전말로 글에 수미만을 삼았음이 유감이요.


셋째로는, 공구에 <춘추>를 역사에 절대적인 준칙으로 알아서 그 의례를 본받아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기를 위주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나라까지 비방하는 편벽된 논란을 벌임이 유감이요. 


넷째로는, 국민에 자감에 이바지하려 함보다 외국인에게 아첨하려 한 의사가 더 많고, 자기 나라에 강토를 조각조각 베어주어 마지막에 가선 건국 시대에 수도까지 모르게 만들었음이 유감이다. 


우리에 사학계가 이와같이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 등. 온갖 병을 죄다 가져서 정당한 발달을 얻지 못함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너무 자주 내락, 외환, 자연에 재난이 잦았던 것은 그만두고서라도, 인위에도 장애를 이룬 걸 들건대,  


1. 신재 때 이래로 역사를 비장해두는 버릇은 역사에 고질이 되어서 이조 때에서도 중기 이전에는 <동국통감>, <고려사> 등 몇몇 관에 간행했던 책 이외에는 사사로이 역사를 짓는 걸 금지했으므로, 이수광은 내각에 들어서야, 고려 이전에 <비사>를 많이 보았다했고, 이언적은 <사벌국전>을 지어가지고도, 벗에게 보임을 꺼려했다.


2. 송도를 지나다 만월대를 쳐다보라. 반쪽에 기와는 남아 있는가. 한 개에 주초라도 남아 있는가. 막막하게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이 아니던가. 슬프다. 만월대는 이조에 아버지뻘로도 멀지 않은 고려조에 대궐인데. 무슨 병화에 탔다는 설도 없이 어찌 이와같이 정도 없는 빈터만 남았던가. 


이와 똑같은 예로서 백제에 유물을 찾아볼 수 없으며, 평양에서 고구려에 옛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다. 이에서 나온 결론은 뒤에 일어난 왕조는 앞에 왕조를 미워해서 역사적으로 자랑할만한 건 무엇이든지 파괴하고, 태워버리기를 위주한거다. 신라로 일어나면.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역사는 볼게 없어졌고, 고려로 일어나면. 신라에 역사가 볼게 없어졌으며, 이조로 대신하면 고려에 역사는 볼게 없어져서 매번 현재로서 과거를 계속해서 아니하고 말살하려 했다. 그래서 역사에 쓰일 자료가 박약해졌으며. 


3. 현종은, "조총에 길이는 얼마나 되오"하니. 유혁연은 두 손을 들고서, "이만합니다"하고 형용했다. 기주관은 문답한 정형을 받아쓰지도 못하고 붓방아만 찧고 있었다. 유혁연은 그를 돌아보고선, "전하계선 유혁연에게 조총에 길이를 물으시니, 혁연은 손을 들어, "자, 남짓하고 이만합니다라고 쓰지 못하느냐."하고 꾸짖었다. 숙종은 박태보를 친히 심문하고, 문초하는데,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돌로 때려라."하니, 주서 벼슬에, 고사직은 서슴없이, "필(必), 모양으로 결박해서 돌로 때려라."고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건 궁정에 한 가화로 전해진 이야기이지만, 반면에 남에 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거다. 국문이 늦게 나오기도 했지만, 나온 뒤에도 한문으로 저술한 역사만 있음은 또 기괴하다. 이는 역사 기록에 대한 기구도 부족함이요. 


4. 회재나 퇴계더러 원효나 의상에 학술사상에 위치를 물으면 한 마디도 대답을 못할거요. 원효나 의상에게 소도나 내을에 신앙적 가치를 말한다면, 반분에 이해도 못할거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조 때 인사들은 고려 시대에 생활에 취미를 모르고, 고려나 삼국에 인사들은 또 삼한 이저에 생활에 취미를 모를만큼 반식. 거처. 신앙. 교육. 등. 일반 사회에 형식, 정신은 모두 변해서, 오늘에 아메리카 사람으로 내일은 러시아 사람됨과 같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는 역사 사상에 연락은 끊어짐이라, 어디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구명할 동기가 생기랴. 이상 몇 가지 원인으로 우리에 역사학은 올바르게 발달하지도 못한거다. 


삼백 년 동안 사색에 다파 싸움은 크게 국가에 해를 끼쳤다 하지만, 당론은 극렬할수록, 제각기 나는 옳고 저는 그르다는 걸 퍼뜨리기 위해서 사사로운 기술만 성행하고, 당에 시비는 매번 국정에 관계되므로, 따라서 조정에 잘잘못을 논술하게 되어, 모르는 사이에 역사에 사사로운 저작에 금지는 깨드려져서, 마침내, 한백겸. 안정복. 이종휘. 한치윤. 등 사학계에 몇몇 인물이 배치되었음에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혹은 어떤 이는. "사색 이후에 역사는 서로, 피차에 기록들은 모순되어 그 시비마저 가릴 수가 없어서 가장 역사에 난관이 된다고." 하지만, 그들에 시비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 당이나 이조에 충신이니, 역적이니, 아무 선생이나, 주자학에 전통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들뿐인지라. 오늘날 우리에 눈으로 보면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둘러서 임금에 시체를 두 동강을 낸 연개소문을 쾌남아라 할 거고, 자신에 의견을 주장해서 명륜당 기둥에다 공자를 비평한 글을 붙이 윤백호를 걸물이라 할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두뇌로써, 회재. 화담. 퇴계. 율곡. 등에 학술상 공헌에 많고, 적음은 알아야할거다. 주자학에 정통이 되고, 안 됨은 희담만 될 뿐이고, 노론. 소론. 남인. 북인에 다툼은 그 정치상에 미친 영향에 좋고 나쁨을 물을 뿐이고, 이조에 충성된 종되고 못됨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개인에 사사로운 덕에 결점을 지적해서, 남에 명예를 더럽히고 혹은 애매한 사실로 남을 배신하고, 모함해서 죽인 허다한 사건들은 반면에 있어선, 당시에 사회 알력에 나쁜 습속으로 국민과 나라를 해친 일종에 통탄할 사료가 될 뿐이다. 


만일 시어머니에 역정과 며느리에 푸념에 지나지 않는 일에 낱낱이 재판관을 불러 그 굽고 곧음을 판결하려고만 든다면, 이는 스펜서에 이른바 이웃집 고양이 새끼를 낳았다는 보고 같아서 도리어 이로써 사학계에 다른 중대한 문제를 등한시 할 염려도 있으니, 그냥. 그저 던져둠이 옳다.

그리고 빨리 지리 관계라든가, 국민생활 관계라든가, 민족에 성쇠라든가하는 더 큰 문제에 주의해서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걸 구해서, 조선 사학계에 표준을 세움은 오히려 급선무 중에 급선무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역사는 역사를 위해 짓는 것이요. 역사 외에는 딴 목적을 위해 짓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으로, '사회유동상태'를 잘 따져보고,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는게

역사고작성자에 목적에 따라서만, 사실을 좌우하거나, 덧붙이거나, 달리 고칠게 아니기 때문이다.

 

화가는 사람에 얼굴을 그릴 때. 이를테면, 연개소문을 그리자면, 모습은 털털한 연개소문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을 그리려면, 몸집이 마른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 만일 이도 저도 아닌 억제하고 드날릴 마음으로만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바꾸어서만 그린다면. 화가에 본분에는 어긋날 뿐 아니라. 본인에 대한 면목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실대로만, 영국사를 지으면. 영제사가 되고. 러시아를 지으면. 소련사가 되며. 조선사를 지으면. 조선제국사가 되는 것인데. 기왕에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더냐 하면 수긍하기 어렵다.

 

안정복은. <동서강목>이란 국사를 짓다가. 자주, 내란에 잦음과 외적의 출몰로, 겨레(우리나라)에 대한 옛역사를 흔적도 없게 했음을 슬퍼하였다. 나로서 보건대. <조선사>는 내락이나 외적의 전쟁에서 보다. <조선사>를 저술하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랬냐마는. 역사란 머리로 쓴 말로 같이,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발전으로 되어온, 사회 활동 상태에 대한 기록이므로. . . 사람이란 세 가지는 역사를 이루는 큰 세 가지 요소들이므로. 이 요소들을 올바르게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라에선. . . 김이란 세 성과. 신라를 건국하고자 했던. <돌산고허촌>

 

여섯 지방에 사람으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경상도 지방. 고구려. 백제와 한 시대인 때로써 된 것이니. 만일 보다 더 거슬러. 현재로부터. 2000년 전인 왕검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선. 2천 년 뒤인 오늘에서 따른 같은 시국이라면. 비록. 박혁거세의 지혜와. 소박한 여섯 지방 사람들의 정직함. 신라라는 계림에 대한 비록 땅을 소유했을지라도. 당시와는 똑같이 될 수 없으며.

 

또 위치가 유럽에 놓였거나.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또한 다른 면목에 나라는 되었을지언정.

 

당시에는 당최. 나라는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건. 지극히도 명백한 이치인데. 기왕에. 조선에 역사가들은 매번 그 짓는 바 역사를 자신에 목적을 희생으로 만들어서. 도깨비도 떠 옮기지도 못한 땅을 떠 옮기는 재주를 부려, 고구려란 졸본을 떠다가, 성천이란 화천 부근에 두질 않나. 우리 북쪽에단. 영변. 안주군에 다가 갖다놓고선. 만주에 있던 안시성을 떠다가, 북쪽에. 용강 혹은 안주에다 또 갖다놓질 않나. 평양에. 아사산을 떠다가. 황해도에 구월산을 만들어놓질 않나. 웅상이던 가슬라를 떠다. 강원도 강릉군을 만들어놨다.

 


근거도 없던 역사를 지멋대로 지어놔서.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게 짓자고 했던. 압록강 이내에 이상적인 강역마저 정하려고만 했고. 무극. 일연. 등 불자가 지은 역사책에는 불법이 단 한 글자도 들어 오지 않는 왕검시대에부터. 인도에 범어로 만든 지명이나 인명만 가득하고. 김부식. . 유가학파들이 적어놓은. 문자에는 공자.맹자에 인의를 무시하는 삼국무사에 입에서 경전문구만 관용어처럼 외워지고. 대륙 삼국사. 말로 전한 기전서에는 여러 백년 동안에 조선 전역에 인심을 지배하던, 수도 등지에 있던, 영량.술랑.안상.남석행. 등 네 대성에 대한 논설은 볼 수도 없고. 유학했던 최치원만 세세하게도 서술했으며. <역사서>. <여사제강>에는 원효. 의상. 등 여러 철학인들의 불학에 영향된 고려 일대에 사상은 어떠했는지는 볼 수도 없고. 태조 왕.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이 통일 이후에. 불교를 헐뜯어 올렸다는. <간불소>란 내용만 적혀 있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때에 구속을 받지도 않고. 지멋대로. 역사를 지어놔서. 자기만에만. 

아첨된 신앙에 주관적 심리에만 부합하고자 했으며. 심한 경우엔. 사람까지 속여놔서. 신라에.

금왕마저. 인도에 크샤트리아였던. 찰제리종이라 하질 않나. 고구려 추모왕마저. 대륙 제곡에 후손이라 하질 않나. 게다가 조선 사상에 근원이 되던. 운수를 점치던. <서운관>. 책들을 공자에 말하고자 한 바도 어긋났다 하여.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두형도 말하기를. "근래에 어느 명문이나. 묘지명을 보든지. 주인공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하거나 덕성은 훌륭하고. 학문은 정주를 모시고. 문장은 한유를 존경해서. 거의 비슷하니. 사람을 속일 뿐만 아니라. 글도 가치가 없다."고 했다. 개인적이기만 한 전기에 대한 실상을 잃은 데에 대한 개탄일 뿐이지만은. 이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던. 세월이란 도끼. 아래로. 자라난. 후세 사람들은. 마음이나 습속이로도. 삼국에 대한 풍속만을 이야기하고. 치우치고 말만 자르르한. 글들에 만족한 이조 당대에 사람들은 그러한 주관으로. 상고지리를 그리니. 이에 조선이나. 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대륙이나. 고려나. 이조 5천 년 이내에 모든 조선이 거의 한도가니로 부어내서. 땅이 늘고 줄어듦에 따라. 민족 활동이 활발하고 약해진 점이나. 시대에 고금만을 좇아.

 

국민이란 민족사상에만. 갈린 금을 도무지 찾을 수조차 없다.

크롬웰이란 화가는 자신에 상을 그릴 때면. 왼쪽 눈 위에 혹을 빼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했고.

자신을 그리려면. 자신에 직접 본 얼굴로 직접. 그리라고 했으니. 이 말은 화가에 아첨함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곧 자신의 참된 상을 잃을까 함이었다.

기왕에. <조선사>를 지은 이전에 조선에 역사가들은. 매번. 조선에 혹을 베어내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이 쓴 안경은 너무 볼록했으므로. 어디. 조선에.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버리고선. 어디서도 볼 수 없던 혹을 가져다가. 정말로. 붙여놨다. 혹 붙인 <조선사>도 기왕에. 읽는 이도 너무 없다가. 세계가 서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자주. 조선인을 만나서. <조선사>를 묻는데.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알고 있어서. 너무 부끄러운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 옳은 <조선사>도 아니었다. 기왕에. 있는 기록이 다 틀린 것이라면. 무엇에 의거해서. 도대체 바른 <조선사>를 짓겠는가. 채로 거를 줄 아는 사람들이. 모래 한 말을. 일면. 좁쌀만한. 금을 하나 얻거나. 혹은. 하나도 얻지 못하기도 하나니. 우리에. 글문들을. 사료로. 구하기도. 이같이. 어려운지라.

 

. 어떤 사람은. <조선사>를 연구하려하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에. 땅 속을 파서. 많은 발견이 있어야만 하고. 금석학. 고전학. 지리학. 미술학. 계보. 등을. 연구하는 학자만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은데. 그도. 그러하거니와. 우선 급한대로. 수중에 있는 부족한 현금으로나마.

 

역사적 사실들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고, 진위를 비교해서. 그나마라도.

<조선사>에 앞길을 개척하는게. 더 급선무인가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